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폰스무하 : 빛과 꿈 - Part2

@더현대 서울 ALT.1

by 상상만두



3. 1900년 파리 - 아르누보 영광의 이면


19세기 마지막 해에 열린 제5회 파리 만국박람회는 지난 세기 인류의 위대한 성취를 기념하고 다가오는 20 세기를 맞이하는 세계적 축제였다. 58개국이 참가했고, 7개월(4월 15일~11월 12일) 동안 4,800만 명이 넘는 관람객이 찾은 이 박람회는 '세기의 행사'로 불릴 만큼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무하는 이 무대에서 자신의 명성을 한층 더 높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을 대표하는 공식 예술가로는 제국의 3개 전시관 중 하나인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전시관의 장식과 홍보물 디자인을 맡았다. 또한 파리의 대표 예술가로서 프랑스의 유수 제조사와 협업하고 보석상 조르주 푸케와 함께 박람회 전용 주얼리 컬렉션 전체를 디자인했다.


그러나 무하에게 이 영광의 무대는 역설적으로 유럽 문명의 화려함 이면에 도사린 어두운 현실을 마주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1899년 봄 그는 오스트리아 정부의 의뢰로 오스트리아 전시관 홍보 포스터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전시관 장식 디자인을 맡았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1878년부터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 편입되어 있었으며, 그 당시 제국의 정치적 플랫폼으로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 전시관이었다.


처음에는 이 의뢰에 기뻐했던 무하였지만, 발칸반도로 현장 조사를 떠난 그는 그곳에서 남슬라브인들이 겪는 문화적·정치적 어려움을 직접 목격했다. 제국을 위해 일하는 자신과 달리 동족 슬라브인들이 오스트리아 통치 아래 고통받는 현실은 깊은 아이러니로 다가왔다. 이 경험은 무하에게 결정적인 깨달음을 안겼다. 그는 모든 슬라브민족의 '기쁨과 슬픔'을 담고, 공동체적 유대와 억압에 맞선 투쟁을 그릴 〈슬라브 서사시〉의 창작을 자신의 필생 과업으로 삼기로 결심했다.




AlphonseMucha-076.jpg 자화상, 1899 패널에 유채, 32 ×21cm



내 소중한 시간은 이런 일에 쓰이고 있었구나.
정작 나의 민족은 시궁창 물로 목을 축이고 있는데...
그 순간 나는 내 민족의 것을 죄스럽게 훔치고 있다는 영혼의 자각을 느꼈다.
자정이 되자 나는 작업실의 모든 것을 둘러보며,
남은 생은 오직 내 민족을 위해 바치겠다고 엄숙히 맹세했다 "

- 알폰스 무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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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색 부르카를 두른 이슬람 여인, 1900, 종이에 연필, 담채, 흰색 과슈, 45 ×25cm





보스니아 전설: 하사 나가 신부의 죽음, 1899, 종이에 목탄, 43.5x59.5cm





보스니아 전설: 역병 여인 무르시아, 1899, 종이에 목탄, 44.5 ×59.5cm


무하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전시관 장식에 착수하기에 앞서, 발칸반도를 여행하며 현지의 인상을 화폭에 담고 다양한 스케치를 남겼다. 특히 보스니아 전설 속 비극적 사건들에서 영감을 받아 다수의 목탄 드로잉을 제작했으며, 그중 두 점이 이번 전시에 소개된다. 무하는 본래 이 비극적 주제들을 벽화에 포함하려 했으나, 오스트리아 당국의 수정 요청에 따라 국가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방향으로 구상을 변경해야 했다. 그 결과, 최종적으로 완성된 작품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다양한 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이상적인 문명으로 묘사하고 있다.






앉아 있는 여인의 초상:〈백합의 성모를〉위한 습작, c.1904, 종이에 파스텔, 연필, 담채, 100x70cm







백합의 성모, 1905, 캔버스에 유채, 템페라, 247x182cm


〈백합의 성모〉는 스테인드글라스 디자인과 함께 예루살렘의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될 교회 장식으로 계획된 작품이다. 1902년에 의뢰받았으나 1905년 알 수 없는 이유로 프로젝트는 취소되었다.

아내 마루슈카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무하는 작품의 주제를 '동정녀 마리아'로 설정하고, 순결의 상징인 백합에 둘러싸인 성모의 영적인 모습을 그렸다. 작품 속, 슬라 민속, 의상을 입은 소녀는 추억을 상징하는 담쟁이덩굴 화관을 들고 있다. 무하는 성모의 비현실적인 형상과 송년의 강한 실재감을 대비시키면서, 성모를 신비로운 힘으로 빚을 발하여 소녀를 비추는 영적인 존재로 묘사했다. 소녀는 그 천상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는 듯 보이지만, 성모의 긴 베일 자락이 부드럽게 소녀에게 닿으며 축복을 내리고 있다.







화합: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디자인(미실현 작), c.1904

종이에 잉크, 수채, 크레용, 90 ×130cm






르 파테르』, 1899, 도서, 텍스트, 삽화, 디자인 총괄: 무하, 파리 F. 상푸누아/H. 피아자 출판사 발행, 41 ×30 ×1.5cm






르 파테르』세 번째 표지 페이지 '나라가 임하옵시며', 1899, 컬러 석판화, 40.4 ×30.2cm








르 파테르』세 번째 표지 페이지, '나라가 임하옵시며', 1899, 컬러 석판화, 40.4x30.2cm







르 파테르』세 번째 알레고리 장면 페이지 '나라가 임하옵시며', 1899, 컬러 석판화, 40.4x30.2cm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오스트리아 파빌리온을 위한 포스터, 1900, 컬러 석판화, 98.5 ×68cm






자연의 여신, c.1900, 청동, 공작석, 70 ×27 ×28cm


이 청동 흉상은 무하의 조각 작품〈자연의 여신〉의 여러 에디션 중 하나로,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오스트리아관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현재까지 총 7개 버전이 알려져 있으며, 본 작품은 그중 가장 최근에 발견된 것이다. 각 에디션은 티아라의 세부 장식이나 귀걸이 유무, 파티나 마감 방식 등에서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특히 원본 조각의 타원형 장식 자리에는 실제 전구가 설치되었는데, 당시 새로운 예술 매체로 인식되던 전기의 사용은 박람회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작품의 전반적인 구상은 1896년에 제작된〈황도 12궁〉 속 여성의 모습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 미술사학자 필립 쥘리앙(1919-1977)은 이 작품을 '자비 없는 아름다운 여인'이라 칭하며, '수수께끼 같은 표정과 감은 눈을 통해 내면의 몽상에 잠긴 세기말 여성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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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식 도안집, 전면 삽화 1번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공식 만찬메뉴 디자인), 컬러 석판화,

46 ×33cm, 파리 보자르미술대학 중앙도서관에서 발간된 장식 도안집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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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파빌리온 레스토랑의 메뉴 디자인, 1900

종이에 연필, 잉크, 수채, 흰색 과슈, 62.5 ×24.5cm





1. 무하와 사진


파리에서 명성을 얻기 전인 18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그의 사진 작업은 특정 장르에 국한되지 않았다. 가족과 친구, 자신을 담은 초상에서부터 시대의 풍경과 사건을 포착한 기록, 스튜디오 모델과 자연의 형태를 탐구한 예술 습작에 이르기까지, 그의 렌즈는 폭넓은 세계를 아울렀다.



Self-Portrait

우크라이나 민속 셔츠를 입은 무하, 파리, C.18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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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스튜디오 사진


파리 시절, 사진은 무하의 창작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890년대 후반, 스튜디오 촬영 시 무하는 특정 작품 구상에 얽매이지 않고 모델과 즉흥적으로 다양한 포즈를 탐구하며 자유롭게 작업했다. 이렇게 촬영된 이미지들은 훗날 그의 회화와 장식 디자인에 중요한 영감을 주었으며, 동시에 그의 예술적 실험 과정을 보여주는 귀중한 연구 자료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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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슬라브 서사시와 사진


사진은 무하의 대표작인 〈슬라브 서사시 〉제작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사진 작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1913년 러시아와 1924년 발칸반도 등지를 답사하며 촬영한 다큐멘터리 사진이고,

다른 하나는 츠비로흐 성과 프라하의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연출 사진 (mise-en-scene)이다.

연출 사진에서 무하는 의상을 갖춘 모델들이 자신의 연극적 연출 아래 자유롭게 움직이며

포즈를 취하도록 지도했다.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스케치하는 무하





〈슬라브 서사시 〉제2번 '스판토비트 축제' 속 고통받는 발트 슬라브인으로 포즈를 취하는 모델





〈슬라브 서사시 〉 제1번 '고향의 슬라브인' 속 이교도 사제(중앙)와 전쟁 및 평화의 알레고리 인물로 포즈를 취하는 모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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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가 발칸 지역 답사 중 찍은 폐허가 된 정교회 (루지차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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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가 발칸 지역 답사 중 찍은 아토스산 할란다르 수도원의 창밖 풍경





무하가 답사 중 찍은 아토스산의 슬라브 수도원 사제들





대지를 깨우는 봄, 1933, 캔버스에 유채, 136x90cm








4. 조국을 위하여 빛으로 되찾을 조국의 꿈


1904년 봄 무하는 장기 구상 중이던 슬라브 서사시를 실현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4년 전 결심한 그 계획을 현실로 옮기기 위해 그는 작품 제작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할 방법을 모색했다. 파리 미술계와 연계된 관계를 정리하고 '기회의 땅'으로 불리던 미국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시험하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렸으며, 1904 년부터 1909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미국을 방문했다.

이 시기에 무하는 시카고 출신의 자선가이자 사업가인 찰스 리처드 크레인을 만나게 된다. 그는 이후 슬라브 서사시의 주된 후원자가 된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초대 대통령 토마시 마사리크의 친구이자 열렬한 슬라브 민족주의자였던 크레인은 시카고대학교에 슬라브학 연구과정을 설립하는 데 기여했으며, 독립된 슬라브 국가들이 공존하는 '새로운 유럽'을 꿈꾸었던 무하의 비전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1909년 12월 말 무하는 마침내 크레인으로부터 재정 후원을 약속받았다. 이듬해 그는 예술을 통해 조국의 정치적 자유에 헌신하고자 한 오랜 염원을 이루기 위해 25년에 걸친 해외 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17년 동안 그는 슬라브 서사시제작에 매진하는 한편, 자신의 신념과 뜻을 함께하는 다양한 의뢰 작업도 병행했다.

이 섹션의 전반부에서는 무하의 미국 시절과 크레인과 만나는 부분을 중심으로 다루며, 후반부에서는 귀국 이후 체코를 주제로 한 그의 작품을 조명한다. 여기에는 국가를 위한 첫 공공 프로젝트였던 프라하 시민회관의 장식 작업을 비롯해 제1차 세계대전 전후 무하가 슬라브 세계와 관련한 자신의 정서를 표현한 작품이 포함된다.



AlphonseMucha-108.jpg 알폰스 무하의 초상 (에드워드 스타이켄(1879-1973작)




무하의 미국 활동


1904년 무하가 처음 미국을 방문했을 때 미국 언론은 그를 '세계 최고의 장식 예술가'로 소개하며 열렬히 환영했다. 그는 시카고미술대학을 비롯한 여러 미술교육 기관에서 정기적으로 강의를 진행하면서 초상화와 삽화, 포스터 등 다양한 의뢰 작업도 병행했다. 그러나 그 시기 그의 활동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성과는 연극 관련 프로젝트였다. 무하는 '미국의 사라 베르나르'로 불린 레슬리 카터와 브로드웨이의 대표 인기 배우 마우드 애덤스와 협업했으며, 뉴욕 독일극장의 실내 디자인을 맡았다.


미국에서 체류하는 동안 무하는 미국슬라브협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그 단체는 이후 뉴욕에 설립된 슬라브계미국문화협회로 발전했으며, 12개 민족 집단을 대표하고 "슬라브계 사람들이 하나의 문화적, 정치적 세력으로서... 미국 사회에 기여한 바"를 널리 알리는 역할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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