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을 떠나 플로리다로 온 지 두 달이 되어간다. 아직 한식이 너무너무 그리울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중국음식을 먹을 수 없다는 것은 아쉬웠다. 엄청난 맛집이 아니어도 좋으니, 중국집이 있었으면 했다. 물론 어디에서나 평균 이상의 맛을 보여주는 홍콩반점 같은 보장된 집이 있으면 더 좋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작은 도시에는 한식당도 없다. 때문에 짜장면과 탕수육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학교에서 우연히 다른 한국분들과 얘기를 하다가 술얘기를 했다. 내게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느냐고 물으셨다. 얼굴이 금방 빨개지는 편인 나는 술과는 별로 친하지 않다. 그냥 회식에 갔으니까, 아니면 친구들을 만났으니까 함께 술을 마시는 편을 선택했었다. 그런데, 얘기를 하다 보니 내가 좋아하던 술이 생각났다. 술인지 아니면 술자리인지는 모르지만, 집 근처 연희동에 있는 중국집에서 아내와 함께 중국음식을 먹을 때 마셨던 칭따오가 떠올랐다. 그런데, 칭따오 얘기를 하다 보니 중국음식 생각이 더 간절해졌다.
집에 와서 미국에 있는 홍콩반점을 검색해 봤다. 당연히(?), 플로리다에는 없었다. 미국에는 생각보다 많이 있었는데, 대부분 한인 인구가 많은 캘리포니아 쪽에 있는 것 같았다. 얼마 전에 내가 사는 도시에서 차를 4시간 정도 타고 애틀랜타에 가면 중국집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미국에서 차로 4시간은 별거 아니라고들 얘기하는데, 아직 2달밖에 안된 나에게는 짜장면 먹으러 부산에 가는 느낌이라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홍콩반점은 더 멀리 있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에게 구세주가 나타났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그가 내 소원을 이루어줄 친구인 줄도 몰랐다. 일요일 밤 11시에 페이스타임으로 고등학교 때 친구 S에게 연락이 왔다. 지금 댈러스에서 또 다른 친구 Y네 집에서 같이 술 한잔 마시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내일 아침 6시 비행기를 타고 댈러스로 오라는 것이었다. 사실 월요일에 수업이 없기는 했는데, 6시간 후에 비행기를 타는 것은 너무 무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친구 S는 친구 Y가 미국 항공사에 다니고 있어, 지인에게도 직원가로 비행기를 탈 수 있는 혜택을 제공해 줄 것이니까 지금 빨리 결정을 하고 티켓을 발권하자고 했다. 아마 S는 이미 조금 취한 것 같았다.
결국 나는 S의 말을 따라 티켓을 발권했다. 가격은 1/8 수준이었다. 내가 사는 지역의 공항은 너무 작아서, 하루에 비행편도 몇 개 없지만 가격도 많이 비싸서 다들 저렴한 항공료를 위해 3-4시간씩 차를 타고 이동하곤 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집에서 20분밖에 안 되는 공항에서 생각지도 못한 가격으로 비행기를 타고 친구들을 만나러 갈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특혜였다. 망설였지만 발권을 하니 설레기 시작했다. 설레는 마음을 진정하고, 월요일에 해야 할 리딩을 위해 밤을 꼬박 새웠다. 그리고 6시에 첫 비행기를 타고 댈러스로 갔다.
공항에 나를 데리러 나온 친구 Y는 뭐가 제일 먹고 싶냐고 물었다. S와 Y 모두 7-8년 정도 미국에서 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들이어서, 미국 사회에 적응 중인 내가 음식이 제일 그리웠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저 친구들을 만난다는 것 밖에 다른 계획은 없었는데, 나도 모르게 일단 중국 음식이 먹고 싶다고 했다. 둘은 어제 중국집에 갔다며 난색을 표하다가, 홍콩반점도 있다며 거기 어떠냐고 물었다. 홍콩반점? 완전 좋지!
결국 댈러스에 도착하자마자, 홍콩반점으로 갔다. 오전 11시도 안 된 시간이었다. 막상 가게 앞에 갔는데, 너무 캄캄해서 걱정이 되었다. 월요일이라서 영업을 하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왜냐하면 나는 내일 탤러해시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홍콩반점 댈러스점은 화요일 휴무였다.
짜장면, 짬뽕, 탕수육을 시켰다. 아쉽지만 칭따오는 없었다. 하지만,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음식이 나오자마자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해외 관광명소에서 찍듯이 누가 봐도 홍콩반점임을 알 수 있게 메뉴판과 상호명이 보이도록 친구들과도 사진을 찍었다. 맛은 기억이 안 난다. 친구들과 학교 앞 짜장면집에서 탕수육을 먹었던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지금은 철없는 아저씨가 되었지만 말이다. 밥을 먹고 나와서 가게 앞에서 백종원 형님 사진 옆에서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평소에 사진을 찍는 것을 좋아하는 편도 아닌데, 왜 그랬을까? 아마 많이 신이 났었던 모양이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꿈만 같은 일이다. 사실 친구 S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에도 꾸준히 만남을 이어오던 친구였다. 그런데, 친구 Y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 거의 처음 본 친구였다. 15년도 넘는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 그 시절의 추억으로 나에게 그런 배려를 해주다니 너무너무 고마웠다. 그리고, 그 친구 덕분에 생각지도 않았던 홍콩반점에 갈 수 있었던 것도 너무 좋았다. 아니 감사했다. 이게 정확한 표현인 것 같다. 생각지도 않았던 구세주가 나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어준 느낌이랄까?
내가 지내는 곳이 한국인이 드문 작은 도시여서 더 그런 것 같기도 한데, 미국에서 만난 한국 사람들은 하나같이 서로를 도와주려고 한다. 본인들이 힘든 시기를 먼저 겪었기에, 그때 도움을 받았던 기억을 잊지 않고 자신도 또 다른 사람들을 도우며 지내는 느낌이다. 또, 사람의 중요함도 느끼고 있다. 작은 인연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 인연이 얼마나 많은 일들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지를 새삼 느끼며 지내는 요즘이다. 나도 꼭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친구 S, Y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뜻하지 않은 행복을 주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