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번째 쓰기
최근 ‘유쾌한 경표씨’라는 배우 고경표의 유튜브 채널이 내 피드에 떴다.
그날 본 콘텐츠의 제목은 ‘걷기왕 고경표’였는데, 내용은 평소 고경표가 걷는 11km 정도의 루트를
카메라가 함께 따라가는 것이었다.
나는 800km에 달하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한 경험이 있고, 평소 역사적 장소나 명소 등을 두루
방문하는 걸 좋아해서 여행을 가면 아침부터 밤늦은 시각까지 대중교통과
두 발을 이용해 이곳저곳을 샅샅이 누비곤 한다. 그래서인지 고경표의 걷기 왕 콘텐츠는 ‘오! 나도!’하는 도전의식을 자극했고, 마침 걷기를 좋아하고 나보다 더 체력이 좋은 사촌언니가 있어 10km 걷는 데이트(?)를 청했다. 그렇게 오늘, 서울 도심 속 10km 걷기를 실천했다.
어제의 폭우가 무색하게 맑게 개인 오늘 아침. 우리는 아침 당산역에서 만났다.
사실 우리의 계획은 단 두 가지뿐이었다.
10km를 걷는다.
당산에서 시작한다.
원래 내가 세운 계획은 당산역 - 양화대교 건너기 - 망원 한강공원 - 망원과 연희동 일대를 산책하며 10km를 걷고 그 사이사이 밥을 먹거나 카페에 들러 쉬는 것이었다. 하지만 둘 다 파워 P인 까닭에, 그리고 사촌 언니는 ‘어딜 가도 걷는 게 좋아!’라고 말하는 스타일이라, 내가 발걸음을 원래의 계획인 ‘좌’가 아니라 ‘우’로 틀어버리면서, 10km를 걷는다 외에는 모든 것이 바뀐 ‘우연의 여행’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P들은 알지 않는가?(동의해 주면 좋겠다…ㅎㅎ) 의도치 않게 들어간 밥집이 맛집이면, 계획해서 줄 서서 먹는 맛집의 요리보다
훨씬 맛있고 보람은 곱절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오늘 10km의 여정도 딱 그랬다.
당산에서 출발한 우리는 여의도 한강공원을 지나 원효대교를 건넜고, 이촌 한강공원으로 향했다가 이촌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8.7km) 그리고 지인이 추천해 준 ‘커피가 맛있는 집’을 찾아 남영동까지 이동(3.5km)했다. 했다. 그렇게 우리는 계획한 10km를 훌쩍 넘어 총 12.2km에 달하는 거리를 걸었다.
이번 걷기를 통해 '서울 도심 걷기'의 몇 가지 장점을 알게 되었다.
건강 체크 : 사실 회사 일이 바쁘고, 개인적인 고민도 겹쳐 지난주는 내내 컨디션이 안 좋았는데, 12km를 무리 없이 걸으니 ‘오! 아직 괜찮은데?’하는 내 체력에 대한 자신감을 되찾았다. 12km를 걸어도 끄떡없었으니 체력을 핑계로 여행을 미루거나, 하고 싶은 걸 미루지는 않게 될 것 같다. 내가 ‘내 건강함에 대해’ 스스로를 속일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의외의 장소 발견 : 마음 가는 대로 천천히 걸었더니, 의외의 아름다운 스폿을 만날 수 있었다. 나는 보통 당산역에서 여의나루역까지의 말 그대로 ‘강의 남쪽’에 있는 한강 공원을 주로 산책하는데 이번에는 강북의 한강공원을 경험할 수 있었다.
처음 원효대교를 건넌 이후 다시 한강공원 초입에 들어섰을 때는, 풍경이 너무 삭막해서 깜짝 놀랐었다. 하지만 이촌 한강공원부근으로 가자 점점 더 ‘와!’하고 감탄할만한 풍경을 마주쳤다. 다른 한강 공원과는 달리 조금 더 ‘생태공원’의 느낌이 났고, 아름다운 조형물이 주변 경관과 잘 어우러져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다. 게다가 이촌 한강 공원 쪽에서 바라다 보이는 노들섬도 참 아름다웠다.
여의도 한강공원은 좀 더 사람들이 ‘나들이하는 곳’이라는 느낌이 강한데, 이촌 한강공원 부근은 보다 ‘생태’적 측면이 더 잘 보존된 공원처럼 느껴져 도시 외곽에 온 것 같은 기분도 느낄 수 있었다.
이촌에서 점심을 먹은 직후, 평소 같으면 식사한 곳 근처에서 커피를 마셨을 텐데 오늘은 ‘2km 더 걸어야지’하면서 일부러 먼 곳에 있는 카페를 선택했다. 사실 이 때는 이미 좀 지친 상태였지만 ‘커피가 맛있는 집’이라는 동기부여 요소를 더해 약 3km를 더 걸었다.
그렇게 용산에서 다시 남영동으로 걸어갔다. 오늘 찾아간 곳은 ‘드립쏘’라는 남영동의 카페였는데, 알고 보니 15년 경력의 로스터 브랜드였다. 사실 이 카페를 찾아 걸어가면서는 가는 길이 다 도심 한 복판이라, 너무 복잡하고 사람도 많아서 괜스레 ‘맛없기만 해 봐라!’하고 벼르는 마음도 들었지만, 다행히 애를 쓴 보람이 있게 커피맛도 좋고, 공간도 마음에 들었다. 나는 산미 있는 커피를 좋아하는데, 산미 있는 커피가 2종이나 있었고 하나는 전반적으로 라이트 한 맛, 또 하나는 좀 더 바디감이 풍부하고 달콤한 과일향이 더 가미된 맛이 느껴졌다. 둘 다 개성이 확실해서 마음에 들었는데, 너무 맛있어서 금방 마셨더니 사장님이 서비스 커피라며 헤이즐넛 커피를 리필해 주셨다! (오, 커피 무료 리필 서비스라니요..ㅠ, 감동!)
카페에서 나올 무렵에는 비가 올 듯한 기운이 감돌았다. 때문에 우리의 걷기 여행은 자연스럽게 남영동 지하철 역으로 향하는 걸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언니와 나 둘 다 이 방식의 여행(?)이 너무 매력적이라 다음에도 또 10km 걷기를 시도해 보기로 했다.
[이 걷기에서 얻은 것들!]
서울을 새롭게 만날 수 있다는 것
의외의 장소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걸어야만 보이는 것들!)
더 건강해지고, 다이어트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
예전 나는 ‘서울에 살지만 서울을 경험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외국 여행객들은 일부러 놀러 오기도 하는데 나는 이 도시에 살면서도 너무 익숙한 나머지 집-회사만 반복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좀 더 나가봤자 쇼핑이나 약속을 위해 정해진 ‘목적지’까지 대중교통이나 차로
이동하는 순간이 늘어났었다. 하지만 내 두 발로 길을 쭉 펼쳐놓고 점점이 서울을 만나보니, 이 도시가 전혀 새로운 여행지처럼 느껴졌다. 어떤 동네는 일본의 어느 한 마을 같고, 또 어떤 곳은 뉴욕의 거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 다양함과 의외성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이 글을 쓰며 품는 작은 바람이 있다. 내가 고경표의 콘텐츠를 보며 이 10km 걷기를 시작했듯,
내 글을 본 누군가고 ‘오 해볼 만하겠는데?’하고 시도해봤으면 한다. 누군가에게 추천할 만큼 정말 가치 있는 여행 방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