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사상을 계승시킨 제자 중 맹자가 있다. 그의 저서 <맹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天將降大任於斯人也
천장강대임어시인야
必先勞其心志
필선고기심지
苦其筋骨
노기근골
餓其體膚
아기체부
窮乏其身
궁핍기신
行拂亂其所爲
행불란기소위
是故動心忍性
시고동심인성
增益其所不能
증익기소불능
하늘이 장차 이 사람에게 큰 일을 맡기려 하면 반드시 먼저 그가 마음의 뜻을 세우기까지 괴로움을 주고 그 육신을 피곤케 하며 그 몸을 굶주리게 하고 그 몸을 궁핍하게 한다. 그가 하려는 바를 힘들게 하고 어지럽게 하는 것은 마음을 쓰는 중에도 흔들리지 않을 참된 성품을 기르고, 불가능하다던 일도 능히 해낼 수 있도록 키우기 위함이다.
-맹자 고자장구 하 15장
나는 삶의 행복지수가 상당히 높은 편이다. 길가에 핀 한송이 꽃만 봐도 행복을 느끼고, 날씨가 좋거나 따뜻해도 행복을 느낀다. 단순히 기분탓만이 아니었다. 언젠가 성향테스트를 해본 적이 있는데 행복지수와 희생지수가 만점에 가까울 정도로 높았다. 불면증과도 거리가 멀고, 우울증도 없다. 그런 성향은 회사생활에도 상당히 큰 영향을 미쳤는데,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거의 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장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어린 시절에는 그렇지 않았다. 공부는 뒷전이고, 항상 인상을 쓰고 다녔다. 교우관계도 별로 좋지 않았다.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도, 사람을 대하는 방법도 몰랐기에 어떤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젠가 만난 학창시절 친구가 나에게 "내가 아는 전준우는 이렇지 않았는데, 많이 달라졌네."하고 이야기한 적도 있었다.
25살 때, 나는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수 있는 놀라운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내가 흙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었다. 25살부터 지금까지 나는 인생이 한 줌 흙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결국 흙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에 한 조각의 의심도 해본 적이 없었다. 아무리 훌륭한 삶을 살고, 많은 부를 쌓고, 명예로운 여정을 밟아왔을지라도 결국은 흙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인지한다는 것이 인생에 상당한 즐거움과 큰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25살 때 처음 느꼈다.
사람마다 다양한 인생의 방향성이 존재하지만, 모든 사람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같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사람의 신용도는 그 사람이 가진 인품의 깊이에 비례하듯이, 내가 누구인가에 대해 진지한 성찰을 거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만들어가는 세상은 전혀 다른 결과를 맞이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글은 흙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흙은 세상이 창조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변화하지 않은 가장 원초적이며 본질적인 가치를 담고 있는 물질이다. 오직 흙에서 생명이 잉태되고, 새싹이 돋아나며, 자연이 만들어진다. 작은 새싹은 무럭무럭 자라서 나무가 되고, 열매를 맺으며, 새들이 지저귀는 쉼터를 만들 수 있다. 반면에 아스팔트에서는 새싹이 자랄 수 없다. 아스팔트 틈새에서 새싹이 자라는 것을 본 적은 있지만, 그마저도 아스팔트 밑에 감추어진 흙의 힘으로 자라나는 새싹이 아닌가.
흙과 같은 글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함없는 가치를 지닌다. 고전이 존경받는 이유다. 그러나 출간 즉시 고전이 되는 경우는 없었다. 어느 누구도 세상의 끝을 모르기 때문에 고전이 될 것인지, 의미 없는 단어의 조합을 엮은 종이 꾸러미에 불과한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오직 세월이라는 풍파가 증명하는 것이다. 의사소통을 위한 언어의 작용을 한다는 점에서 모든 글이 동일한 구조를 띠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글의 수준이 같은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글을 쓰고픈 용기를 가질 필요가 있다. 이충걸 작가처럼 필력에 있어서 타고난 재주를 가진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세상에는 나와 다른 재능과 창의력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은가? 다만 그 역시 꾸준히 글을 쓰지 않았다면 그토록 창의적인 글이 나올 수 있었을까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렇기에 일정 수준까지는 훈련에 의해 필력의 수준을 높일 수 있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글을 쓰고 책을 출간하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생각해봤을 때 작가라는 것은 참 재미있는 직업이다. 이름 앞에 작가라는 단어가 붙으면 끊임없이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풍기며, 그렇기 때문에 사고의 수준이 일반 사람들보다 앞서가는 존재일 것이라는 생각을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갖게 만들기 때문이다. 평상시 사용하는 언어의 수준과 온도가 남다르고, 일반적으로 경청에 익숙하다는 점에서 글을 쓰는 작가의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생각을 글로 풀어내고 시각화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예술가에 더 가깝다. 책을 출간한 사람들 뿐만 아니라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에게도 작가라는 호칭을 붙이는 이유다. 예술가적인 측면에서 생각해봤을 때 글을 쓰는 모든 사람을 두고 작가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셈이다.
경박한 글은 피할 필요가 있다. 무슨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 그 질문에 대해 유일하게 가능한 대답이다. 중국의 천자 우 임금은 누군가에게서 좋은 이야기를 들으면 그를 향해 절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우문선언즉배禹聞善言萴湃, 맹자 공손추장구 상 8장) 왕(王)은 한 나라를 이끄는 수장이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백성을 섬기는 위치에 있는 존재다. 왕으로서의 품위와 가치를 지니기 위해서는 반드시 백성을 섬기는 위치에 있어야 하며(全), 그제야 비로소 가장 훌륭한 인간으로서의 덕을 가진 왕으로 세움을 받을 수 있다. 왕王과 경박經薄은 거리가 먼 단어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는 나ego라는 왕이 산다는 말이 있다. 모든 사람에게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글을 쓸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존경받을 수 없는 글을 멀리 하고 신중에 신중을 기한 글로 삶을 채워나가지 않는다면, 자신의 나태함을 주목해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군주론 24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