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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필작가 Apr 15. 2021

영어와의 첫만남

Bravo, my life!(6)

 우리 동네서 약 10리 정도 되는 북면 삼산리 수동에 중학교가 생겼다고 해서 동네 애들과 가보았다. 목사님이 설립했다는데 아직 건물이 없어 예배당을 교실로 쓰고 있었다. 학생 수는 40명에 과목은 국어와 영어 2개뿐이었다. 선생은 2명이었는데 한 분은 초등학교에서 국어 선생으로 있었고 다른 한 분은 이북에서 대학을 졸업했다고 했다.

     

 입학한 지 두어 달 되었을 때의 일이다. 선생님이 삼산 국민학교에서 운동회를 하니 후원금조로 15원씩 가져오라면서 돈 가져오기 힘든 사람은 손들어 보라고 했다. 평소 하는 행동이 선생 같지 않아 싫어하던 내가 손을 들었고 다른 애들이 합세하여 절반 이상이 반대하는 형편이 되었다. 그러자 선생이 갑자기 맨 앞에 앉은 우리 동네 김민권의 뺨을 후려치며 '성의가 없는 게지 그것도 못 내는 게 무슨 중학교를 다니느냐'라고 소리쳤다. 애들이 서슬에 놀라 주춤주춤 손을 내리는데 너무 화가 났다. 벌떡 일어나 여기가 어딘데 학생을 때리느냐고 대들자 선생이 부지런히 오더니 내 귓방망이를 힘차게 갈겼다. 머리를 들이밀며 내가 글이 귀하지 이런 일로 매 맞으러 온 줄 아냐, 더 때려보라고 대들었더니 선생이 때리진 못하고 성이 나서 발발 떨었다.


 애들이 나를 붙들고 교실 밖으로 나와 책보와 도시락을 가져다주었다. 혼자 물가에 나와 점심을 먹으면서 출렁대는 바닷물에서 헤엄치는 꽁치들을 구경했다. 화가 풀려서 좀 앉아 있으니 친구들이 다들 공부도 않고 찾아왔다. 선생이 오늘 이만 집으로 가라고 보냈다는 것이었다. 나 때문에 오늘 너희들까지 공부 못하게 해서 미안하다 하니 괜찮다고들 했다. 집에 가니 아버지가 왜 일찍 왔냐고 하시기에 오늘부터 1주일간 가정 실습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혼자 앞날을 이리저리 궁리하며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친구들이 집 뒤의 조그만 산에 모여 와서는 선생이 자기가 잘못했으니 다시 함께 공부하잔다는 말을 전했다. 안 간다고 하니 다음날 또 한 애가, 그다음 날 또 다른 애가 찾아왔다. 그쯤 되니 친구들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집에 있어 보니 심심하기도 해서 다시 학교에 가기로 했다. 책보를 꾸리는데 아버지가 오셨다. 친구들이 자꾸 찾아오고 하니 대화를 들으신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책보를 뺏으시며 선생과 싸우는 놈이 뭘 배우려느냐고 그냥 그만두라고 하셨다. 아버지도 화가 나서 하신 말씀이었겠지만, 문득 앞으로도 이런저런 꼴을 보느니 그만두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길로 독학을 결심하고 학교를 관두었다.


 그렇게 혼자 공부하던 어느 날, 옹진군 냉정리로 미 군정청 군인 5명과 통역이 파견을 나왔다(당시 통역은 일제 강점기 때 조선총독부 참의원을 지낸 노창언 씨의 아들이었다). 미군들은 평범한 젊은이들처럼 호기심도 많고 웃음도 많았다. 무얼 보면 신기한 듯 사진도 찍고 애들에게 초콜릿과 사탕도 주었다. 하지만 내 관심은 미군보다 난생처음 들어본 '진짜 영어'에 쏠려 있었다. 그전까진 막연히 영어라는 게 있나 보다 했는데 막상 눈앞에서 대화하는 것을 보니 흥미가 동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서로 웃고 이야기하는 것도 신기했고 한국어와는 다른 악센트와 굴러가는 듯한 소리도 좋았다. 나도 영어를 배우고 싶어졌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고 했던가. 마침 서울에서 내려온 대학생이 우리 동네에서 가까운 동문와리에서 영어 야학을 시작했다. 농촌 젊은이들의 계몽이 목적이라고 했다. 친구 이수철과 냉큼 등록하고 그날부터 두 시간씩 2주 간 영어를 배웠다. 그런데 서울에 볼일이 있어서 잠시 간다던 선생님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고 우리는 겨우 알파벳과 발음기호만 배운 채 덩그러니 남았다. 하지만 불붙은 열정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다음 날 옹진읍에 가서 일본 삼성당에서 나온 영일 사전과 중학교 영어책을 사 왔다. 책을 들여다보며 읽고 쓰고를 몇 번이고 반복했지만 낯선 언어를 독학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공부를 할수록 절망스럽고 막막한 날들이 계속됐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돌산의 돌멩이를 치워 길을 닦는 마음으로, 당장 성과는 보이지 않을지언정 매일 꾸준히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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