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미상

내 인생에 찾아온 깐부

머리 하얀 회장님과의 조우

by 전대표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이다.

모임에서 알게 된 분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일 오후 1시에 미팅이 있는데, 오실 수 있으세요?”

일정을 보니 시간이 괜찮다. 가능하다고 했다.

“그럼 트레비어에서 뵈어요.”

“알겠습니다.”

트레비어는 수제 맥주집인데.

어차피 난 술을 안 마시니깐 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우연한 계기로 알게 된 어떤 분에게서 내 사주를 본 적이 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셨지만, 37살을 기점으로 작은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재물복도 어느 정도 있을 거라는 말과 함께.

나는 사주팔자 같은 건 믿지 않는다. 대신 하나님을 믿고, 성경의 무오성을 존경한다. 토속신앙과 무당을 바퀴벌레만큼도 생각하지 않으며, 귀신이나 흉가 따위는 발가락의 때만큼도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과학적 원리에 입각한 사주팔자라는 것이 인간의 생로병사를 주관하거나 예측하기엔 역부족이라는 믿음이 내 마음속에 굳건하게 세워져 있다. 그저 인간이 만든 하나의 미신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고, 덕분에 지금도 50% 정도밖에 확신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주에 의하면, 37살을 기점으로 조금씩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때마침 내 인생에 어떤 변화가 생기고 있다는 것을 나 역시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었다.


재벌과 같은 큰 부자로 살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내가 원하는 인생의 모습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사람, 자본, 그리고 협력체라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 사이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많은 실패를 경험했으며, 숱한 고생을 해야만 했다. 2015년부터 올해까지, 손가락만 빨면서 지낸 시간들을 세어보자면 4,5년은 되지 싶다. 아내와 1년간 맞벌이를 하면서 연봉 1억을 겨우 찍은 것을 제외하곤 대부분 허덕이며 살았다.


잃은 건 돈뿐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나의 연약함을 자주 발견했다. 먹고사는 건 어떻게든 하겠는데, 그 이상의 발전을 이루어내기엔 나의 부족함이 늘 발목을 잡았다. 사업 감각이 없는 나, 영업력이 떨어지는 나, 소심한 나, 희생정신은 투철하지만 그 이상의 매력은 없는 INFJ-A의 나. 특히 2019년 11월부터 2020년 1월, 그 3개월은 희망을 찾아볼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이었다. 3번째 책이 계약되었고, 아들이 태어났으며, 3번째 책의 출간 계약과 동시에 4번째 책의 계약을 준비하던 때였지만, 일상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부자가 된다는 것은 너무나 멀게만 보였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시간이었다.

그런데, 우연인지 운명인지 모르겠지만, 언젠가부터 조금씩 신기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무렵부터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 이를테면 정치인들이나 금융기관의 이사장, 큰 기업체의 대표 등 소위 말하는 유지들과의 관계가 돈독해지면서 크고 작은 도움을 받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렇다 해서 삶에 이렇다 할 엄청난 변화가 생긴 건 물론 아니었다. 그들이 나한테 돈을 줄 리는 만무하고, 소심한 성격상 다른 사람의 돈을 빌려서 사업을 하거나 투자를 받는 식의 담대함과도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다만 내 마음에 '언젠가 내 인생이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는 때가 올 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는 항상 갖고 있었다. 어려워도 '지금은 과정이다.' 생각했고, 힘들어도 '지금은 때가 아니다.' 하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런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은.


다음날, 약속한 장소에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전 선생님, 제가 이제 출발하는데 조금 늦어요."

"네, 천천히 오세요."

통화를 마치고 가만히 앉아 있는데,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가 한 분 들어오셨다. 소박한 옷차림에 오래된 스니커즈. 흔한 동네 어르신이었고, 일행을 찾으시는 듯했다. 새파랗게 젊은 내가 저런 어르신과 무슨 관계가 있겠나, 싶어 가만히 앉아 천로역정을 읽고 있었다. 그때 다시 전화가 왔다.

"오늘 뵙기로 하신 분이 아마 도착하셨을 거예요. 머리 하얀 할아버지 계시죠?"

"아, 좀 전에 한 분이 들어오셨어요."

"네. 회장님이시니까 편하게 인사하시면 돼요. 거의 다 왔어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수천억 원대의 자산가를 만나는 순간이었다.

편안한 자리였다. 대화는 부드러웠고 요리도 훌륭했다. 그러나 초로를 훌쩍 넘긴 노신사와 우리가 나눈 대화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한 그루당 3억 원이 넘는 소나무가 수백 그루 심기워진 32,000평 부지 위에 넓게 펼쳐진 강가를 바라보고 있는 별장을 지어놓고 사는 회장님은 '어떻게 하면 현재 우리가 추진하는 사업을 완성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고, 우리는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쉽지 않은 질문에 대한 해답은 다음 미팅 때까지 생각해보기로 하고, 이야기를 마무리지었다. 우리의 회장님은 선팅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1세대 구형 제네시스를 타고 별장으로 복귀하셨는데, 뒷유리에는 '노인운전 죄송합니다'라는 빛바랜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그리고 어제 이른 아침,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아들 분유를 먹이고 있는데 진동이 울렸다. 이른 아침에 전화할 만한 사람은 없는데 진동인가, 싶어 봤더니 머리 하얀 할아버지 회장님이었다. 회장들은 아무나 만나지 않는다. 전화가 끊어지기 전에 받았고,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난 뒤 그분은 다짜고짜 내게 이렇게 물었다.

"미스터 전은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습니까?"

입 밖으로 꺼내어놓기는 민망하지만, 내가 추구하는 정확한 경제적인 목표는 있다. 꼭 사고 싶은 차도 있고, 죽기 전에 꼭 한번 살고 싶은 집도 있다. 사진으로 보여줄 수도 있다. 그러나 매일 1억씩 써도 죽기 전에 다 못쓸 만큼 상당한 재력을 가진 그분 앞에서 돈이 어떻고 저떻고 하며 이야기하는 것만큼 구차한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고 싶진 않았다. 아무렴 돈보다 중요한 일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다행히 나에겐, 평생에 걸쳐 완성하고픈 인생 목표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누가 봐도 감탄할 만큼 아주 훌륭한 목표였다. 돈벌이와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라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긴 하지만.

"저는 교육에 뜻을 두고 있습니다."

"교육? 어떤 교육?"

"교육도 종류가 많은데, 저는 리더를 만드는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회장님도 사업을 하시는 분이니 아시겠지만, 학벌도 중요하지만 실제로는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자 하는 의지, 마인드, 정신력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그런 리더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을 설립해서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는 죽 이야기를 했다. 대안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한 일, 학원에서 강사로 근무하면서 아이들을 교육한 일, 아프리카에서 만난 여자아이 등등, 교육에 대해 가지고 있는 나의 철학과 비전을 죽 이야기했다.

'그래요, 좋습니다.'하고 운을 뗀 회장님이 내게 이야기했다.

"미스터 전은 내 사업을 도와주세요. 그럼 나도 미스터 전이 하는 일에 투자를 하겠습니다."

그분은 3만 평이 넘는 자신의 땅에 지역주민들과 아이들이 함께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곳을 교육장소로 쓰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자연과 어울려 아이들이 뛰어놀고, 훌륭한 선생님과 함께 훌륭한 주제에 대해 의논하고 토론하며 자연을 즐길 수 있는, 그래서 한국 교육계에 획을 그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그분에게 이야기했다.

"회장님. 제가 도움이 닿는 데까지 회장님의 일을 도와드리겠습니다. 대신 회장님은 회장님이 살면서 익힌 리더십, 경영능력, 자원관리를 저에게 알려주십시오. 제가 지역의 리더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자문을 해주신다면, 저 역시 지역과 국가의 성장을 위해 일하겠습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그분은 "알겠습니다."하고 대답했고, 그렇게 우리의 계약은 성립되었다.


나폴레온 힐의 저서 <놓치고 싶지 않은 나의 꿈, 나의 인생>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어떤 분야에서든지 40세가 되기 전에 창조력을 최대한 발휘한 사람은 극히 드물다. 보통 창조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시기는 40세에서 60세 사이다. 수천 명의 남녀를 분석한 결과 밝혀진 사실이다. 그러므로 40세까지 실패한 사람이나 40세를 지나 이제 늙었다고 비관하는 사람들은 희망과 용기를 갖기 바란다. 일반적으로 40대에서 50대가 인생에서 가장 결실이 많은 시기다. 우리는 공포와 전율이 아닌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그 나이가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놓치고 싫지 않은 나의 꿈, 나의 인생 1권 246P, 나폴레온 힐, 국일미디어


인생이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진다고 느낄 때마다 아직 나의 시대는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스스로에게 용기를 불어넣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믿음이 아닌 이론에 불과한 용기였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래도 참 잘했다며 스스로에게 위로를 해주곤 한다. 그리고 그 결실이 맺어지는 과정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며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 내게 주어진다고 생각하니, 하루하루가 소망스럽고 감사하다.

내 인생에도 깐부가 찾아왔다. 그리고 그 깐부는 오징어게임 속 깐부가 아닌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기 위하여 노력하는 깐부이며, 내 인생에 동반자이며, 조언자이며, 투자자다. 백발의 깐부와 동행하며, 내 인생이 즐거움으로 가득 찬 시간들의 연속이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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