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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에서 공약 만들기

by 자급자족

선배로부터 의뢰 하나를 받았다. 지인의 선거 공약 일부를 만들어 달라고 한다. 선배의 지인분은 특정 분야의 협회 회장으로 출마하신다고 한다. 선거 공약... 만들어 본 적 없다. 만들어야 한다. 화창하지 않은 일요일, 도시락 2개를 싸들고 아지트 공간인 스터디카페로 갔다. 어두컴컴한 공간에 공부하는 성인이 10명쯤 된다. 그 넓은 공간에 얼굴 모르는 10명이 띄엄띄엄 앉으니, 더 춥다.


선거공약...어떻게 만들지? 백지에 삼색 볼펜으로 끄적이며 곰곰이 생각해 본다. 사람들은 어떤 사람을 협회 회장으로 뽑고 싶을까. 선거공약을 무턱대고 만들기 전에 [공약]의 조건을 만들어보자 싶었다. 하나하나 쓰다 보니, 공약의 기준이 잡혀 간다. 나도 내가 싫다. 공약을 만들라고 했으면, 공약을 만들면 되지. 왜 공약의 조건을 먼저 만들려는 것일까. 죽일 놈의 ISTJ다.


[공약]의 조건


1. 명확한 목표

1) 공약이 구체적이고 달성 가능한가.

2) 유권자들은 공약이 현실적으로 이행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싶어 한다.


2. 연관성

1) 해당 분야 정책의 진흥과 직접적 관련이 있는가.

2) 유권자들이 겪고 있는 문제나 관심사를 반영하는가.

3) 그들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내용인가.


3. 설득력

1) 근거와 데이터가 뒷받침되는가.

2) 과거의 성과나 현재 상황을 기반으로 공약의 필요성과 효과를 설명할 수 있는가.


4. 실행 계획

1) 공약을 달성하기 위해 어떤 방법으로 달성할 것인가.

2) 실현 가능한가.

3) 목표 달성을 위해 협회 차원에서 필요한 자원과 일정은 설명 가능한가.


공약의 조건은 생각해보았고, 휘발되기 전에 공약을 만들어야 한다. 어떻게? 해당 분야 배경 지식이 부족하니, 일단 지식을 쌓아야 한다. 유권자들은 단어 하나하나에 예민해질 수 있기 때문에 한 치의 오차가 없어야 한다. 그래서 참고할 자료를 서치 해본다. 큰 지식에서 작은 지식으로 좁혀보고자 했다.


그런데 불현듯 역대 후보자들의 공약이 궁금해졌다. 당선자와 탈락자의 차이는 무엇인지도 궁금해졌다. 그래서 최근 당선자와 탈락자의 공약을 비교검토했다. 내가 건드리려고 하는 정책 분야와 관련하여 역대 후보자들이 같은 공약을 내걸었다. 몇 년간 같은 공약이 지속되었다는 건 웃픈 일이다. 새로운 것도 발견된다. 공약은 공약일 뿐 지켜지지 않았다는 공통점이다. 이게 공약의 새 조건인가?


역대 당선자들의 공약이 별게 없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대단한 발견이다. 다시 원점이다. 다음으로 배경지식을 넓은 범위에서 좁은 범위로 쌓아나가려면 어떤 자료를 검토해야 할까 고민했다. 법령->시행령-> 해당 정책 분야 10대 정책 이슈 보도-> 국가적 차원의 5개년 발전 종합 계획->중앙기관의 5개년 종합발전계획 ->하위 기관의 5개년 종합발전 계획 -> 하위 기관의 당해 계획 순으로 참고했다.


다 읽지 않고 브라우징하고 스킵하며 내가 취하고자 하는 핵심단어만 색깔 볼펜으로 동그라미 쳐 나갔다. 기억이 휘발되기 전에 빠른 속도로 작업했다. 한글 백지를 열어두고, 핵심 키워드 별로 중심 주제를 하나씩 워드 쳐 나갔다. 그런 후에 출력된 참고자료들을 책상 위에 펼쳐두고, 서울에서 김씨 찾기처럼 주어 술어를 퍼즐 맞추듯 채워 나갔다.


4개의 정책 공약 대주제가 생성되었고, 각 대주제별 세부 정책들이 자리를 잡아갔다. 처음부터 잘 쓰려하면 짜증 난다. 안 되는 머리에 시간만 가기 때문이다. 후루룩 쓰고 스터디 카페 로비로 나가 출력했다. 출력->정독->퇴고를 총 4회 반복했다. 그러면서 공약서가 다듬어졌다.


선배에게 참고 문서 리스트를 ZIP으로 말아 전송하고, 공약서도 전송했다. 23시 00분. 귀가해야 한다. 의뢰를 받고 난 후에는 그 의뢰물이 누구의 의뢰인지, 왜 해야 하는지 이유를 까먹는다. 그냥 푹~ 빠져서 한다. 그게 희열을 느낄 정도로 재미있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선배님께서 공약을 확인하셨나 보다. 만족하셔서 다행이다.


내일 출근하려면 정리하고 귀가.

내일부터 내 하자.


우리 집 애들은 잠들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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