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랫동안 외부 출장을 가지 않는 루틴을 보냈다. 직장의 단톡방도 [채팅 주의]를 걸어놨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과도 같다. 과거에 왕성한 팀플레이를 했던 친구와 오랜만에 호텔에서 재회했다. 1박 2일 세미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기관 측에서 강이 보이는 호텔방을 배정해 줬는데, 강에 대한 기억이 없다. 밤 9시 넘어서까지 강의실에 잡아넣어두고 강연만 듣게 했다.
친구는 20년 전 신입직원 시절부터 친하게 지내온 입사동기다. 처음 그녀를 봤을 때, '세상에는 저렇게 예쁜 사람도 존재하는구나'라고 생각하게 하는 외모였다. 외모만큼이나 성격은 유쾌했고, 항상 웃는 얼굴이었다. 옆에 있으면 나까지 전염되어서 웃음을 차단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 친구가 5년 전에 갑자기 암에 걸렸다.
친구는 협회 회장을 맡았었고, 나는 옆에서 보고서 쓰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콤비가 되어 이리저리 교섭도 다니고, 말레이시아에 장기 출장을 같이 가는 등 한 몸처럼 움직였다. 그런 친구가 갑자기 잇몸에 염증이 낫지 않는다더니, 설암이라고 했다. 암에 걸렸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열정적인 나이였고, 아이들도 어렸다. 그렇게 세상이 끝나는 줄 알았고, 더 이상 친구 없이 일을 할 힘이 나지 않았다.
친구는 암수술을 받았고, 항암이 잘되어 완치판정을 받았다. 이제 건강관리와 친구 하며 잘 지내고 있다. 친구와 나란히 앉아 강의를 들으며, 노룩(No Look)으로 한마디 건넸다.
나 : 네가 다시 건강해져서 함께 세미나에 참석할 수 있어서 기뻐!
친구 : (깔깔깔 웃으며) 나는 완치되자마자 계속해서 여러 세미나 들으러 돌아다녔거든? 네가 칩거하고 안 나왔잖아.
나 : 전처럼 너무 열심히 살지 마. 둘이 뛰다 한놈 아파버리니, 멘붕이 왔어.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데. 그때부터 나도 칩거 생활하고 있어.
친구 : 같은 일을 하면서 나는 아프고, 너는 안 아픈걸 보니, 내가 약골로 태어난 것 같아.
나 : 이제 제발 열심히 살지 마. 뭣이 중헌디? 네 가족만 생각해! 협회고 나발이고 내버려 둬. 누구든 일하겠지. 그날 이후로 닭을 키우는 게 그저 야망이 되었어.
친구는 집에서 얼음을 싸왔다더니, 가방 속에서 주섬주섬 맥주 2캔을 꺼냈다. "내가 이 맛에 살지" 하며, 두 잔의 얼음 맥주를 만든다. 노가리칩은 롯데 기업이 잘 만든다며, 나중에 꼭 롯데꺼만 사 먹으란다. 맥주 한 캔이 하루의 피로를 풀어준다며 행복해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술을 마셨다. 하이네켄 맥주에 얼음을 넣어먹으면, 취하지 않고, 이상한 냄새도 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친구랑 마시니 술이 달았다.
어렸을 때 누가 더 고생스러운 알바생활을 했는지 베틀 하며, 건강해진 친구와 도란도란 얘기 나누었다. 친구는 중간중간 울다 웃었다. 그 예쁜 얼굴에 나보다 더 고생하며 대학을 다닌 듯했다. 5년 만에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로 수다를 떨었다. 아무것에도 일상을 뺏기지 않았으면 한다. 허락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