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떠난 잎은 썩어 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인터넷이 발달하게 되면서, 이제는 인터넷에서도 어렵지 않게 멋진 그림들을 찾아보고, 그와 관련된 자세한 설명들을 훨씬 친절하게 곁들일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만약 미술관, 박물관의 존재 이유가 '앎의 즐거움'이나 '호기심'을 제공하기 위함이라면, 우리에게는 그다지 많은 박물관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반인의 눈으로 보았을 때, 각각의 그림들에서 예술적 가치를 제대로 느끼기란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
하지만 오늘날에도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모스크바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을 만큼 굉장히 다양하고,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미술관, 박물관이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일까요? 네덜란드로의 여정에 잠시 머물렀던 트레티야코프 국립갤러리는 그 질문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러시아에서 가장 큰 미술관을 꼽는다면, 단연코 '트레티야코프 국립갤러리'를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1856년 개관하여 1918년 국유화되었고, 11세기부터 20세기 이후의 현대미술까지 13만점 이상의 러시아 예술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트레티야코프 갤러리의 창립자인 파벨 트레티야코프는 상인, 다시말해 '자본가'였다는 점입니다. 그는 러시아 미술의 부흥을 위해 러시아 화가들의 그림을 꾸준히 사들였고, 그의 미술관에 러시아 화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기증하면서 오늘날 트레티야코프 갤러리는 러시아 미술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거대한 '보고(寶庫)'가 되었습니다.
13만점이라는 숫자에 걸맞게, 트레티야코프 갤러리는 벽마다 크고 작은 그림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습니다. 구관과 신관을 합쳐 130개가 넘는 방마다 걸려 있는 그림들을 하나 하나 살펴가다 보면, 화가들의 눈으로 바라보았던 러시아 역사, 문화, 가치관이 모두 담겨 있어 보는 재미가 있지요. 하지만 누군가 '러시아 미술에는 어떤 특징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 답을 마련하기란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러시아는 항상 유럽의 예술 사조를 수용하고, 따라가는 변방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러시아 미술도 유럽 미술사조와 비슷하지만, 조금은 뒤늦은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소수에게서 다수로(부유층에서 서민으로), 감추고 꾸미는 예술에서 표현하고 드러내는 예술로 나아가는 방식은 러시아 미술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러시아 미술이랄 게 있는가? 그저 유럽 미술의 곁가지 아닌가?'쯤으로 러시아 미술을 평가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러시아 미술은 유럽 미술과 유사하면서도 분명히 구분되는 미술사적 흐름을 갖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자연, 전근대적인 농노의 삶, 혁명과 같은 것들이 '러시아만의 색깔'을 예술 속에 담아내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러시아 화가들이 개성적이고, 독립적인 성질을 갖고 그들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하는데 특별히 힘썼기 때문일까요?
예술, 그리고 문화는 '실존하는 물질들의 집합'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LG의 공장에서 매일같이 찍어 내는 초 고화질 TV들도 '문화재'가 될 수 있겠지요. 대신, 예술과 문화는 물질에 투영되는 '본질(목적)'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술이라는 '본질'은 인간(관객)이 물질에 투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물질과 인간의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됩니다. 다시말해, 일리야 레핀, 바실리 칸딘스키, 말레비치와 같은 화가의 작품들이 스스로 연결되어 '러시아 미술사', '러시아 화풍'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많은 관객들이 삶의 위로를, 사랑하는 사람을,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면서 작품들이 하나의 예술로서 중요한 의미를 획득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트레티야코프 국립 갤러리'의 역할이 있습니다. 트레티야코프 갤러리는 러시아 미술을 한 자리에 집대성하고, 눈에 보이는 '실체'로 실현해 낸 미술관입니다. 실체가 없던, 혹은 유럽 문화라는 거대한 나무에서 곁가지의 나뭇잎 쯤으로 흩어져 있던 러시아 화가들의 작품과 화풍에서 러시아만의 독자적인 역사를 발견하고 보존해 놓은 곳입니다. 그리고 '트레티야코프'라는 관객의 목적으로부터 비롯된 지원이 있었기에, 러시아 화가들은 그림을 판매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는 힘을 얻기도 했습니다.
한국에도 전국에 500여 개의 박물관이 있습니다. 가령 서울시 종로구 가회동에 자리한 '북촌박물관'에는 경상도, 전라도, 경기도, 제주도 등 여러 지방의 주요도시에 따라 다양한 특색을 갖는 장농과 같은 수납가구들을 전시해 놓고 있습니다. 박물관의 입구에는 이런 소개문이 쓰여 있습니다.
북촌박물관은 우리의 문화유산을 통해 과거와 소통하고, 바람직한 미래를 열어 가는데 이바지하고자 시작되었습니다. 북촌박물관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우리 생활 속에 이어져 온, 유-무형의 문화유산을 통해 옛 것이 지닌 미의식의 가치를 오늘의 생활에 연결시키고자 합니다.
북촌 미술관은 미술사학 연구자들에게는 예술사적 연구 자료를 제공하고, 북촌의 미려한 한옥들을 찾는 사람들에게 그 안에 숨어 있는 담백한 문화유산들을 소개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한옥마을과 전통가구들, 그로부터 보여지는 고유한 삶의 양식을 많은 이들에게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가질 수 있도록 전시하고 있습니다.
단단히 뿌리내린 나무가 있기에 무수히 많은 나뭇잎들이 한없이 푸르를 수 있고, 푸른 나뭇잎들이 나무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나무들이 모여 '민족성'이라는 고유한 문화의 숲을 이룹니다. 미술관과 박물관이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