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을 멈춰서는 안 돼는 이유

# 15 Estella

by 박고래

밤이 되면 낮 동안 혹사당한 발이 저릿하고 뜨겁게 달아올랐다. 덕분에 거의 모든 밤에 나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에스테야(Estella)에서 머물렀던 날도 늦게까지 뒤척이던 나는 마냥 누워 잠을 기다리는 대신 공용 공간으로 내려가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곳에서 네덜란드 아저씨 단을 만났다.


순례자들의 단골 질문인 ‘왜 까미노로 왔냐?’는 물음을 시작으로 네덜란드와 한국의 번아웃 문제 같은 사회적 이슈, 그리고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다양한 주제의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70대의 나이에 혼자 산티아고로 왔다는 아저씨는 한해 전 사랑하는 아내와 사별했다고 하셨다. 이후 자식들이 준비한 비행기 티켓으로 까미노로 오신 것이었다. 이 길을 걷는 일이 평생의 소원이었던 아저씨를 위해 자식들이 준비한 선물이었다.


나는 70대의 나이에 무거운 배낭을 메고 800km의 도보여행을 나선 이 멋진 할아버지께 오래 마음에 품었던 질문을 던졌다.


“어릴 때 저는 한 사람의 삶에는 고민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젊은 시절에 치열하게 고민해서 삶에 대한 답을 찾으면 늙어서는 큰 고민없이 즐겁게 살아갈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새로운 문제가 찾아오고 고민도 계속 돼요. 아무리 열심히 고민해도, 또 시간이 지나면 고민과 풀어야 할 문제가 계속 찾아오는 거죠.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계속 치열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나, 열심히 살 필요가 있나? 하는 회의감이 들어요.”


내 말을 가만히 듣던 단이 대답했다.


“죽기 전까지 삶에는 끊임없이 고민거리와 문제들이 찾아와. 7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내게도 늘 문제들이 시시각각 찾아 왔어. 그것이 멈추는 순간은 우리가 죽는 순간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민을 멈춰서는 안 돼. 너는 네게 앞으로 일어날 문제들을 미리 알지 못할 것이고, 그걸 미리 대비할 수도 없어. 그래도 네게 닥친 문제들을 회피하지 말고, 마주한 문제를 어떻게 풀 수 있을지 고민해. 그럼 문제는 늘 찾아오겠지만, 그 문제를 해결하는 힘을 얻을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또 이렇게 덧붙이셨다. 세상에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말이다. 자신에게 찾아온 문제에 대한 풀이법을 고민하고 스스로 답을 찾는 사람들은 같은 문제를 다시 만났을 때 그 문제가 보다 가볍게 느껴지겠지만, 자신을 찾아온 문제를 회피하기만 한 사람들은 다음에 같은 문제가 찾아오면 똑같은 어려움을 느낄 거라고 하셨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 그런 문제들이 켜켜이 쌓이면 삶이 더욱 고통스럽고 무겁게 느껴지지 않겠냐고 반문하셨다.


“Jin, 너는 젊기에 많은 것을 바꿀 수 있어. 네가 원하는 변화를 만들 힘이 너에게 있단다. 나는 70대가 되어서야 산티아고에 왔지. 하지만 너는 젊은 나이에 산티아고에 와서 홀로 길을 걷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스스로를 위한 시간을 갖고 있잖니. 이 시간이 네 인생에 큰 도움이 될 거야. 물론 네가 여행을 떠난 시간 동안은 돈을 벌지는 못하지. 하지만 돈이 최고의 가치는 아니니 항상 돈으로 사지 못하는 많은 것들을 생각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어.”


단과의 대화는 까미노를 끝내고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내 마음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와 대화하던 새벽의 고요한 시간이 비현실적인 느낌으로, 꿈을 꾼 듯 기억 속에 남아있다. 삶을 살아가는 태도에 대한 이 열정적인 노년의 여행자가 들려준 지혜를 나는 죽기 전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그날 이후로 단과 길 위에서 한 두 번 마주쳤지만, 우리는 에스테야의 밤처럼 깊고 긴 대화를 나눌 기회를 더 이상 갖지 못했다. 긴 세월 속에서 얻은 소중한 지혜를 처음 본 젊은 여행자에게 나눠 준 단 아저씨. 이런 만남의 기억이 있기에 발이 퉁퉁 붓고, 잠 못 드는 밤이 계속된다 해도, 또 다시 산티아고로 돌아오게 될 것 같다는 는 생각이 들었다.


책, <배움의 시간을 걷는다>의 일부입니다. 출간 전 사전 펀딩 진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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