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에는 온도가 있다. 그리고 그 온도에 묻어나는 내면의 깊이가 있다.
어떤 깊이의 언어, 어떤 온도의 언어를 쓰느냐에 따라 배우의 내면을 알 수 있다. 너무 뜨거워서도 안되고, 너무 차가워서도 안된다. 다만, 뜨거워야 할 때가 있고, 차가워야 할 때도 있는 게 배우다.
그래서, 늘 언어의 온도를 생각해야 한다.
배우는 다만, 전달자일 뿐이다.
뜨거운 온도의 언어를 가진 인물들의 인생을 탐구할 때는 뜨거운 온도의 언어를 전달할 수 있는 내면의 깊이가 있어야 하며, 차가운 온도를 가진 인물의 인생을 탐구할 때는 차가운 온도를 전달할 수 있는 내면의 깊이가 있어야 한다. 배우 스스로가 차가워지거나 뜨거워질 필요는 없다. 배우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언어의 온도, 내면의 온도가 있어야 한다. 다양한 세계를 품는 그릇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뜨거운 그릇에서는 차가운 온도를 가진 언어도 미지근해진다. 차가운 그릇에서는 뜨거운 온도를 가진 언어도 식는다. 본래의 가치가 사라진다. 그래서 배우는, 항상 마음의 결을, 마음의 그릇을, 언어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무대와 사람, 공간과 틈을 이끌어가는 배우가 있다. 그들의 언어는 대부분, 뜨겁거나, 차다. 몇년 전, 언론과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그들은, 너무 뜨겁거나, 너무 차가운 배우였고, 감독이었고, 연출가였을 것이다.
뜨거운 언어를 가진 배우에게서 차가운 온도의 언어를 가진 사람은 식고, 뜨거운 언어의 온도를 가진 사람은 결국 기화되어 사라진다. 배우로서의 인생, 배우로서의 가치관, 전달자로서 존재하던 배우라는 인간이 사라져버린다. 자유로운 영혼이 속박되어서 갇혀버리고, 결국 무대를 영영 떠나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언어와 내면의 온도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배우. 너무 뜨겁지도, 또 너무 차갑지도 않은 배우에게서는 마음의 쉼을 누릴 수 있다. 그리고 미지근한 온도의 언어, 그 언어의 맛을 느낄 수 있다. 언어는 결국, 마음의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삶은 뜨겁거나 차가워야 한다. 삶이 미지근하면 배우가 될 수 없다. 배우는 커녕,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다만 언어의 온도에 있어서는 늘 적당한 온도가 유지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언어는, 마음의 대변자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내면을 표현하는 그릇이다. 언어의 온도가 뜨거우면 그릇도 뜨겁고, 언어의 온도가 차가우면 그릇도 차갑다.
언어는 마음의 대변자다. 그래서 언어에 졸한 사람은 배우를 할 수 없다. 대부분 마음의 깊이도 졸하기 때문이다. 언어가 깊은 사람은, 대부분 마음도 깊다. 많은 세계를 담을 수 있다. 위대한 배우가 될 수 있는 기본적인 자질을 갖추는 것이다.
저희가 내 풍성을 들은 즉시로 내게 순복함이여 이방인들이 내게 복종하리로다
<성경 시편 18:44>
풍성은, 마음의 세계이며, 그릇의 깊이다. 풍성한 마음의 깊이를 가진 배우에게서는 깊이의 결이 묻어난다. 다른 세계에서 살아온 사람들, 언어와 문화, 가치관이 다른 사람도 순순히 무릎을 꿇고 귀를 기울여 경청한다. 우리는 누구나 풍성한 언어를 가진 배우가 될 필요가 있다.
배우의 언어는 늘 풍성하며, 미지근해야 할 것이다. 배우의 언어, 언어의 온도, 언어의 깊이는 곧 마음의 대변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