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자의 과학서평 / 랩 걸
강한솔 기자 / 저작권 : 2019.05.08 한국과학창의재단 Sciencetimes
저자인 호프 자런은 식물을 연구하는 과학자다.
그녀는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자손들을 황폐한 폐허에 남겨 두고 떠날 것이라는 두려움, 심지어 녹색이 주는 소박한 위안마저도 박탈당한 채 살아가야 할 것에 대한 두려움’을 이야기한다.
그녀는 집 앞의 가문비나무를 바라보며, “모든 우거진 나무의 시작은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은 씨앗에 있다”라고 말한다.
저자는 자신의 삶을 다룬 ‘랩 걸’에서 식물과 자연에 대해, 과학자로 또 여성으로 살아오며 겪었던 삶의 질곡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박사 학위를 받고 불확실성으로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나라 반대편으로 이주하던 자신을 떠올리며 ”페리시 쇠뜨기들은 살아 숨 쉬는 생물답게 땅을 건너 뿌리를 내린 다음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라는 말로 다독인다.
저자는 과학의 쓸모에 대해 강변하거나, 나무를 베고 환경을 파괴하는 사람들을 맹렬하게 비난하지도 않는다. 실험 과학자들의 설자리가 점점 줄어드는 현실을 바꾸거나 성차별을 파괴하자고 설득하지도 않는다.
그 대신, ‘식물’을 연구함으로써 삶이 얼마나 풍요로워졌는지, 도로 옆에 자라는 잡풀이 빛을 보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첫 잎사귀를 내어 놓는지 이야기한다.
끊임없이 파산 위기에 시달리는 자신의 연구실 재정과 유능한 동료에게 반년 넘게 월급을 줄 수 없었던 과거를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저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 중 우리를 지원해줄 의향이 있다면 내게 전화 한 통 해주시기를. 미안하지만 이 문장을 안 넣을 수가 없었다”고 토로한다.
그래서 ‘랩 걸’은 씨앗과 나무, 호프 자런에 관한 기록이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랩 걸’은 호프 자런의 이야기지만, 과학과 얽힌 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수많은 ‘랩 보이’들, 과학 하는 즐거움 속에 살아가는 ‘랩 피플’에 대한 오마주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에서 단순히 워킹 우먼이 맞닥뜨린 유리 천장이나 기울어진 운동장을 읽어 내는 것은 책의 가치를 평가 절하하는 일이다. 그것은 또한 호프 자런에 대한 평가절하이기도 하다.
이 책은 페미니즘이니, 성차별이니 하는 이슈보다 다양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사람들이 ‘올리버 색스 이후 또 한 명의 이야기꾼을 만났다’ 고 말하는 것은 바로 거기에 있다.
어떤 이는 말에도 세월이 깃든다고 했다. 시간은 사건의 축적이라 했으니, 사람의 말도 ‘사건의 축적’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저자는 ’과학과 식물에의 순수한 애정’이라는 아주 단순한 말을 자신의 삶을 통해 증명하고 있다. 모든 생명은 경이롭다는 당연한 명제를 평생에 걸쳐 새로이 깨닫고, 보여준다.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일대기에 과학을 끼얹었음에도 독자를 책 앞에 붙들어 앉힐 수 있는 것은 그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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