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는 맛이 있다. 인간미라고 할 수 있다. 따뜻한 맛을 내는 사람이 있고, 차가운 맛을 내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전혀 속내를 드러내지 않아서 짐짓 삶에 충실한 듯 보였으나, 알고 보니 시궁창과 같은 행동을 거리낌없이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사람이 가진 인간미는 너무 써서 담백한 사람들과는 꽤 비교된다.
연기는 다양한 마음의 향과 맛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장 진솔한 마음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므로, 결코 진실된 가슴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접근해서는 안되는 위대한 예술이다. 개개인의 다양성은 존중해줄 수 있으나, 제 아무리 뛰어난 색체를 가진 예술가라고 할지라도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마음의 세계를 가진 사람이 연기인생의 끝에서 과거를 회상하며 인생과 예술의 동질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만큼 우습고 추한 장면도 없을 것이다. 마음을 가장 낮고 담박하게 비울 수 있는 사람만이 가장 뜨겁고 높은 수준의 연기 세계를 구축할 수 있다.
연기의 색깔을 추구함에 이어서 마음의 높이가 낮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줄 안다. 간단하게 설명해보겠다.
빅토르 위고 원작의 위대한 작품 <레미제라블>의 팡틴을 연기할 수 있는 배우는 많다. 레아 살롱가Lea Salonga가 아니더라도, 노래만으로 영국에서 가장 기술적인 축복을 받았다고 일컬어지는 알피 보Alfred Giovanni Roncalli Boe만큼 뛰어난 가창력과 풍성한 목소리를 지닌 배우가 아니더라도, 원작의 탁월함에 의지해서 가슴을 울리는 장발장 역할을 소화해낼 수 있는 뛰어난 배우들이 바닷가의 모래알만큼이나 세상에는 많을 것이다. 다만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지금의 알피 보를 만든 명성은, 분명히 실력과 노력이 뒷받침된 결과다. 그러나 알피 보가 차량 정비공으로서의 삶을 살아보지 않았더라면, 희망을 찾아볼 수 없는 툴롱 항구에서의 장발장을 연기할 수 있었을까?
연기는 그 어떤 직업보다도 수준 높은 정직이 요구되는 하이클래스 예술이다. 가슴을 향해 정직해야 하고, 대본을 향해 정직해야 하며, 배역 속 인물의 삶을 재창조하기 위해 스스로에게도 정직해야 한다. 정직하지 않은 사람의 연기는 그야말로 미개함의 극치를 보여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