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력
미어캣?
잠을 자려고 불을 끄려는데 우리 집 고양이, 레오가 전용 쿠션 위에서 한참을 서있다. 미어캣인 줄 -.-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남편이 자러 들어가며 레오에게 한마디 건넨다.
"레오야 줘!!!!!"
"너의 귀여움을!"
레아는 스크래치 위에서 째려보며 누워있다. 전용 침대다. 눈빛이 "야! 들어가 자라!" 하는 것 같다. 옆에 나란히 누워 눈을 맞췄다가 앞발로 싸다구 맞을뻔했다.
오늘은 직장 선배님과 1시간 동안 대화했다. 극내향인이 대화를 오래 하니 에너지가 다 소진되는 것 같다. 덕분에 퇴근하고 녹초가 되어 뻗었다. 평소와 다른 점이라고는 대화를 오래 했다는 것뿐이다. 역시 에너지를 비축하려면 직장에서는 말을 아껴야 한다. 월급 받은 만큼만 일해야 한다.
94학번인 남선배님은 지난번 회식 때 조용히 옆에 앉더니 본인이 몇 년 동안 집중했던 업무에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다고 했다. 몇 년 동안 부여잡으며 만든 프로젝트가 아까워 자신의 이름 석자로 쐐기를 박고 싶은 거다. 술에 취해 눈이 반쯤 풀려있어 진짜 도전을 하실 건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근데 오늘 컨설팅을 부탁한다며 내 사무실로 찾아왔다. 평소 아이디어 부자인 선배님의 업무 결과물이 참 아깝다는 생각을 하긴 했다.
선배님을 도와줄 심리적 여유가 없다. 남을 도우면 안 되는 상황이다. 그래도 열심히 도전할 의지가 있으시다면 연말에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도록 도우려 한다. 남을 도울 때 항상 내일처럼 도왔지만, 이번은 남의 일처럼 도울 생각이다. 내가 스트레스받지 않는 선에서, 화장실 갈 시간만큼만 할애하기로 했다.
선배님은 올해 두 개의 큰 논문대회에 나가기를 원하신다. 일명 이타쌍피 계획이다. 두 논문 다 두 손가락 안에 드는 결과 순위를 원하신다. 그런데 논문 과정을 경험해보지 않으셨기에 아주 쉽게 설명해드려야 한다. 독립변인, 종속변인, 혼합연구방법론 등의 용어가 나왔다가는 두 손 들고 도망칠게 분명하다.
Q&A로 풀어갔다. 선배님의 주전공 분야와 심취해 계신 업무 프로젝트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렸다. 해당 프로젝트는 어떤 문제의식에서 만들게 되었는지, 그 프로젝트의 수혜를 받는 사람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으면 좋겠냐고 물었다.
그리고 투입 프로젝트와 효과를 나타내는 두 용어로 논문의 가제목을 붙여보라고 했다. 이타쌍피의 논문 두 편은 주제와 내용, 대상이 어떻게 다른지 설명을 부탁드렸다.
4월 7일까지 2개의 연구계획서 초안을 만들어 제출해 달라고 과제를 제시했다. 어려우실까 봐 대통령상과 국무총리상을 받은 8편의 논문을 폴더에 넣어드렸다. 선행 연구자는 논문이라는 논리적인 틀에 내용을 어떻게 구성하고 집어넣었는지 막힐 때 참고하시라고 했다.
일기식으로라도 작성하시라고 했다. 목격자의 입장에서 선배님의 업무를 봐왔기에 그분의 글로 그분의 생각과 전문분야를 읽고 싶었기 때문이다. 왜 프로젝트를 만들게 되었는지, 자랑스럽다고 생각하는 프로젝트는 어떻게 기획했고, 어떻게 적용했으며, 일반사람에게 어떻게 확장하고 공유하려는 노력을 했는지, 각각 프로젝트의 수혜 대상이 누구인지 등 편하게 진심만 채워오면 된다고 했다.
두 편의 연구계획 초안 브리핑을 통해 연구의 핵심을 파악하고 그 프로젝트에 딱 맞는 검증된 측정도구를 함께 찾기로 했다. 그리고 이제까지 실행한 프로젝트 요소는 잊고 올 한 해 프로젝트를 풍부하게 보완하여 새롭게 실행해 보고 사전-사후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 검증해 보자고 했다.
심사를 하는 사람들이 업계 사람들이 아니고 대학의 교수들이기에 논문에 직장인으로서 양념을 가미하기로 했다. SWOT분석, 출발점 분석, 의견분석 등을 추가해 꼼꼼하게 보완하는 게 어떻겠냐고 말씀드렸다. 이쯤 되면 "나 안해" 하실 법도 한데 4월 초까지 만들어 오신다고 한다. 다음 기회를 노려봐야겠다.
매일 새벽 6시 40분이면 출근해서 업무 하는 선배님이시다. 이른 출근이 습관인 분이시라 사연 있는 분인줄 알았다. 그런데 한결같으시다. 승진도 원치 않으신데 갑자기 논문에 욕심을 내신다. 그만큼 본인이 만든 프로젝트를 누군가에게 뺏기고 싶지 않고 저작자로서의 이름을 새기고 싶어 하신다. 논문으로 시작한 일이 나중에 전자책 출판으로 이어졌으면 한단다. 본인의 일을 소중히 여기시는 것 같다. 선배님의 최종 목표는 좋은 결과를 통해 동종 업계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프로젝트를 발표하는 것이다. 아이디어를 전파하고 싶으신다.
선배님께서 연말에 수많은 사람 앞에서 활짝 웃으며 강의할 수 있길 바라고, 나도 진심과 정직은 통해서 꼭 좋은 결과로 나타난다는 것을 목격하고 싶다.
브런치에 끄적이는 동안, 레오도 전용 꽃무늬 베개 위에서 잘 준비를 완료했다. 출근하려면 자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