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브라질에서 켜진 그린라이트

가지 않은 길

by 브라질소셜클럽

히우 지 자네이루에 쉬러 가고 싶으면 코파카바나나 르블롱, 이파네마를 가면 된다. 하지만 히우의 밤만은 라파에서 보내야만 한다. 쌈바의 중심지인 라파(Lapa)에 있으면 복잡하게 고민할 필요가 없어진다. 해가 지면 흰색의 아치형 수로를 따라, Mem de Sa 길에 있는 공연장들이 하나둘씩 문을 열기 시작하고 학생부터 노인까지,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모두 라파로 모여든다. 이파네마의 소녀를 듣고 이파네마에 공연장이 많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라파의 흰색 수로(Arcos da Lapa)는 히우 음악과 젊음의 상징이다. 월드컵을 앞두고 히우 시가 가장 빡빡 닦은 건물 중 하나가 바로 이 수로였다.


히우 사람들은 안다. 이 건물이 절대 하얗지 않았다는 것을


브라질의 공연은 대개 밤 10시가 다 되어서야 시작한다. 나는 오전에는 늦게 일어나 미술관이나 해변가, 상점들을 구경하다가 5시쯤 들어와서 낮잠을 자고 9시에 집을 나와 새벽에 들어오는 한량짓을 3일 내내 계속했다. 그렇게라도 자두지 않으면 밤새 흥겨운 쌈바 공연을 못 볼 것 같았다. 하지만 첫째 날 나는 그걸 몰랐고 8시쯤 일찍 공연장 Bar Semente 근처로 걸어가 보았다. 한 시간 전인데도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인기척 하나 없었다. 나는 라파의 수로 옆 계단에 주저앉아서 생각했다. 브라질에서 뭔가에 일찍 가면 이렇게 되는구나.




내가 계단에 혼자 앉아있으니까 저기 옆에서 물건을 팔던 흑인 할아버지가 와서 말을 걸었다. 드레드 머리를 한 프리하게 생긴 할아버지는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저 멀리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술을 한잔 사주겠다고 나를 데리고 골목으로 들어갔다.


브라질 뒷골목을 막상 들어가니 겁이 났지만 안쪽을 보니 작은 포장마차 같은 바들이 성업 중이었다. 그는 적은 돈을 내고는 나에게 브라질 전통술, 까쌰싸 한 잔을 사주었다. 바 주인은 까쌰싸 "미네이라(Mineira)"라는 말을 강조했다. 나는 그게 비교적 좋은 품질의 술이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흔들어만 봐도 소주와는 급이 다르게 진해 보이는 까쌰싸를 입에 넣으니 구내염 치료제를 원샷한 것 같은 강렬한 느낌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할아버지는 흐뭇하게 웃었다. 내가 쌈바를 들으러 Bar Semente에 간다고 하니까 대견해서 사줬던 것일까? 아님 한국의 외국인 김치 먹이고 반응 관찰하기 같은 맥락인가? 여하튼 40도가 넘는 샷을 마시자 포르투갈어 실력이 급격히 늘었고 나는 수로 근방에 앉아 브라질 사람들과 웃고 떠들다가 공연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뭔 얘기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바로 이 가수, Nina Wirtti의 공연이었다.


Bar Semente에서는 정통 쌈바와 파고지를 아름다운 여성 보컬의 바로 앞에서 들을 수 있었다. 놀라운 것은 2부가 되자 보컬을 제외한 다른 음악가들이 하나둘씩 바톤터치를 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놀러온 줄 알았던 사람들은 악기를 넘겨받고 2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모두의 악기를 모두가 다룰 줄 알았다. 무대가 없는 공연의 눈높이는 관객과 똑같았고 음악가들은 숨 쉬는 것처럼 익숙하게 밤새도록 쌈바 연주를 해나갔다. 이곳은 Carioca da Gema와 함께 히우에서 나에게 가장 기억에 남은 공연장 중 하나였다.


안타깝게도, Bar Semente는 2017년에 문을 닫았다고 들었다. 쌈바도 어쩔 수 없이 나이가 들어가는 음악인가 보다.




1.jpg 이런 느낌의 호스텔 뒤뜰이었다.


히우에서의 마지막 날 밤은 호스텔 앞 야외 식탁에 둘러앉아 맥주를 마시며 사람들과 기타를 쳤다. 라파답게 그 지역의 호스텔들은 대부분 기타와 악보 책이 있었고 음악가들이 놀다 가기도 하는 살아있는 유기체 같았다. 해는 지고, 맥주병은 식탁에 수북이 쌓여 가고, 너도 나도 노래 한 곡 뽑는 정겨운 히우의 밤이 깊어갔다. 나는 당시 쌈바 레퍼토리를 많이 몰랐지만 악보를 보고 그런대로 기타를 칠 수 있었다. 외국인들은 많이 간과하지만, 브라질 사람들이 모두 노래를 잘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한국보다 음치, 박치가 많아 보였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들은 못하건 잘하건 모두 노래를 하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열성을 다해 노래하는 사람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브라질의 시인이자 작곡가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Vinicius de Moraes)의 노래를 부를 때 즈음, 호스텔의 마담 같아 보였던 여자는 나에게 이렇게 물어보기도 했다.

"브라질에 서점이 많이 없어 보이죠?"
"정말, 많이 못 봤네요."
"브라질에서는 시인과 작가들이 모두 노래를 썼기 때문이에요."

그녀가 지어낸 말인지 브라질에서 떠돌던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말에 100% 동의한다. 브라질 문학의 정수는 노래라고.


호스텔의 작은 정원 콘서트에는 어느덧 동네 사람들이 대여섯 명 모여들었고, 그중에 산타 테레사 언덕에서 놀러 왔다는 여자 셋이 참 인상적이었다. 금발 한 명, 갈색머리 한 명, 흑발 한 명. 다 각자의 모습대로 아름다웠고 나는 아무도 시키지 않은 고민을 마음속으로 하고 있었다. 이미 들어오면서 인사로 볼뽀뽀를 받을 때부터 마음을 뺏겼던 것이다. 우리는 시인 비니시우스의 노래를 한 곡 더 불렀다.


나는 그대를 사랑할 거란 걸 알아요
내 인생 전부...


저렇게 절절하게 가사를 써 놓고 비니시우스는 평생 열한 번을 결혼했다며 여자들은 웃었다. 그래도 브라질 사람들은 비니시우스를 사랑한다는 말도 빼놓지 않고. 새벽이 되어서야 우리는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금발의 여자는 나에게 내일 밤 산타 테레사 동네에서 비슷한 파티가 있는데 꼭 와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여행 계획대로라면, 내일 아침에 상파울루로 가는 버스를 타야 했다.


내 얘기를 들은 그녀는 가까이 다가오더니 작별인사를 하는 척하면서 손바닥을 너무 자연스럽게 내 가슴에 갖다 댔다. 한 손으로 내 심장 부근을 살살 문지르면서 그녀는 브라질 여자 특유의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꼭 올 거지?"


8.png 브라질 국기는 초록색이니까 그린라이트


내 인생의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나 있었고, 몸이 하나이니 두 길을 다 가 볼 수는 없었다. 나는 고민 끝에 선택을 내렸고, GQ 칼럼이 아닌 전체이용가 브런치에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기껏 간 상파울루가 히우보다 재미없었기 때문에, 그때부터 나는 상파울루를 싫어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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