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여파인지 몸이 아팠다. 애들을 위한 체험 위주 여행은 자제해야겠다. 이제는 애들 에너지를 따라가기 힘들다. 남편과 아이들은 서울 시댁에 먼저 가고, 나는 몸이 호전되면 내 자가용으로 움직이기로 했다.
하루종일 누워있어도 호전되지 않았다. 눈앞에서 고양이가 한 자세 그대로 잔다. 나도 그 자세 그대로 고양이를 쳐다본다. 네 신세나 내 신세나 같다. 이번 설은 시댁에 못 가고 고양이와 눈맞춤하고 있어야 하나 생각했다.
남편이 몸살약을 사들고 운전해서 데리러 왔다. 시어머님께서 데려오라고 하셨단다.
엄마가 너 혼자 외롭게 아프지 말고 서울 집에 와서 누워있으래.
약을 털어 넣고 남편차를 타고 따라갔다. 시어머님께서는 아버님이 돌아가시자마자 개종하셨다. 권사님이 되셨다. 수차례 지내던 제사가 하루아침에 없어졌다. 명절이라고 따로 전을 부치거나 제사 음식을 하지 않는다. 시댁에 도착하니 어머님께서 농담을 건네신다.
얘! 원래 며느리들은 명절 전에 갑자기 아픈 데가 생긴다고 하더라.
머리를 긁적이며, 나도 한마디 건네드렸다.
천장 보며.. 맛있는 거 못 먹을까 봐 걱정 좀 했습니다.
어머님은 여든이 넘으셨다. 정정하시고 아직 부엌살림을 장악하고 계신다. 내가 시댁에 가면 만두 빚을 재료를 조금 남겨두신다. 명절이면 만두 빚던 유년시절이 떠오른다던 내 얘기에 만두 빚기를 해보라고 매년 재료를 남겨두신다. 나는 어머님께서 만두 3개 빚을 동안 쳐다만 보고 있었다. 시누와 어머님께서 왜 보고만 있느냐고 물으신다.
어머님 만두 빚으시는 거 자세히 보고
제대로 배우려고요.
제 고집대로 하면 안 이뻐서요.
올해는 무엇이 되었던 기존에 가진 지식은 다 버리고 새로 배우겠다는 마음을 가졌다. 역시 어머님은 만두를 잘 빚으신다. 세 번 본 후 나도 흉내 내본다.
(여든 넘으신 어머님의 만두 빚기 스킬)
따로 전을 부치지 않기에 우리 집은 즉석으로 먹을 음식을 한다. 매년 농수산물 시장에서 싱싱한 굴 한 망과 새우를 사서 푹 삶는다. 남편이 큰 솔을 사용하여 굴 표면을 박박 씻어 닦는다. 한 시간 넘게 쭈그리고 앉아 씻는다. 그 정성이 대단하다. 올해 농수산물시장 굴맛은 별로인데 새우만큼은 초장에 찍어먹으니 달디달다. 달다는 것 이상인데 표현할 단어가 없다.
설 같지 않은 정적을 깨려는지 윷놀이를 하자고 하신다. 남편과 중학생 아들, 초등학생 딸이 A팀, 시누, 시아주버님, 시어머님이 B팀이다. 3만 원 내기를 했나 보다. 몸이 아파 승부욕에 찬 우리 집 아이들의 표정을 살피며 관람한다. 새삼 노총각이던 남편이 결혼해서 한 팀을 이룰 만큼 애들을 키운 게 대견하다고 느껴진다. 오늘 보니 우리 집 중학생 아들의 옆모습이 영락없이 남편을 닮아 피식 웃었다. 절대 안 지려고 전략을 이리저리 짜는 모습은 나를 닮았다.
어렸을 때에는 명절마다 대나무 꼬챙이에 낙지를 돌돌 말았었다. 딱딱한 밤껍데기를 벗기며 다음에는 엄마말을 거역하고 깐 밤을 사겠다는 다짐도 했다. 밀가루 조각을 튀겨 산자(유과)를 만들어 조청과 쌀뻥튀기를 묻힌 적도 있다. 타래모양 약과를 만들거나 들깨와 조청으로 강정을 만들기도 했다. 지금은 다양한 명절음식을 만들지 않아 설렘은 없다.
그래도 명절이라 가족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어 다행이다. 어머님께서 안 계신다면 또 다른 명절 모습이 그려져 안타깝긴 하다. 지금은 중심축에 어머님이 계셔서 함께 모일 수 있고, 아이들도 할머니와 추억을 쌓아 다행이다.
설날, 하마터면 혼자 벽보며 외로울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