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의 엄청난 후폭풍
미국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거의 클리셰처럼 등장하는 남자 유형이 있는데, 바로 관계를 정립하기를 극도로 꺼리는 회피형(non-committal) 남자입니다. 한국에서는 주변의 시선도 있고 해서 확실하게 정립되지 않은 남녀관계나, 혼인하지 않은 동거에 대해 부정적이지만, 미국에선 원나잇부터 시작해 남친/여친으로 가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고 굳이 문제 삼지 않습니다.
이런 문화를 대표하는 용어가 바로 악명 높은 시츄에이션십(situationship)인데 데이트도 하고 시간을 같이 보내지만 서로 간에 독점적인 계약은 하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즉 힘들 때 같이 있어줄 의무도 없고, 다른 데이트 상대를 만날 가능성도 있으며, 언제든 일방적으로 끝날 수 있는 틱톡 세대다운 휘발성 관계인 것입니다.
하물며 데이트 관계도 정립하기 싫어하는데 결혼은 더하겠죠? 미국의 혼인율은 1970년대에 정점을 찍은 뒤 현재는 절반으로 떨어진 수준입니다. 아직도 지방이나 소도시에서는 결혼을 많이 하는 편이지만, 대도시에서는 클릭 한 번이면 손쉽게 연애 상대를 찾을 수 있는데 일찍 결혼하는 건 손해라는 인식이 남녀 사이에 퍼져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30대 커플들 중 아무 소식이 없다가 갑자기 결혼을 서두르는 모습을 보인다면... 아버님의 샷건이 그 이유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고 쳤다는 뜻입니다).
물론 독실한 기독교 국가였던 미국이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유럽과 캐나다, 호주에서는 여성의 사회 진출, 인권 신장, 그리고 성혁명이 아시아에 비해 한 세대는 더 일찍 일어났고, 그로 인해 지난 반세기 동안 전통적인 연애, 결혼관에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왜 미국 남자들은 관계와 결혼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일까요? 그건 바로 관계를 정립하는 순간 결혼으로 갈 확률이 높아지는데, 예전에 비해 결혼의 실패 확률과 손실, 법적 후폭풍이 너무 커졌기 때문입니다. 실패의 기댓값이 적었다면 미국에 혼전계약서(Pre-nup) 같은 제도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예전에 비해서 상대를 믿고 결혼한다는 것이 사회적으로 어려워졌습니다.
미국의 모든 주에서는 책임이 없어도 이혼이 가능합니다. 버지니아, 뉴욕주처럼 일정 거주 기간이나 별거 기간이 필요한 주도 있는가 하면, 네바다주처럼 서류만 내면 10일 만에 이혼이 되는 주도 있습니다.
무책 이혼은 파탄의 이유를 굳이 묻지 않겠다는 뜻이어서, 어느 날 자고 일어났는데 내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이혼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제 지인 중에 이런 케이스가 있었고 아내가 별다른 이유 없이 "우리 안 맞는 거 같아"라며 이혼을 요구해 큰 고통을 받으며 결국 이혼하게 되었습니다.
이혼에 이유가 필요 없어졌으니 당연히 위 그래프에서 보듯이 이혼율은 올라갑니다. 즉 미국이나 캐나다, 호주에서 결혼한 사람들은 그날의 기분에 따라서 결혼 생활이 왔다갔다 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미국의 이혼율이 50%라는 통계가 많이 인용되곤 하는데, 근거가 약한 주장입니다. 매년 새로 결혼하는 부부의 수는 쉽게 알 수 있지만, "그중 몇 %가 결국 이혼했는지"를 추적 계산하기 어렵기 때문에 대부분 국가들이 인구 1,000명당 발생한 이혼수인 조이혼율(crude divorce rate)을 발표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주에서 이혼 통계를 발표하지 않는 곳도 캘리포니아를 포함해 5곳이기 때문에 미국의 이혼율은 정확하게 계산할 수 없다가 정설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측정이 불가한 것은 아니며, 인구 통계 대신 설문조사를 이용해서 추려볼 수 있습니다. 미국 인구조사국에서 2009년 "첫 결혼 상대와 아직까지 혼인해 있는지"를 조사했을 때 72%가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단, 나머지 28%는 이혼과 사별이 같이 포함된 수치입니다.) 여러 대학이나 기관에서 설문조사를 해본 결과 미국의 이혼율은 33-37% 정도로 집계되었으며 대체로 정확한 추측일 것으로 봅니다.
저 33%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지는 않으며, 성향, 직업, 소득 등 여러 변수에 따라 이혼 확률은 높아지기도 낮아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평균적으로 33%라는 말은 펼쳐질 확률이 1/3인 낙하산을 들고 뛰어내린다는 말이고 절대로 무시할 수 있는 수치가 아닙니다. 미국인들은 자라면서 부모, 친구, 이웃 등 주변에서 이혼한 사람을 꽤 많이 보기 때문에, 체감상으로도 이혼 확률이 높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결혼을 망설일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뉴스에서 빌 게이츠나 제프 베조스 같은 거물급 남성들이 이혼하면 꼭 언급되는 내용이 어마어마한 위자료입니다. 미국에서는 파탄의 책임이 있을 경우 한국과 달리 위자료에 상한선이 없기 때문에 징벌적 손해배상청구가 가능합니다. 대표적인 예로 타이거 우즈가 2010년 외도로 인해 이혼하면서 전 재산의 75%인 9,000억 원을 지급한 사례가 있습니다. 그 외에도 유사한 사례는 수도 없이 많고, 이혼 두 번만 하면 아무리 부자라도 재산이 반의 반토막 나는 일이 흔합니다.
또한 재산권에 한해서도, 한국은 혼인 중 각자의 명의로 취득한 자산은 별개로 보지만 캘리포니아주의 경우 부부공동재산으로 보아 50:50이 적용될 확률이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미국에서 살다가 이혼하는 한인 부부들이 법률 상담을 할 경우, 한쪽에 책임이 있거나 재산이 월등히 많으면 미국에서 이혼 진행하는 것을 추천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재산 분할, 위자료, 양육비 등 모든 면에서 미국법이 대체로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최근 한국에서도 이혼 후 양육비 지급을 더 강력하게 강제해야 한다는 기사가 나오고 있는데, 미국, 호주, 캐나다 등의 제도를 벤치마킹하려는 걸로 보입니다. 이 나라들은 한국에 비하면 훨씬 개인정보나 자유에 대해 민감한 자유주의적인 성향이지만, 양육비에 있어서만큼은 가차 없는 공권력을 동원합니다. 월급에서 자동 차감해 가는 것은 기본이고, 운전면허를 박탈하고 출국금지를 내리는가 하면, 실직했어도 양육비는 꼬박꼬박 지불해야 하며, 불이행할 경우 감옥에 넣어버립니다. 감옥까지 가지 않아도, 차가 거의 필수인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운전면허를 뺏는다는 것은 사실상 일상생활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선고나 다름없습니다.
물론 아이의 성장을 위해서 양육비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파산지경에 이른 사람에게도 계속 양육비를 강제하고 징역형까지 내리는 것은 사실상 채무자 징역(debtor's prison)이나 다름없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어, 최근 대법원과 일부 주에서 재검토 중입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대체로 여성이 양육권을 가져가기 때문에, 빠듯한 월급으로 양육비를 대다가 파산하고 감옥에 갇히는 남성들이 속출하면서 이러한 시스템이 진정 아이에게 도움이 된다고 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모든 불이익은 성별에 무관하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60-70%의 이혼 신청은 여성에 의해 제기되며, 양육비 이행 대상의 85%는 남성입니다.
종합해 보면:
이혼하는데 이유도 필요 없고,
높은 확률로 이혼하며,
본인 명의 재산도 분할 대상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으며,
파산하거나 감옥에 갈 때까지 양육비를 무조건 대야 하는
자칫하면 인생 나락이 아니라 감방에 갈 수 있는 결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알면 우리는 이제 왜 아래와 같은 짤방이 생기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위 쇼는 서로 논쟁 중인 부부를 데려다 공개적으로 친권자 여부를 확인해 주는 Maury Show인데, 여기서 친부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펼쳐지는 남성들의 리액션이 밈 수준으로 유명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남성들은 감옥에 넣어질 수도 있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위험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약속하는 미국, 캐나다, 호주 남성들은 아주 큰 결심으로 프러포즈를 하는 것이니, 여성들이 감동해서 눈물 흘리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