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우의 언덕길을 오르며
나는 아주 어릴 적 도봉구 쌍문동에 살았었다. 둘리의 고향인 쌍문동에는 서울답지 않게 수풀이 무성했고 조금만 노력하면 포켓몬고 마냥 하늘소, 풍뎅이, 잠자리 같은 다양한 곤충들도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북한산을 끼고 있어서 언덕길이 참 많았다. 콘크리트 담 위로 삐죽삐죽 거칠게 자란 수풀은 나에게 쌍문동 그 자체였다. 하지만 유치원을 마치고 우리 가족이 이사를 떠난 뒤 나는 쌍문동에 다시 가보지 못했다.
2011년 나는 히우 지 자네이루로 여행을 떠났다. 숙소는 지인들이 추천해준 라파(Lapa) 근처로 잡았다. 쌈바 공연을 한 곳에서 다 볼 수 있다고 해서였다. 나의 작은 호스텔은 산타 테레사(Santa Teresa)라는 언덕 동네 초입에 있었다. 첫날밤에는 공연을 보고, 그다음 날 낮에 느지막이 일어나 언덕길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완만했던 언덕길은 올라갈수록 가팔라졌다. 그때는 아이폰도 구글 맵도 없었기에, 지도 한 장에 사인펜으로 표시만 해놓고 일단 걸어가 보는 게 여행이었다. 올라가다 보니 집들 사이사이로 가게도 한 두 개씩 보이고, 작은 마을버스 같은 것도 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의 눈을 사로잡았던 건 길가에 자란 수풀이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그 광경을 한참 올라가면서 생각해 보니, 바로 나의 어릴 적 쌍문동의 모습이었다. 언덕길 담 사이로 마음대로 자란 나무와 잡초, 풍성한 초록색이 지구 반대편에서 내 뒤통수를 때리고 지나갔다. 화단이 자연에 대한 인간의 승리라면, 산타 테레사(그리고 쌍문동)의 담은 자연에게 자리를 내준 명백한 인간의 패배였다. 아니 패배라는 오만한 단어 대신 후퇴라고 해두자. 인간은 모두 자연에 언젠가 패배하니까. 관리하지 않은 도시의 자연은 그래서 우리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웃집의 깎지 않은 잔디 또한 두려워한다. 자연은 우리를 향해 천천히 진격할 것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미셸 드 몽테뉴가 말했듯이, 인생의 마지막 날까지 잡초를 고르는 정도뿐이다.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간 데 대한 보상은 히우 시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천연의 전망대였다. 달동네는 싫어하고 고층 주상복합은 좋아하는 도시인들을 꼬집으며 한 쌈비스타는 이렇게 노래하기도 했다.
달동네엔 고층빌딩의 행복이 필요 없어요
거기 사는 사람들은 이미 하늘에 가까우니까요
쌈바 음악의 가사에 바다 대신 산이 많이 나오는 까닭도 거기서 알게 되었다. 그들에게 바닷가가 보이는 집이라는 여유가 있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산타 테레사의 주민들은 덕분에 마천루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아름다운 일출과 일몰을 보는 호사를 누리고 있었다. 동네가 유명해져서 땅값이 더 올라가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전망을 즐기고 올라가려던 찰나, 옆집에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이 가 보니 중년의 여자와 3-4명의 음악가들이 기타와 판데이루(탬버린의 일종)를 치며 노래하고 있었다. 나는 철창으로 된 문 바로 앞까지 다가가 계속 음악을 감상했다. Canto de Ossanha. 아는 노래였다.
오직 새 사랑의 아침에 별이 떠오르는 것을 보기 위해...
노래가 끝나고 박수를 쳐주자 그중 한 명이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나는 뭔가에 홀린 듯 그들의 테이블에 둘러앉아 어느새 그들의 일행이 되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안타깝게도, 그때는 브라질 음악을 많이 알지 못했었다. 나는 기타를 칠 수는 있었지만 자신이 없었고 그냥 여행자의 마음으로 몇 곡을 더 감상했다.
낮의 즉흥 잔치가 끝나고, 클라리넷을 불던 친구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의 이름은 이반이라고 했다. 칠레에서 음악 유학을 왔다는 이반은 브라질의 전통 기악곡인 쇼루를 공부하며 산타 테레사의 하숙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와 나는 짧은 영어와 포르투갈어를 섞어가며 대화를 이어갔다. 이반은 그의 방도 구경시켜 주었다. 내가 들어갔던 집이 4-5명가량이 같이 사는 하숙집이었던 것이다. 방은 예상대로 매우 좁았고, 누울 자리와 앉을 자리 정도만 있었다. 이반은 그럼에도 꽤 긍정적인 웃음을 띠고 자신의 하숙집을 소개해주었다. 같이 사는 친구들도 모두 비슷한 환경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속으로 브라질로 음악 유학을 오는 사람들도 있구나 하고 신기해했다.
날이 저물어 갈 때쯤, 이반은 맥주를 사러 같이 가자고 말했다. 그를 따라간 곳은 작은 동네 슈퍼였고 이반은 냉동고에 손을 넣어 Cintra라고 적힌 큼지막한 캔 네 개 정도를 꺼냈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이 맥주를 친구들과 제일 많이 마신다고 말했는데 그 이유는 다른 게 아니고 제일 싸서였다. 하숙집으로 돌아와 딴 Cintra 맥주는 안 그래도 밍밍한 브라질 맥주보다 두 배는 더 밍밍했다. 아마 한 캔에 몇백 원 하는 물탄 맥주가 아니었을까. 싸구려 맥주를 마시며 이반은 이미 해가 진 히우 시를 배경으로 클라리넷 한 곡을 더 들려주었다. Odeon이라는 매우 어려운 곡을 그는 능숙하게 연주했고 나의 기타는 멜로디를 겨우 따라가는 정도였다. 그 날 내가 하숙집을 언제 나왔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확실한 것은 그 집에 언젠가 다시 가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아쉬운 발걸음을 집으로 향했었다.
그로부터 7년은 족히 흐른 후, 나는 히우를 다시 방문했다. 월드컵과 올림픽이라는 역대급 축제를 연달아 치러냈지만 도시는 크게 바뀐 것이 없었다. 달라져서 좋은 점이라면 자전거 대여 스테이션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고, 우버가 생겼고, 나에게 최신 아이폰이 있었다는 정도였다.
히우에서의 마지막 날, 나는 잔뜩 기대를 하고 산타 테레사를 방문했다. 목적지는 산타 테레사 꼭대기에 위치한 레스토랑이었다. 우버를 불러 싼값에 타고 올라가는 산타 테레사는 너무나 편했다. 그 하숙집도 지나쳤지만 연주하는 사람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나에게 싸구려 맥주를 사준 클라리네티스트 이반은 아마 더 좋은 데로 갔겠지. 나를 태운 경차는 힘겹게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미쉘린 가이드에도 나왔다는 격조 있는 레스토랑의 분위기는 압도적이었다. 2층의 야외 테라스로 구성된 그곳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을 내려가서야 데스크에서 자리를 안내받을 수 있었다. 산타 테레사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었다. 나는 히우가 내려다보이는 테라스에 앉아 바이아 지방의 전통 해물 요리인 무께까를 시켰다. 향신료가 많이 들어가는 해물찌개인 무께까지만 고급 레스토랑의 입맛에 맞게 변형된 착한 맛이었다. 큰 감흥은 없었다. 해가 질 무렵 나는 비행기 시간에 맞춰 우버를 다시 불렀다.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레스토랑의 정문에는 끊임없이 젊고 패셔너블한 브라질 남녀들이 우버를 타고 도착했다.
언덕길을 내려가면서 본 히우의 일몰은 변함없이 아름다웠지만 쓸쓸했다. 나는 분명 같은 장소에 왔는데, 나도 산타 테레사도 너무 달라져 있었다. 그 옛날 이반과 마셨던 싸구려 맥주, Cintra는 더 이상 찾아볼 수도 없었고 그걸 팔던 작은 슈퍼들도 마찬가지였다. 골목길도 훨씬 정돈되고 깨끗해져 있었다. 산타 테레사는 더 이상 쌍문동이 아니었고 쌍문동도 아마 더 이상 산타 테레사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강물에 손을 넣었다가 다시 담그면 같은 강물이 아니듯이, 시간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류시화 시인은 떠나온 것은 나 자신뿐이라고 말했는데, 나는 지도를 펴들고 언덕길을 걷고 싶어하는 나를 산타 테레사에 두고 그곳을 떠나왔는지도 모른다. 내가 어려운 Odeon을 연주하기 위해 몇 달 정도를 애썼던 이유는 아마 그때의 기억을 조금이나마 붙들어보려던 발버둥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