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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공화국 남모라비아 지방의 작은 마을 이반치체에서 태어난 알폰스 무하는 자국을 넘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체코 예술가 중 한 사람이다. 그의 이름은 20세기 전환기에 근대 디자인의 토대를 마련한 국제적 예술운동인 아르누보(Art Nouveau)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무하는 1890년대 파리에서 제작한 포스터로 시각예술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매혹적인 여성상과 혁신적인 타이포그래피, 치밀하게 계산된 화면 구성을 결합함으로써 단순한 미적 아름다움을 넘어 대중과 소통하는 강력한 시각언어를 완성했다.
이 같은 독창적인 양식은 '무하 스타일(le style Mucha)'로 불리며 아르누보의 대표적 상징이 되었고, 현대 광고예술과 시각문화의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비록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활동한 국제적 예술가였으나 무하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체코인으로서 정체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반치체에서 보낸 어린 시절과 빈과 뮌헨에서 보낸 수련기를 거쳐 1904년 《뉴욕 데일리뉴스》로부터 '세계 최고의 장식 예술가'로 불리기까지, 그의 예술의 중심에는 언제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조국의 정치적·문화적 자주성을 향한 비전이 놓여 있었다. 귀국 후 완성한 후기 대작 〈슬라브 서사시〉(1912-1926)는 그 비전의 결실이자 예술적 사명의 정점이었다. 무하는 예술의 보편성과 소통의 힘을 믿었으며, 그 힘을 통해 식민과 전쟁으로 분열된 슬라브민족의 정신적 통합과 평화에 기여하고자 했다.
이번 전시 《알폰스 무하: 빛과 꿈》은 무하의 예술적 업적을 재조명하며, 그가 현대 그래픽디자인의 선구자로 확립한 위상과 비전 있는 예술가로서 철학적 발전 과정을 탐구한다. 무하트러스트 소장품 143 점을 중심으로 구성된 이번 전시의 전반부는 그의 파리 시절을 다루며, 프랑스의 전설적 배우 사라 베르나르 (1844-1923)와 협업을 조명한다. 전시의 후반부는 무하가 파리 예술계를 떠나 조국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귀국한 이후의 작업 세계를 집중적으로 탐구한다. 그 정점에 위치한 〈슬라브 서사시〉(섹션 5)는 슬라브민족의 역사를 그린 20점의 기념비적 연작으로서 무하의 예술적 사명과 인류적 비전이 완성된 결정체라 할 수 있다. 이번 전시는 이런 무하의 다층적 성취를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하며, 예술사에서 그의 위상을 다시금 재평가하고자 한다.
예술가의 사명은 사람들이 아름다움과 조화를 사랑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 알폰스 무하
'백합의 성모'와 '자연(의 여신)'은 무하의 예술 세계를 이해하는 두 개의 축을 제시한다. 하나는 종교와 민족이라는 정체성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에서 찾은 예술의 본질입니다.
무하는 파리에서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는 항상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를 잊지 않았다. 그의 작품에는 화려한 아르누보의 외형 속에 체코 출신 예술가로서의 정체성과 가톨릭 신자로서의 신앙, 그리고 자연을 사랑하는 예술가로서의 철학이 깊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전시를 관람하며 무하의 작품이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예술가의 고민과 신념, 그리고 시대의 아픔이 함께 담겨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특히 이 두 작품은 화려함 너머의 무하, 진정한 예술가 무하를 만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무하의 작품 앞에 서면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100년이 넘은 작품임에도 여전히 현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유는, 그가 추구했던 아름다움이 유행을 초월한 본질적인 것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빛과 꿈'이라는 전시 제목처럼, 무하의 예술은 빛나는 외형과 깊은 내면의 꿈이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무하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는 귀한 기회였습니다.
이전 전시도 참조 하시면 좋을것 같아 제가 정리해둔 내용 링크 걸어 둡니다.
https://brunch.co.kr/@brandyoung/700
전시는 무하가 파리 시절, 전설적인 배우 사라 베르나르를 위해 제작한 첫 포스터, 〈지스몽다〉에서 시작된다. 이 작품은 '신성한 사라(Divine Sarah)'로 불리던 베르나르와 6년간 이뤄진 협업의 서막이자, 무하를 '아르누보의 거장'으로 세상에 확실히 각인한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1894년 말 무하는 베르나르가 재공연을 준비하던 연극《지스몽다》의 포스터 제작을 의뢰하면서 베르나르와 처음 만났다. 그 당시 무하는 삽화가로서 명성을 얻고 있었지만, 파리의 거리와 간행물을 장식하며 새롭게 떠오르는 포스터 예술 분야에서는 거의 무명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나르는 무하의 혁신적인 디자인에 매료되었다. 그의 작품은 우아한 곡선과 섬세한 파스텔 톤, 전례 없는 세로 구도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무엇보다 무하는 배우의 실제 모습이 아니라 배역의 본질, 즉 베르나르의 예술혼을 꿰뚫고 있었다. 이는 무대 위에서 베르나르가 추구하던 이상적 자아상과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1895년 새해 첫날 《지스몽다》의 포스터가 파리 전역에 내걸리자 도시는 커다란 반향으로 들끓었다. 그 성공을 계기로 베르나르는 무하에게 6년간의 전속 계약을 제안했고, 그는 단순한 디자이너를 넘어 예술감독으로서 의상, 장신구, 무대 장치까지 총괄하는 역할을 맡으며 포스터 6점을 추가로 제작했다. 그 시기에 탄생한 작품은 사라 베르나르를 불멸의 무대 아이콘으로 자리 잡게 했다.
이번 섹션에서는 '신성한 배우'를 위해 탄생한 무하의 대표 포스터를 통해 두 예술가의 만남으로 무하의 예술적 양식과 철학이 어떻게 완성되어 가는지 살펴본다.
《베르테르》 연극 프로그램 북, 1903, 소책자 Booklet, 24.8 ×15.3cm
《르 골루아》-《지스몽다》 크리스마스 특집호, 화보 잡지, 무하의 표지와 삽화 디자인, 33 ×26cm
사라 베르나르의 공연을 기록한 잡지〈르뷔 일뤼스트레>의 표지, c.1896
잡지 페이지 lIlustrated magazine, 32 ×24cm
지스몽다, 1894, 컬러 석판화, 216 ×74.2cm
지스몽다로 분한 사라 베르나르의 초상 c.1895 바이런 컴퍼니 촬영 홍보사진
중세 그리스를 배경으로 한 《지스몽다》는 빅토리앙 사르두의 희곡을 바탕으로 사라 베르나르가 직접 제작•연출하고 주연을 맡은 첫 작품이다. 파리의 르네상스, 극장을 인수한 뒤 그녀가 선보인 첫 무대 중 하나로, 베르나르는 이곳에서 주연 배우이자 예술감독으로 활약하며 무하와의 협업을 시작했다. 이를 통해 그녀는 파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예술가로서의 명성을 확고히 했다.
작품에서 무하는 그녀를 정교하게 자수가 놓인 가운과 난초 정식 머리관을 착용하고,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든 비잔틴 귀부인으로 묘사했다. 이 포즈는 극의 클라이맥스인 종려주일 행렬 장면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사라 베르나르만큼 한 사람의 영혼이 육신이라는 그릇에
그토록 온전히 담기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
얼굴의 모든 표정과 옷자락의 미세한 떨림까지도, 그 모든 것은
내면의 가장 깊은 열망이 빚어낸 필연이었다."
- 알폰스 무하
연인들, 1895, 컬러 석판화, 106.5 ×137cm
<먼 나라의 공주> 속 사라 베르나르: 1896년 12월 15일 자 《라 플륌》 잡지 게재를 알리는 광고 (미술판)
1896, 컬러 석판화, 69 ×51 cm
이 포스터 속 사라 베르나르는 에드몽 로스탕이 그녀를 위해 집필하여 1895년에 초연한 희곡 《먼 나라의 공주)의 여주인공 멜리생드의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무하는 당대 최고의 여배우였던 그녀를 기리기 위해 1896년 12월 9일 열릴 만찬회를 알리는 동시에, 《라 플림》에 실릴 그녀의 특집 기사 발행을 홍보하기 위한 이중의 목적을 지닌 포스터 제작을 의뢰받았다.
작품이 큰 성공을 거두자 이에 고무된 무하의 출판업자 F. 샹프누아는 이 디자인을 재활용해 문구가 없는 수집가용 포스터와 엽서 버전으로도 제작•발행했다.
연극《먼 나라의 공주》 조명 기구:
아돌프 아르망 트루피에(20세기 초-1937년 활동) 작 무하의 디자인에서 영감 받은 작품
금빛 파티나 청동, 공작석-자수정-청금석 카보숑, 착색된 배나무 곡면 패널에 장착, 51 ×36 ×13cm
"일제, 트리폴리의 공주 로베르 드 플레르(1872-1927) 저, 무하 삽화, 1897
컬러 석판화 삽화가 포함된 도서 Ilustrated book, color lithographs H. 피아자 출판사, 파리(미술판)
30.1 ×24.2cm
사라 베르나르: 전신 습작, c.1896, 종이에 펜, 잉크, 41.5 ×26cm
《햄릿》 무대 의상 디자인, 1899, 종이에 연필, 20 ×15cm
햄릿, 1899, 컬러 석판화, 207.5 ×76.5cm
1899년 5월 20일, 새로 개관한 사라 베르나르 극장에서 셰익스피어의 대표작 《햄릿》이 프랑스어로 각색되어 초연되었으며, 베르나르는 햄릿 역을 맡았다. 무하는 켈트 문양으로 장식된 아치를 배경으로 홀로 선 햄릿의 고독과 내적 갈등을 섬세하게 포착했다. 포스터 상단의 반달형 루넷에는 살해당한 아버지의 유령이 등장해 부자간의 심리적 관계를 상징하고, 하단에는 익사한 오필리아의 형상이 좁은 패널 안에 담겨 햄릿의 발아래 배치되어 있다. 이 작품은 무하가 사라 베르나르를 위해 제작한 마지막 포스터이기도 하다.
사라 베르나르를 위한 연회 메뉴 교정쇄 (1896년 12월 9일), 1896, 단색 석판화, 29 ×20cm
사라 베르나르의 두상화:〈로렌자초〉를 위한 습작, 1896, 종이에 연필, 25 ×21.5cm
사라 베르나르: 르페브르-위틸 과자 포스터 (1904년 달력용 포스터), 1903, 컬러 석판화, 72 ×5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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