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세권이나 슬세권처럼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에게 도세권은 꼭 권하고 싶은 지리적 위치다. 집 가까이에 도서관이 있어 내집처럼 드나들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다. 요즘은 지역마다 작은 도서관이 활성화되어 있어 책을 빌려 읽을 수 있을 뿐더러 여러가지 강좌도 함께 들을 수 있는 경우도 많다. 어려서부터 도서관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 수 있는 것도 특별한 경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이들에게 책을 넉넉하게 사주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한다. 요즘 엄마들은 아이들의 책을 직접 골라 사주기보다 도서관에서 한보따리씩 빌려다준다. 대출기한 안에서 최대한 많은 책을 빌리고, 반납한다. 읽을 수 있는 기간이 한정되어 있는 책을 봐야 한다는 것은 독서의 즐거움을 느끼기 전에 숙제와 같은 부담감을 갖게 될 가능성이 더 크다. 또, 빌렸을 당시에는 읽고 싶지 않다가 나중에 읽어보고 싶었을 때 못 읽게 될 경우(엄마들은 한번 빌린 책보다 새로운책을 빌리고 싶기에)가 생길 수도 있다. 김영하 작가가 책은 읽으려고 사는게 아니라, 사놓은 책 중에 읽은 것이다라고 우스개처럼 한 말은 농담이 아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의 공통점 중 하나는 한권의 책을 여러번 읽고 또 읽어본 적이 있다는 것이다. 만화이든, 소설이든, 어떤 장르의 책이든 상관없다. 좋아하는 책을 몇쪽 몇째줄에 어떤 내용이 적혀 있는지 머릿속에 그려질 정도로 읽었던 경험이 있다면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나도 어릴 적에 좋아했던 <초원의 집>시리즈가 또렷하게 기억난다. 특히 돼지오줌보를 가지고 놀이를 하던 장면이나 새떼의 습격으로 밭이 초토화가 되는 장면은 삽화까지 모두 기억이 난다. 외우다시피 책장이 닳고 닳을 정도로 책을 읽어보았던 기억을 지닌 사람은 언제든지 책과 사랑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독서항체가 생성된 것이다. 또, 우연히 책장에 꽂힌 책 한권을 기대하지 않고 꺼냈을때 생각보다 너무 재밌어 폭 빠지게 되는 경험도 특별하다. 열람시간이 정해져있는 도서관에서나 대여기간이 정해져있는 책을 읽는 것보다 편안하게 소파에 누워서, 잠자리에서, 간식을 먹으며 책을 읽으면 그 맛이 배가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매일 캔맥주만 마시다가 풍미가 깊은 수제 맥주를 먹는 것 같달까.
어쩔 수 없이 읽어야만 해서 하는 독서와 좋아하는 책을 실컷 읽을 수 있는 독서를 했던 사람 중 어느 사람의 인생이 책과 더 오랜 시간 함께하게 될까. 곰곰히 생각해본다. 단지 많은 것을 알고 학습에 도움이 되는 독서를 원하는가? 아니면 평생 책을 곁에 두고 즐기는 사람이 되길 원하는가? 물론 우리는 두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고 싶다. 하지만 어차피 두마리 토끼를 잡을 수 없다면 나는 후자에 한표를 던진다. 평생 책을 곁에 두고 즐길 수 있다면 내가 어디에 있던 간에, 코로나19로 집콕만 해야 하는 순간에도 사유의 스펙트럼은 한없이 넓어질 수 있다.
언젠가 tvn의 <미래수업>을 보고 있는데 강연자에게 한 패널이 '코로나 시대에 아이들의 사회성을 어떻게 키워줄 수 있을까요'라고 질문했다. 강연자가 누구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데 대답만큼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다름아닌 '책을 읽어라'였기 때문이다. 친구들과 만나고 부대끼고 어울려야 하는게 당연하지만 그럴 수 없으니 빨간머리앤이나 허클베리 핀, 혹은 몽실언니와 친구가 되는 것으로도 사회성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이다. 625전쟁을 겪고 있던 또래의 어린 소녀와의 소통이나 교감으로도 사회성이 커질 수 있다. 이 답변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책을 많이 읽어라'고 말하지 말고 그냥 꾸역꾸역 집 안에 책을 쌓아 놓자. 아이가 게임도 실~컷 하고, TV도 볼만큼 다 봤고, 유투브의 구독한 채널 모두 싹 훑은 다음이라도 좋다. 아이의 잉여시간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수 있게. 언제라도 책을 만날 수 있게 늘 준비를 해두어야 한다. '오늘까지 안읽으면 연체되잖아' 라거나 '이거 얼마짜리인데 좀 읽어라', '옆집 누구는 이것도 읽었더라' 라는 등의 잔소리는 일체 금물이다. 화장실에 들어갈때 책을 가지고 들어간다고 변비가 생기지 않는다. 그건 그냥 그 사람의 체질일 뿐이다. 많은 책을 사는 게 부담스럽다면 1달 이상 대여가 가능한 유료사이트를 이용하거나, 중고로 사거나, 구매를 했다가 시간이 충분히 지난 후에 당근마켓이나 중고서점에 되파는 방법도 있다. 도서관이 근처에 있는 도세권은 특별하지만, 우리집이 도서관 그 자체라면 그것보다 좋은 게 또 어디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