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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엄마 Oct 24. 2024

"너 3만 원도 없어?"

장난으로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

"너 3만 원도 없어? 차라리 이제는 일을 시작하는 게 어때?”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한 마디에 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어떻게 나에게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지? 온몸이 얼음처럼 얼어붙었다가 다시 발바닥부터 머리끝까지 피가 거꾸로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심장이 쿵. 쾅. 쿵. 쾅. 당장이라도 몸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화를 누르고 침착하게 전화를 끊었다.




그 말을 던진 그녀는 15년 전 나의 첫 직장동료였다. 같은 부서다 보니 퇴근 후 술 한 잔 기울이며 상사 험담을 시작으로 서로 가정사까지 공유할 만큼 가까워졌다. 결혼 후 각자 다른 지역으로 떠났지만, 종종 연락하며 인연의 끈을 이어갔다. 


어쩌다 보니 아이들의 나이까지 같아 비슷한 시기의 육아 고민을 나누다 보니 점점 더 가까워졌다. 얼굴은 자주 보진 못했지만, 통화하는 날은 기본이 1시간일 정도로. 멀리 있음에도 사이가 돈독했던 우리의 관계는 그녀가 일을 시작함으로써 틀어지기 시작했다.



경력단절된 지 10년이 넘고 나이 마흔이 넘으면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매우 제한적이다. 그러다 보니 그녀가 선택한 것은 바로 보험설계사였다. 처음 그녀가 그 일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 나는 누구보다 응원했다. 나는 늘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집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컸기 때문이다. 현실에 안주하는 나와 달리 용기를 내어 일을 시작한 그녀는 대단해 보였다.


그녀를 언니처럼 의지하고 많이 좋아했던 나는 새롭게 일을 시작한 그녀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녀가 일을 시작한 지 6개월쯤 되었을까? 자동차 운전자보험 하나만 가입해 줄 수 있냐고 연락이 왔다. 운전자보험이야 얼마 하지 않으니 흔쾌히 응했다.


그렇게 보험을 가입하고 한 달이 지났을 때 우연히 남편의 운전자보험 증권을 보게 되었다. 남편은 나보다 저렴한 금액으로 비슷한 보장을 받고 있었다. 그냥 넘어갈까 싶다가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고민 끝에 가입한 지 6개월이 지나자마자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 : 여보세요? 잘 지내지? 무슨 일이야?

나 : 아니 언니 다름이 아니라 할 말이 있어서. 혹시 통화할 수 있어?

그녀 : 응 이야기해.

나 : 언니한테 가입했던 운전자보험 있잖아. 그거 혹시 해지하려면 몇 달 지나야 해? 다름이 아니라

남편 운전자보험과 비교해 보니 좀 비싼 것 같아서.

그녀 : (5초간의 정적)..... 야! 그거 지금 해지 못해! 

나 : 그래? 왜? 난 6개월 정도 지났으니까 해지해도 괜찮지 않을까 했는데..

그녀 : 너 3만 원도 없어? 차라리 이제는 일을 시작하는 게 어때?

나 :.....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화를 누르고 전화를 끊은 다음, 그녀에게 장문의 카톡을 보냈다. 


정말 내가 단 돈 3만 원이 없어서 언니한테 그렇게 이야기했겠냐고. 

최대한 언니에게 피해를 덜 주고 싶어서 6개월을 기다린 거라고. 

그런데 언니가 어떻게 나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냐고.




우리의 인연은 거기. 딱 거기까지였다.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 버린 우리. 이 인연을 애써 붙잡고 이어나갈 이유도 의지도 내겐 없었다. 그렇게 한 사람이 나에게서 지워졌지만 나에게 던진 말, 3만 원도 없다는 말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선명해져 갔다.


장난으로 던진 돌멩이에 맞아 죽어가는 개구리처럼 나는 오랜 방황을 시작했다. 살아있지만 마음은 죽어가는 것 같은 하루하루. 이런 마음을 다 잡고자 동네친구를 만나 수다를 떨어보고, 그녀를 안주삼아 술을 마셔봐도 그때뿐이었다. 그녀가 던진 돌멩이는 내 머릿속에 갓 파온 도장처럼 더욱 선명해져 갔다. 마음을 달랠 다른 해결책이 필요했다.


그때 내가 선택한 해결책은 바로 독서였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사람에게 기대어 풀기 싫었다. 인간관계에 관한 에세이나 책을 보며 위로를 받던 중 한 권의 책을 운명처럼 만났다. 그 책은 바로 <나의 하루는 4시 반에 시작된다>라는 책이었다. 


“새벽은 배신하지 않는다. 일어나라, 삶이 달라진다.”


저자는 유년 시절 해외 이민을 가게 되어 그곳에서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했다고 한다. 그로 인해 무기력증과 우울증을 심하게 앓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 바로 새벽기상이라고. 나 역시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떨쳐버리고 싶었고 이 책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나는 책을 덮고 바로 다음날부터 새벽기상을 시작했다. 매일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동네 산책로를 무작정 걸었다. 걸으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정말 그 말이 언니의 진심이었을까? 이 말이 왜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하는 걸까? 새벽에 걸으며 나 자신에게 계속 물었다.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묻고 또 물어 찾아낸 정답은.


경력 단절 10년 동안 떨어질 때로 떨어져 땅 속까지 꺼진 자존감이었다. 외벌이로 두 아이를 키우며 아끼는 것에는 자신 있다며 매일 집밥에, 가계부까지 쓰며 열심히 살았지만 사실 난 아끼는 것에 지쳐 있었다. 나 조차도 모르던 내면의 소리, 무의식 속 깊숙이 숨기고 살았던 마음이 그녀의 말과 만나면서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몇 년이 지난 지금, 그때로 돌아간다면 그녀를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녀 역시 나처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경력 단절 엄마였으니까.  빡빡한 외벌이 살림에 아이를 잘 키우고자 시작한 일이었을 텐데. 그리고 무엇보다 정말 나를 찾기 위해 사회로 나왔을 텐데. 이제는 그녀를 이해할 수 있다.


그 일 이후로 나는 정말 나를 찾고 싶어졌다. 한 남자의 아내이자, 아이들의 엄마이자, 살림을 도맡은 주부 말고 정말 나. 그동안 잊고 살았던 나의 진짜 모습.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그리고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진짜 나 <The real me>를 찾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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