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6일. 프롤로그
좀 색다르게 유럽을 간다면 어떨까요? 배편으로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는 방법은 1달이 넘게 걸려서 진작에 포기했고, 자연스레 기차를 떠올렸습니다. 딱 그 정도 생각하고 기차표를 예매한 다음, 떠나기 일주일 전에 짐을 준비할 때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꽤 큰 똥을 쌌다는 걸.
이쯤 하면 눈치채셨겠지만, 이 글은 시베리아의 아름다움과 여유를 예찬하는 낭만적인 여행기는 아닙니다. 시베리아의 여름은 나무와 들꽃, 그리고 오두막집이 전부이니까요. 멋진 여행기를 쓰기 위해서 사실을 왜곡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건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밖에 모르는 한국인 남자와 영어가 생소한 사람들의 불편한 동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99번 열차(1번이 가장 새것이고, 99번까지 운행합니다) 12번 객실의 8번 방에서 지낸 6박 7일은 길고, 비좁고, 불편한 시간이었습니다. 지루함을 달래려 구입한 러시아 잡지에선 비키니 광고를 발견하는 불운을 겪기도 하고(아아, 만나지 못하는 그녀는 참 아름다웠습니다..), 좁은 복도를 지나가기 위해 파블로 아저씨와 툭 튀어나온 배를 맞대다가 웃음을 터뜨리고, 새벽 5시에 Kostroma에 내린 니꼴라이 아저씨를 배웅하다가 격한 포옹에 갈비뼈가 나갈 뻔했으니까요.
기차를 선택한 건 불운이었습니다. 평소라면 비행기를 타고, 손바닥 만 한 창문으로 굽어보며 지나갔을 무수히 많은 러시아의 오두막집 가운데 하나를 골라 들어온 셈이었으니까요. 매일 아침 마이스키 홍차를 두 잔씩 마시고, 비에라 할머니와 짜디 짠 소시지 샌드위치를 나눠먹었습니다. 할머니의 손녀인 발리나와 친하게 지내기 위해 초코파이를 사 두고 출출할 때마다 무심한 듯 슬쩍 건네주고는 했습니다. 기차가 정차할 때마다 이번 역에선 뭘 먹을까, 지난번에는 러시안 만두랑 산딸기를 먹었는데, 하면서 그저 먹을 생각뿐이었지요.
비행기는 현실에 없는 공간, 가도 가도 고요한 하늘을 달립니다. 9시간의 꿈속을 지나면 전혀 다른 세계를 보여주지요. 기차는 179시간짜리 현실을 달리는 운송 수단입니다. 영어를 단어라도 아는 사람은 손에 꼽고, 러시아 여자들이 머리를 땋는 이유가 머리를 오랫동안 못 감아서라는 것도 직접 확인할 수 있지요. 베개에 묻어 있는 머릿기름을 보면 왜 세계 2위의 산유국 인지도 곧 알게 되실 겁니다. 안타깝게도, 여기는 TV에서 보았던 예술의 도시 상트 페테르부르크도, 시끌벅적한 모스크바도 아닙니다. 크렘린과 바실리 대성당이 화려하게 뽐내는 곳에서는 사람들의 마음의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까요. 고요한 시베리아 평원을 달리는 열차에는 평범한 러시아 사람들이 내는 마음의 소리로 북적거립니다. 덥수룩한 한국인을 향한 호기심과 눈웃음이 내는 소리, 때로는 제 마음의 소리도 있었습니다.
대개 여름이면 유럽으로 자유 여행을 다녀온 이웃들이 자랑스레 사진을 공유합니다. TV에 나왔던 곳, 내가 다녀온 곳 혹은 언젠가 다녀올 곳이겠지요.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줄을 서고, 구글에 검색하면 비슷한 위치에서 찍은 사진이 수십 장에 이르는 곳일 겁니다. 그럴 때면, 우리가 자유롭게 사진을 찍는 것인지, 아니면 틀에 박힌 관광 명소들이 자유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불러들이는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자유 여행 속 진짜 자유는 무엇일까요.
여행 속 진짜 자유는 어쩌면 인연(因緣)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순간 다가가지 않으면 사라지지만, 다가가면 그 도시 전체가 그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은 오늘날 천편일률적으로 밍숭맹숭해진 여행에 풍미를 더합니다. 네어 예브네겐(No Fish Day) 카페가 있는 블라디보스토크, Gina 할머니를 만났던 비로비잔, 메트뵈 신부님이 정교회 성당을 짓는다던 톰스크, 이끄롬 삼촌을 만난 노보시비르스크, 니꼴라이 아저씨를 떠나보낸 코스트롬, 일리야와 승무원 몰래 보드카를 마시며 지나온 키로프를 좋아합니다.
저는 이 긴 여정이 잘한 선택일지, 가끔 고민을 했습니다. 비행기 표값보다도 웃돈을 얹어 주고 불편한 기차에 몸을 실었고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시베리아를 건넜으니까요. 끝나고 보니, 좋았습니다. 지나고 보니 행복이었던 것 같습니다. 열차가 지나온 도시들, 그곳에 남겨진 사람들을 추억합니다. 이제는 모스크바 야로슬라블 역에 내려, 우즈벡에서 온 이끄롬 삼촌과 서너 번을 더 포옹한 뒤에 행운을 빌어 주었습니다. 제게 남은 것은 보여주기 애매한 평원과 평범한 러시아 아저씨, 할머니들 사진이 전부이지만, 그래도 괜찮으시다면 양껏 나눠드리고 싶습니다. 낭만적이지 않은 진짜 여행 일상, 한번 들어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