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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힘들어? 얼마나 더 좋아지려고 그러나?

모닝 설거지 전에 쓰는 글

by 자급자족

고난 속에 성장이 있다. 누구나 다 아는 말이지만 조금 살아보니 맞는 말이다.


#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 기숙사에 거주했고 기숙사에서 쫓겨나지 않으려면 좋은 학점을 유지해야 했기에 강제 공부를 했다. 기숙사비와 등록금, 어학연수원비를 내손으로 마련하기 위해 새벽에는 근로 장학생으로 숙사 식당에서 긴 방수 앞치마를 두르고 설거지 기계에 식판을 넣는 일을 했다. 가끔 붓글씨 동아리 남자선배들이 반갑다고 아는 척을 하면 그들이 먹은 식판을 건져 올리며 인사하기도 했다.


수업 마친 오후 4시에는 소주방에서 가게 오픈 준비 청소를, 오후 6시에는 닭갈비집 서빙을 했고 방학 때는 삼겹살집 풀타임 종업원으로 3년 일했다. 닭발의 껍질을 벗기며 토한 적도 있고, 소주방에서 누가 토해놓은 피자 한판을 고무장갑 끼고 치우며 토한 적도 있다. 만약 누군가 지금 당장 삼겹살집을 운영하라면 할 수 있다. 그 당시 춤바람 난 여사장님과 노름에 빠진 남사장님을 대신해서 삼겹살집을 썩 잘 운영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대학 기숙사밖에 거주할 곳이 없었고, 장학금을 받고도 턱없이 모자랐던 학비를 두 주먹으로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세상에 두 발로 우뚝 서는 일이 녹록지 않음을... 온실 속과는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경험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20만 원을 유산으로 주셨다. 그 돈으로 정보처리기사 실기학원을 등록했고 그 자격증을 가산점으로 정년이 보장되는 평생직장을 얻을 수 있었다. 부모님께서 또 하나 물려주신 게 있는데 6남매 언니 오빠들에게는 아직 말을 못 했다. 강철 같은 깡다구 물려받았다. 집이나 땅을 물려받았다면 깡다구는 물려받지 못했을 것이다.


풍족했다면, 재테크 노하우도 공부하지 않았을 거고, 실행도 안 했을 거다. 가진 것 지키며 지냈을 것이다. 지금 당장 직장을 잃는다 해도 두렵지 않다. 어떻게든 살 것이다.


지금 생각하니 엄마가 눈 감으시며 누구는 집, 누구는 땅을 가지라고 했다. 마지막 내게 하신 말씀은 "○○이 너는 아프리카 하늘에서 비행기 타고 떨어뜨려도 구걸이라도 해서 살 것이다."라고 하셨다. 아직 아프리카 상공에서 안 떨어져 봐서 모르겠다. 그래도 용기는 없어서 구걸은 못할 듯하다.


# 대학시절, 프랑스 어느 공원에 갔었는데 태양이 작열했다. 숨도 못 쉴 만큼 덥고 습해서 나무그늘 아래 오만인상을 쓰고 앉아있었다. 70대 프랑스 할아버님이 말을 걸어왔다. "너희 나라에서는 뜨거우면 어떻게 하니? 덥고 뜨겁다고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게 있니? 얼굴 찡그리지 말고 편안하게 있으렴" 이라고 말씀하셨다. 생각해 보니 짜증을 낸다고 당장 시원하게 바꿀 수 있는 환경도 아니었다.


그 이후 일상 속에서 관점이 바뀌었다. 카메라를 잃어버리면 '아, 내 것이 아니었나? 인연이면 나타나겠지.' 끓여놓은 라면을 아들이 부엌 바닥 전체에 엎지르면, '저 모서리 구석은 평소 닦지 못했는데 라면 국물 덕분이라도 아주 깨끗하게 닦겠네.' 설거지하다가 유리그릇이 깨지면 '그렇잖아도 그릇이 많다 싶었는데 잘되었네.' 싶다. 0.01초 안에 생각의 전환이 일어나서 상황 탓, 남 탓, 재수 탓을 하지 않게 되었다.


가장 큰 단점은 우리 집 아이들도 이 사고가 박혀버렸다는 것이다. 아이가 큰 실수를 하고 나서도 셀프 용서를 해버린다. "아~ 엄마 이건 괜찮아. 내가 실수한 거잖아. 사람은 실수할 수 있어."한다. 중간 지키기가 어렵다.


# 첫 근무지로 버스도 안 다니는 시골로 배치받았다. 나만 유배를 당했나 싶은 결과였다. 친정 언니들은 내가 직장인 되면 명품가방 메고 정장을 쫙 빼입고 다닐 줄 알았단다. 왜 넌 시골에서 운동화에 책가방은 문신처럼 등짐으로 계속 메고 다니냐고 했다.


시골에서 퇴근하고 텃밭농사도 배우고, 문화센터에서 외국어, 수영, 요리도 배웠다. 자전거를 타고 중국어를 외우며 출퇴근했기에 체력도 키웠고 중국어 실력도 늘어갔다. 직장에서 제공해 준 월 3만 원짜리 기숙사에서 주거비 절약도 가능했고, 그 비용을 아껴 서울에서 학비가 가장 비싼 대학원의 공부도 마칠 수 있었다.


그 시기 한 총각이 연애의 실패로 홧김에 시골로 유배를 왔다. 그렇게 남편을 만나 아들 딸 낳고 가정도 꾸리게 되었다. 20대 첫 근무지를 도시로 배치받았다면 비싼 월세에 주변 수준 맞춰 사느라 지출도 늘어 대학원 공부는 꿈도 못 꿨을 것이다.


# 직장에서 부당한 일을 3년 시킨 적이 있다. 누가 봐도 부당한 업무 지시였다. 괴롭고 얄미웠지만 그 길로 잠실 교보문고에 갔다. 사비를 털어 생소한 해당분야 책 20권을 사서 집으로 택배를 부쳤다. 하나씩 정독하며 새롭고 어려운 분야의 지식을 쌓아나갔다. 부당한 일을 시켜? 참으로 "고~~~오~~ 맙다." 네 덕에 성장한다. 희생만 하지 않겠다는 마음이었다.


결국 그 주제의 아이템으로 전국 대회에 나갔고 한 번은 전국 1등을 해서 표창기록으로 남았고, 한 번은 제주도 포상휴가에 100만 원의 상금을 받았다. 그 상금으로 정관장 홍삼을 사서 강제로 부당한 일을 시킨 상사들에게 옛다 떡이나 먹어라~~ 하면서 공손히(?) 선물을 드렸다.



# 직장 업무 외에 끊임없이 의뢰가 들어왔다. 무한 봉사 의뢰였다. 칼럼 쓰기, 보고서 쓰기, 특강 자료 만들기, 국가 기관 컨설팅하기, 컨설팅 자료 만들기, 검토 의견서 쓰기, 기관 평가하기, 고위직 승진 시험 출제하기. 어느 날은 퇴근을 스터디카페로 해서 밤을 새우며 임무를 완수하고, 그다음 날 마스크 끼고 그대로 출근한 적도 있다.


짜장면집에 1등 요리사가 되겠다고 취직했는데, 짜장면은 못 만들게 하고 매운 양파만 3년 까라고 하는 기분이었다. 양파 까다 울면서 그만 둘 판이었다. 정말 한계를 뛰어넘는 의뢰가 끊임없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였고, 나는 시켜도 되는 사람인가? 너무 힘들어서 이게 가스라이팅인가? 생각해 본 적도 있다.


버티고 버텨냈더니, 남은 게 강심장 밖에 없다. 이제는 그 어떤 의뢰가 들어와도 겁이 없다. 해당 분야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해본 경험이 없어도 두렵지 않다. 공부해서라도 해치울 수 있다. 그래 "고~~ 오~~ 맙~~ 다" 내 직무분야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면 언제 이런 일을 해보겠냐 싶다. 돈주고도 살 수 없는 남의 직무 경험이다. 간접체험 오~~~ 지게 하고 뼛속에 새겨진 건 내 실력이다 싶다.



# 어느 날 중학생 아들이 어려운 도전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선 적이 있다. "아들아. 너 그거 합격할 수 있겠어? 안 떨려?"라고 물으니.


"엄마 나 못 믿어? "나 ○○○(내 이름)씨 아들이야~~. 나야. 나 못 믿어?" 한다. 너무 세뇌가 되었나 보다.


요즘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도전 중이다. 그래서 그냥 맘 편히 감옥에 들어와 앉아있다고 생각한다. 평온한 감옥도 있다. 자연스럽게 자유를 배제시켰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마음 안에서 '와 이걸 넘겨버리면 이거 얼마나 더 성장하려는 거지?' 싶다. 그만큼 고통스럽다. 물론 더 이상 성장하고 싶지 않고 닭 키우고 농사짓고 살고 싶지만, 도전했으니, 마지막 세뇌를 시켜본다.


지금 힘들어?? 얼마나 더 좋아지려고, 얼마나 더 행복하려고 고통스럽나??


재능은 한계가 있지만, 노력엔 한계가 없다!
- 앨버트 아인슈타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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