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함께 걷기로 한 이유

# 16 Estella ▶︎ Los Arcos

by 박고래

전날 새벽까지 단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취침 시각이 늦었던 탓에 다음 날 아침엔 다소 늦게 잠에서 깼다. 숙소에 함께 머물던 순례자들은 하나 둘 떠나고 있었지만, 어쩐지 서두르고 싶지 않아 나는 천천히 아침 식사를 즐기고 ‘오늘의 순례’를 시작하기로 했다.


해가 높게 뜬 화창한 날이었다. 모든 여행자들이 빠져나간 뒤라 나는 넓은 공용 식당을 독차지했다. 물을 끓여 아메리카노를 만들고, 전날 밤 마트에 들러 샀던 치즈, 하몽, 바게트로 간단한 보카디요를 만들어 식사를 했다. 음식을 먹는 동안 정원 시설을 점검하는 사람들이 알베르게의 주방을 지나 정원으로 갔다. 나는 나를 구경하듯 바라보는 그들에게 씽긋 웃으며 '부에나스 디아스!(Buenos días)'하고 먼저 인사를 건넸다. 인사를 하는 내 모습이 나 스스로에게도 낯설게 느껴졌는데, 걷기 시작한 뒤로 나는 좀 더 넉살좋은 사람이 되고 있는 것 같았다.


순례 7일차. 까미노에서의 일과에 익숙해진 나는 점차 하루를 보내는 나만의 리듬을 만들어 갔다. 매일 짐을 싸 다른 곳으로 떠나고, 오래 걷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는 일에도 적응해 갔다. 그리고 혼자 되는 일 또한 두려운 일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식사를 끝낸 뒤에는 배낭을 추스르고 순례길에 올랐다. 오래된 성당, 교회, 수도원 등의 건축물을 구경하며 걷다 보니 저 멀리 먼저 출발한 에드왈도 아저씨가 보였다. 아저씨는 발에 큰 물집이 잡혀 걷는 속도가 떨어졌기 때문에 금방 따라잡은 것이었다. 나는 아저씨를 그냥 지나치지 못해 조금 속도를 늦춰 함께 걷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굉장히 츤데레 스타일이었다. 내게 별 말을 하시지는 않았지만, 동행을 할 때면 늘 나를 살피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필요한 것을 척척 챙겨주시기도 하고, 내가 잘 걷고 있는지 곁눈질로 확인하셨다. 그런 아저씨의 배려를 알기에, 걷는 속도가 느린 그와 계속 보조를 맞춰 걸었다. 물론 아저씨가 이 동행을 좋아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아저씨와 나란히 한참을 걷다가 작은 마을에 들렀다. 그곳에서 카를로스를 만났다. 카를로스와는 리라소냐에서 함께 저녁을 만들어 먹고 헤어진 뒤 처음 재회한 것이라 매우 반가웠다. 우리 셋은 인사를 나눈 뒤 동네 바에 들러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맥주 세 병을 시키고 노천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 있으니, 바의 주인장이 3병의 맥주와 함께 약간의 올리브유와 치즈를 함께 내어주었다. 나는 그 난데없는 올리브유와 치즈의 정체가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카를로스가 주인장에게 부탁해서 점심 도시락을 만들 때 쓸 약간의 재료를 구매한 것이었다. 메뉴판에도 적혀있지 않은 식재료를 바에서 흥정을 통해 구매하고, 앉은 자리에서 나이프를 꺼내 샌드위치를 만드는 재주라니! 나는 자신감 넘치는 태도와 입담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상황을 풀어가는 카를로스에게 점점 흥미를 갖게 되었다.


식사가 끝난 뒤엔 자연스레 셋이 함께 걷게 되었다. 카를로스는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다소 걸음이 빠른 카를로스와 대화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에드왈도 아저씨가 저 멀리 뒤처져 있었다.


나는 졸업을 앞두고 있는, 자신의 인생에 확신을 가진 쾌활한 카를로스가 좋았지만 그렇다고 아저씨를 내버려두고 싶지는 않았다. 카를로스는 다소 빡빡한 일정으로 까미노 완주 계획을 세운 탓에 속도를 늦출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저씨의 위치를 확인한 나는 그와의 대화를 중단하고 걸음의 속도를 늦춰 에드왈도 아저씨와 다시 걷기로 마음먹었다.

그런 내게 카를로스는 “Jin, 왜 에도왈도를 기다리는 거야? 나랑 같이 걷자.”하고 말했으나 나는 며칠 동안 내게 좋은 동행이 되어 주었고, 심지어 발까지 절뚝이는 아저씨를 혼자 걷게 할 수 없었다. 그날 나는 알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만큼이나 '고마워하는 사람'에 높은 가치를 둔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카를로스를 먼저 보낸 뒤 나는 다시 아저씨와 걷기 시작했다. 광활하게 펼쳐진 와인 밭 사이에 놓인 길 위로 강한 바람에 맞서 걸어야 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 올 무렵, 길 위의 한적한 곳에 주저앉아 땡볕에서 일하는 포도밭의 인부들을 바라보며 점심을 먹었다. 아저씨는 자신의 음식은 뭐든 내게 반을 떼어 나눠 주셨다. 그리고 내가 먹지 않는 메뉴는 자신도 먹지 않으셨다. 스페인어와 영어로 소통하는 탓에 많은 대화를 하지는 못했지만, 아저씨가 나를 배려한는 마음이 행동 하나 하나로 전해졌다.


식사를 하던 중 아저씨가 내게 왜 카를로스와 먼저 가지 않았냐고 물으셨다. 활발한 성격의 카를로스가 좋았지만, 함께 걸으며 이미 친구가 된 아저씨와 걷기로 한 것은 내게 당연한 선택이었다. 나는 긴 설명 대신 그저 활짝 웃어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책, <배움의 시간을 걷는다>의 일부입니다. 출간 전 사전 펀딩 진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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