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리지 않는 직장에 20년 넘게 다니고 있다. 천재지변으로 기관 건물이 사라져도 잘리지 않는다. 대표도 있고 임원도 있지만 명령 체계가 아닌 수평체계다. 적당히 일하고 처신하면 정년까지 평온한 직장생활이다. 개인의 열정에 따라 좋을 수도, 오지랖일 수도 있는 근무환경이다.
작년에 기관의 대표가 따로 불러 부탁을 했다. 임원 회의에서 모두가 좋아하고 찬성한 일이라고 했다. 모두가 찬성하고 좋아하니 그 일을 내가 해줬으면 한단다. 승낙했고, 뜻에 따라 1년 동안 열심히 추진했다. 겉으로 보기에 성공적이었다. 모두가 행복해했으나 내 머릿속에서는 '절대적으로 대집단 프로젝트는 기획하는 게 아니구나'라는 걸 깨달았다.
만장일치로 좋다고 하신 건 그렇다 치고, 기획하는 일도, 회의를 소집하는 일도, 거액의 예산을 쓰는 일도, 사소한 선물을 선택하고 포장하는 일도 다 내가 해야 했다. 그런 단순 업무는 그런대로 쉽지만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이 사람에게 아나운서 협조 요청을, 저 사람에게 안전관리 협조 요청하는 것도 나였다. "이런 걸 왜 해." 혹은 "지금은 바쁜데..."라고 한마디라도 듣는다면 겉으로는 웃지만 스크레치가 난다. 표는 내지 않는다. 머리를 긁적이며 겸연쩍게 웃는 시늉을 할 뿐.
오늘 아침에 서류를 정리하고 있는데, 대표가 부른다. 어제 잠깐 협의를 했는데, 누구는 이런 의견을 냈고, 누구는 저런 의견을 냈다고 한다. 결론은 올해도 전체가 참여하는 대집단 프로젝트를 내가 추진했으면 한단다.
문득, 작년에도 하고 싶었지만 꺼내지 못한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저기요.. 모두가 좋고, 행복하고, 만장일치로 원하는 일이라면... 물개박수 치며 찬성한 사람이 추진하게 하시죠. 그걸 왜... 제가.....'
그리고 마지막 한마디...'저기... 협의, 회의란 단어의 개념을 아세요?'
대표는 이번 7월에 퇴직한다. 대표가 했으면 하는 프로젝트는 퇴임 이후인 12월에 시작하는 프로젝트다. 아니....ㄱ
선택지가 3개다.
1. "어머~ 그 아이디어 낸 분이 하시면 너무 좋을 듯해요. 협조는 적극적으로 하겠습니다."
2. "예, 예" 잘 듣다가 7월에 퇴직하시면, 8월부터 기억상실증에 걸린다.
3. '나는 생각하는 뇌가 없다' "예" 하고 12월에 추진하는 거다.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7월에 퇴임하는 대표의 소원, 들어준다.
'곰과'가 아닌 '여우과'로 일했다면 생활이 더 쉬웠을 수도.
브런치에라도 쓰고 잊는다. 아니 잊기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