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으로 모든 것이 가능한 시대에 미술관, 과학관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
예술을 창조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건 누구일까?
대개 '예술가', 혹은 '작가'를 제일 먼저 떠올릴 것 같다. 정의(definition)를 중요시하는 공대생의 특기를 살려 예술이라는 개념을 '특정 양식을 가진 물건들의 집합'으로 정의하고, 그걸 제작하는 사람들을 '예술가'라고 부른다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예술이 단순히 비슷한 스타일을 가진 물건들의 집합으로 정의하는 것이 가능할까? 네덜란드로 향하는 길에 만난 유럽의 입구, 모스크바의 미술관들은 이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시내에 위치한 푸쉬킨(Pushkin) 미술관은 구관과 신관으로 나뉘며, 구관에서는 이집트/메소포타미아/에게 문명의 건축물들과 유물에서부터 4~5세기 로마 문명, 한자동맹 시기의 근대 독일 건축물에 이르기까지 유럽 전역의 건축물들을 교육 목적으로 복제하여 전시해 두었다. 이게 무슨 부대찌개도 아니고, 유럽 이곳저곳의 문명을 모아놓은 미술관이 도대체 어디 있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정말로 이 미술관은 유럽 문명의 박물관 같기도, 혹은 부대찌개 같기도 한 곳이다. 진품이 아닌 모조품으로 가득 채워 놓았기에 더더욱 그런 인상을 풍긴다.
푸쉬킨 미술관에서는 러시아가 얼마나 유럽에 속하고 싶어 하는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그리스에서 출토된 것이라면 밥그릇-물그릇조차 가져다 놓았고, 한 켠에는 러시아를 침략하고 모스크바를 유린했던 나폴레옹 황제의 초상화가 당당하게 자리하고 있을 지경이다(한국으로 생각하자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초상화를 국립현대미술관에 걸어 놓은 셈이다). 러시아 국립 미술관이 러시아 문명이 아닌, 유럽 주류 문명으로 가득 차 있다는 건 꽤나 아이러니한 일이다.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1층 홀이 중국 황허 문명 유적들로 가득 차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런 유물들은 얼핏 보면 미술관에 전시될 만한 예술작품이라기보다는, 그럴듯하게 전시되어 있는 골동품에 더 가깝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수저, 컵, 그릇들은 매우 조잡하게 만들어 놓은 것 같아 보여서, 장인이 만든 것 같지도 않다. 당시 시대였다면 박물관에 감히 들어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 같은 녀석들이 미술관의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놓여 있다. 도대체 이런 골동품들이 왜 오늘날 푸쉬킨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걸까?
프랑스의 철학자 폴 사르트르는, 인간의 실존은 본질보다 앞서고, 사물은 실존보다 본질이 앞선다고 이야기했다. 실존은 '존재하는 것', 본질은 '존재 이유, 목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예컨대 인간은 그 행동이 순간순간 변화하므로 어떤 행위를 할지, 그 존재 이유를 아무도 알 수도 없고 규정할 수도 없다. 따라서 인간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에게 문명의 밥그릇들은 미리 정한 설계도에 따라 기술자의 의도대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존재 목적(본질)이 존재 자체(실존) 보다 앞선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 골동품들이 여기 있는 까닭은 존재 이유(본질)가 변경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유물을 사용하던 고대인들이 모두 사라진 지금, 현대인들은 골동품을 통해 그들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 통찰을 얻고 싶어 한다. 그리고 이 골동품들은 과거 인류의 삶의 양식을 통해 중요시했던 가치들을 보여줌으로써, 현대인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한다.
바로 여기, '끊임없는 본질의 재발견'에 '누가 예술을 만드는가?'에 대한 답이 있지 않을까? 실존은 유일하지만, 본질은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누군가는 골동품 시계를 보면서 '역사적 사료'를 생각할 수도, '아버지의 유품'을 떠올릴 수도, '아름다움'을 떠올릴 수도 있다. 다양한 본질이 투영될수록 그 사물은 사회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만들어지는 과정 자체는 제작자의 손안에 있지만, 일단 그의 손을 떠나면 오롯이 사회 구성원들을 통해 '예술'로서 진정한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화'는 어떨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문화'를 만들고 퍼뜨리기 위해 몰두한다. 기부가 활발하게 이뤄지는 문화, 교통 규범을 준수하는 문화, 성 평등 문화가 대표적이다. 과학자들도 비슷한 고민을 품고 있다. 과학이 복잡해질수록, 사회 각계각층의 생존 경쟁이 치열해져 과학을 외면할수록 과학과 시민 사회의 간극은 점점 벌어지고 있다. '과학을 즐기지 못하고, 공부하는 문화'에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 과학을 어려워하는 문화에서 취미로, 전문가들의 머리를 넘어 아이들의 입으로 전달되는 문화를 만들고 싶어 한다.
미술관, 과학관이 사라지지 않을 이유
인터넷이 발달하게 되면서, 이제는 인터넷에서도 어렵지 않게 미술품이나 과학 상식들을 찾아보고, 그와 관련된 자세한 설명들을 훨씬 친절하게 곁들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적어도 21세기에, 미술/과학과 같은 문화를 퍼뜨리기 위해서는 미술관/과학관을 건립하는 것보다 인터넷 홍보를 활발하게 하는 게 문화를 퍼뜨리는 데 더 도움이 될 것 같다. 미술관/과학관의 존재 이유가 '앎의 즐거움'이나 '호기심의 충족'을 제공하기 위함이라면, 우리에게는 그다지 많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미술관이나 과학관은 모스크바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을 만큼 굉장히 다양하고,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도대체 미술관, 과학관은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일까? 네덜란드로의 여정에 잠시 머물렀던 트레티야코프 국립 미술관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품고 있었다.
러시아에서 가장 큰 미술관을 꼽는다면, 단연코 '트레티야코프 국립 갤러리'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1856년 개관하여 1918년 국유화되었고, 11세기부터 20세기 이후의 현대미술까지 13만 점 이상의 러시아 예술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트레티야코프 갤러리의 창립자인 파벨 트레티야코프는 부유한 상인, 다시 말해 '자본가'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러시아 미술의 부흥을 위해 러시아 화가들의 그림을 꾸준히 사들였고, 그의 미술관에 러시아 화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기증하면서 오늘날 트레티야코프 갤러리는 러시아 미술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거대한 보물창고가 되었다.
13만 점이라는 숫자에 걸맞게, 트레티야코프 갤러리는 벽마다 크고 작은 작품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구관과 신관을 합쳐 130개가 넘는 방마다 걸려 있는 그림들을 하나하나 살펴가다 보면, 화가들의 눈으로 바라보았던 러시아 역사, 문화, 가치관이 모두 담겨 있어 보는 재미가 있다.
하지만 누군가 '러시아 미술에는 어떤 특징이 있느냐?'라고 묻는다면, 그 답을 마련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러시아는 항상 유럽의 예술 사조를 수용하고, 따라가는 변방에 위치하고 있었던 탓이다.
그런 까닭에, 러시아 미술도 유럽 미술 사조와 비슷하지만, 조금은 뒤늦은 방식으로 전개된다. 소수에게서 다수로(부유층에서 서민으로), 감추고 꾸미는 예술에서 표현하고 드러내는 예술로 나아가는 흐름은 러시아 미술도 별반 다르지 않다. '러시아 미술이랄 게 있는가? 그저 유럽 미술의 곁가지 아닌가?'와 같은 말로 러시아 미술을 평가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러시아 미술은 유럽 미술과 유사하면서도, 분명히 구분되는 미술사적 흐름을 갖고 있다. 아름다운 자연, 전근대적인 농노의 삶, 혁명과 같은 것들이 '러시아만의 색깔'을 예술 속에 담아내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러시아 화가들이 개성적이고, 독립적인 성질을 갖고 그들만의 예술 세게를 구축하는 데 특별히 힘썼기 때문일까?
문화는 '실존하는 물질들의 집합'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만약 그렇다면 LG의 공장에서 매일같이 찍어 내는 초 고화질 TV들도 '문화재'가 될 수 있었을 터다. 대신, 문화는 대상에 투영되는 사람들의 '본질(목적)'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대상과 인간의 상호 작용 속에서만 형성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일리야 레핀이나 바실리 칸딘스키, 말레비치와 같은 화가의 작품들이 스스로 연결되어 '러시아 문화', '러시아 화풍'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트레티야코프를 포함한 많은 관객들이 삶의 위로를, 사랑하는 사람을,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면서 작품들이 하나의 문화로서 중요한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미술관/과학관의 역할이 있는 것은 아닐까? 트레티야코프 갤러리는 러시아 미술을 한 자리에 집대성하고, 눈에 보이는 '실체'로 실현해 낸 미술관이다. 실체가 없던, 혹은 유럽 문화라는 거대한 나무에서 곁가지로 흩어져 있던 러시아 문화에서, 독자적인 역사를 발견하고 보존해 놓은 곳이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러시아의 문화를 눈으로 확인하고, 그 발자취를 좇아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며, 그 끝에서 오늘날 러시아를 이루는 정체성을 느끼게 된다.
한국에도 전국에 500여 개의 미술관이 있다. 가령 서울시 종로구 가회동에 자리한 '북촌 미술관'에는 경상도, 전라도, 경기도, 제주도 등 여러 지방에 따라 다양한 특색을 갖는 장롱과 같은 가구들을 전시해 놓고 있다. 미술관의 입구에는 이런 소개문이 쓰여 있다.
"북촌 박물관은 우리의 문화유산을 통해 과거와 소통하고, 바람직한 미래를 열어 가는데 이바지하고자 시작되었습니다. 북촌 박물관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우리 생활 속에 이어져 온, 유-무형의 문화유산을 통해 옛 것이 지닌 미의식의 가치를 오늘의 생활에 연결시키고자 합니다."
북촌 미술관은 연구자들에게는 문화 연구 자료를 제공하고, 북촌의 미려한 한옥들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그 안에 숨어 있는 담백한 문화유산들을 소개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한옥과 전통 가구에 담긴 삶의 양식, 그것이 의미하는 '한국의 정체성'이 많은 이들에게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전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단단히 뿌리내린 나무가 있기에 무수히 많은 나뭇잎들이 한없이 푸르를 수 있고, 푸른 나뭇잎들이 나무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준다. 그리고 나무들이 모여 '민족' '정체성'이라는 고유한 문화의 숲을 이룬다. 문화를 창조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시민들이기에, 문화와 사회를 잇는 미술관, 과학관은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