우리도 사랑이었을까.
어느 영화 제목처럼 그런 생각을 가끔 하곤 합니다.
사랑이 아니었으면 뭐였겠냐고 물으시면
어쩌면 필요는 아녔을까
그 시간에 그 장소에서 서로가 필요했던 것은 아녔을까.
필요가 사랑의 감투를 쓰고
나는 나와 당신에게
당신은 당신 자신과 나에게
거짓을 말하고 있었던 건 아닌가 싶습니다.
해운대 달맞이 길을 뜨는 해와 같이 걸으면서
당신이 자꾸 생각났습니다.
드넓고 잔잔한 바다와
기분 좋게 찰랑이는 파도소리와
손바닥과 손가락 사이로 만져지는 바람과
어슬렁어슬렁 걸으면서
당신이 자꾸 생각났습니다.
미안하지만
한 번도 연락하지 않는 우리가 아쉽다거나
보고 싶어 만나고 싶다 거 나는 아녔습니다
그저 당신이 옆에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같이 걷고 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과거에 우리가 그랬듯
서로 별 말이 없이
당신은 뒷짐을 지고
나는 팔짱을 끼고
그저 함께 걸었습니다.
나는 해운대 달맞이 길을
당신은 내 머릿속을
1~2km 도 제대로 걸어내지 못하면서
금세 배가 고파진 나는 달맞이언덕 조용한 주택가에 위치한 비비비당에 앉았습니다.
전통찻집 비비비당은
모던한 콘크리트 건물 탑층에 위치하고 있으나
들어서면 전통 가옥의 툇마루와 창호지 문으로
장식한 카페입니다.
탁 트인 유리창으로 잔잔한 바다와
청사포항이 내려다 보입니다.
숨 막히게 예쁜 곳입니다.
달맞이길의 여정 중 여기서 쉬어 가기를 잘한 것 같습니다.
30여분을 바다에 넋을 잃고 걷는 동안
5월 중순임에도 몸이 차가워졌습니다.
대추차를 주문해 몸을 녹여 봅니다.
오전 11가 넘어가지만 아메리카노 밖에
주지 않은 배가 울어대서
다과세트도 시켜봅니다.
비비비당 非非非堂은
불교 경전의 비상비비상천 非想非非想天
에서 유래하였으며
삼계三界의 여러 하늘 가운데 가장 높은 하늘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모든 욕망과 물질을 초월하여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청정한 세계라고 하는데
저와는 연이 없어 보입니다.
그저 한글과 한자가 어우러져 프린트된
냅킨이 예쁘다는 생각이 들뿐입니다.
고즈넉한 한옥 콘셉트의 인테리어와 어울리게
조용한 피아노 배경음악이 흐릅니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들과
잘 어울리는 음악입니다.
대추차가 뜨거우니 조심하라는 경고를
주인에게 받았음에도
성질 급한 나는 벌컥 들이켜서
혀를 데고 목구멍에 뜨거움이 지나가는 것을
느끼고 맙니다.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급하게 들이켜고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뜨거움을
느끼며 웃던 나를
당신은 항상 이해 불가한 표정으로
쳐다보곤 했었지요
그 기억을 소환하고 맙니다.
오늘 아침에 당신이 자주 쓰던
내가 좋아하던 향수를
쓰는 것이 아니었나 봅니다.
기억이 자꾸 소환되어 오니 말입니다.
기억해 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럴 여유가 지금 나에게 있다는 것
슬프거나 아프기보다
담담하게 기억을 대면한 다는 것
모두 감사합니다.
비비비당의 주인은 모든 손님이
'청정한 여유의 시간'으로
이곳에 머물다 가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오후 일정에 늦을 듯싶습니다
대추차를 다 마셔도 나는
오래오래 여기에 앉아 있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