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2시 30분, 혹은 모호한 대상에 관하여

생각의 서고 33화

by 소는영

0.


새벽 2시 30분. 외마디 비명을 동반한 고통. 그것은 오늘도 나를 엄습했다. 휴대폰에 흘러나오는 저주파 음악의 재생시간을 보니 2시간 정도 잔 것 같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하루의 시작이다. 하지만 악몽의 빈도는 점점 잦아지고 있고 그 이미지는 점점 구체적으로 현출(現出)되고 있다. 심장박동수 역시 높았고 이불은 이미 식어버린 땀으로 잔뜩 적셔져 있었다. 목은 메말랐고 거기서 파생되는 이물감은 역겹기 그지없었다.





1.


두뇌는 태연히 천진난만하게 어지럽고 복잡한 세계관을 구축해놓은 채 에게 기억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만약 두뇌녀석이 이왕 칭찬을 듣고 싶어 잔뜩 내 속을 어지럽혀 놓은 거라면, 기꺼이 청소해주겠다. 오늘도 나는 기록하고자 컴퓨터 모니터 앞에 선다.





2.


프로이트. 그는 애도와 멜랑꼴리를 구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애도는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분명하지만, 멜랑꼴리는 무엇을 잃어버린 것인지조차 불분명하다고. 마치 "대상이 있는 공포와 대상이 없는 불안의 차이처럼".


나는 이 말을 읽으면서 문득 내 악몽들을 떠올렸다. 거기엔 분명 무언가 상실이 있었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가족이었을까? 아니면 나 자신이었을까? 혹은 더 근본적인, 이름 붙일 수 없는 무언가였을까?




3.


꿈. 오늘 하루도 끔찍했다. 크게 두 가지로 대분(大分)할 수 있는데, 하나는 집안 구성원들이 외딴 지역에서 나를 버리는 내용이었고 다른 하나는 나의 누나가 내 머리를 유리병으로 때리는 걸 담고 있었다. 하나같이 기괴했다. 평소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조합의 향연이었으니 말이다.


왜 하필 엄마, 큰누나, 작은누나 이 세 명이었는지, 왜 그들은 나를 외딴곳에 버렸는지, 왜 작은누나는 내 머리에 소주병과 맥주병을 세게 휘둘렀을까, 왜 큰누나는 나의 말을 믿지도 않은 채 비아냥과 조소를 한 것일까, 왜 그들은 나를 거짓말쟁이로 몰아간 것일까.


어느 것도 명확하지 않았다. 소설 속 장치인 열린 결말도 이것보단 더 친절할 텐데 그런 점에서 내 두뇌는 매우 오만하고 불친절했다. 나는 힌트가 더 필요했다. 최대한 그 이유를 찾아보고자 한다. 일련의 작업은 현실의 청소작업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니까.


'꼬맹이 두뇌씨'가 만들어 놓은 난장판을 정리하는 건 언제나 '다 큰' 내 몫이다. 차이가 있다면 그 내용물이 회색빛만 비추는 레고(LEGO)라는 점, 온갖 다양한 모양을 한 채 그들 자신을 치워지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점 정도였을 뿐.





4.


라캉은 프로이트의 멜랑꼴리 이론을 재해석하면서 두 가지 대상을 구분했다. 하나는 욕망의 대상이고, 다른 하나는 욕망의 원인이다. 애도에서 상실되는 것이 전자라면, 멜랑꼴리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후자다. 그 대상은 상징적 질서 속에 제대로 기입되지 못하고 "주체의 주머니 속에" 남아있는 것, "욕망의 광채를 상실한", "쓰레기통에 내던져진 찌꺼기"로서의 대상이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내 꿈속의 나를 생각했다. 거기서조차 나는 항상 버려진 존재였다. 이국의 버스 안에서도, 낯선 방 안에서도, 부엌 바닥에 쓰러진 채로도. 나는 언제나 버려진 것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가족에게 버려진 것이 아니라,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버려진 것이었다. 마치 내가 애초부터 쓰레기통에 내던져진 찌꺼기였던 것처럼. 그리고 그것을 아무도 주워주지 않는 것처럼.




5.


이국의 정취. 나는 외국에 나가본 적이 몇 번 없다. 그럼에도 오늘의 첫 번째 무대가 어떤 상태였는지, 어디를 배경으로 한 지 알 수가 없었다. 외딴 나라의 버스 속에서 온갖 물건들을 바리바리 챙겨둔 가방을 맨 한 남자. 어떻게든 손잡이에 묻은 먼지를 놓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버스의 매연은 어떻게 된 모양인지 제대로 감축되고 있지 않았다. 버스 안 승객들의 얼굴까지 번진, 비사먼지의 모습에서 문득 목탄파스텔이 떠올랐다. 카메라의 시점이 가방을 맨 그 남자로 이동한다.


나는 안경알을 닦기 위해, 주머니에 넣어둔 닦이용 헝겊을 꺼내 서둘러 시력을 복구하고자 했다. 문득 만져진 휴대전화도 꺼내는 김에 같이 로드(Load)했다. 부재중 전화 0통. 어디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창가 밖은 보이지 않았고 버스는 다음 정류장을 향해 녹슬고 거대한 몸뚱이를 옮기고 있었다. 주변의 시선들은 제각각의 모습을 한 채 그들 자신의 역할에 몰두하고 있었다. 휴대전화를 열어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어보고 있다. 엄마도, 작은누나도, 큰누나도 모두들 부재중이었는지 연락이 통하질 않았다.





6.


불안했던 건가. 그는 세 차례에 걸쳐 연락을 취해보았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다음 정류장의 알림이 뜨자 표정이 굳어졌다. "겨울은 수확할 수 없는 계절"이라 조그맣게 수군거리는 혼잣말은 무대 밖 관중들에게 애처로운 자기 위안으로 인식되었다. 그는 다시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가방이 닿은 어깨에 힘을 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정류장은.."


프로이트는 멜랑꼴리의 대상을 자아 그 자체라고 설명했다. 외부 대상이 아니라 자신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매우 모호한 설명이다. 자아의 상실은 "보이지 않는 것"의 "보이지 않는" 상실이니까.


언제, 어떻게 자아를 잃어버리는가? 그것은 의식할 수 있는 상실이 아니다. 애도의 대상 상실이 의식적인 상실이라면, 자아의 상실은 언제나 무의식적인 상실이다. 우리는 자아가 상실되었기 때문에 멜랑꼴리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멜랑꼴리하기 때문에 자아가 상실된 것임을 알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7.


나는, 버스 안의 를 보면서 생각했다. 저 사람은 무엇을 잃어버린 걸까? 가족들과의 연락이 끊긴 것? 아니면 더 근본적으로, 자신이 가족에게 속한다는 감각 자체를 잃어버린 것? 전화를 세 번이나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어쩌면 애초부터 그들과의 연결이 끊어져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행위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끊어진 연결 속에서,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불확실해지는 것이다.


"겨울은 수확할 수 없는 계절" 그 혼잣말 속에는 어떤 체념이 담겨 있었다. 봄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 하지만 봄이 정말 올까? 멜랑꼴리한 사람에게 봄은 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계절의 순환 자체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징적 질서가 제대로 기입되지 않았으니까. 대상이 상실되었기에, 대상들의 연쇄 속에 자리 잡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그는 영원히 겨울 속에 머무른다. 수확할 수 없는 계절, 죽음도 삶도 아닌 어떤 중간 상태 속에서.





8.


두 번째 무대. 뭔가 익숙했다.


하늘색 벽지로 꾸며진 자그마한 방. 성인 혼자 누울 수 있는 싱글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누리끼리하게 더럽혀진 배경이 눈에 띈다. 아니, 그냥 노란색이 컨셉인 하늘을 표현한 걸지도 모른다. 태양도 노란색이니 말이다. 침대에서 허리를 세워 직각으로 앉아 주변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왼편에는 작은 유리 책상이 있었고 그 옆에 온갖 종류의 책들이 진열돼 있었다. 오른쪽엔 하얀 문이 있었고 바로 그 주변에 전신거울과 작은 옷장이 비치돼 있었다.


어안이 벙벙한 상태에서, 나는 고통을 호소했다. 왼쪽 손목부터 손가락 마디까지 피가 통하지 않았는지 저리기 시작했다. 오른쪽 넓적다리에선 미세한 경련이 감지돼 복구작업이 긴요했다. 곧 전신통증으로 변모할 것이 뻔했다. 아픔은 곧 외마디 비명이 되어 메아리치기 시작한다. 5분이 지나도 아무도 와주지 않자, 직접 나서기로 했다. 문 앞에 서서 손잡이를 천천히 돌리기 시작한다. 겉보기와 다르게 나무문이 아닌 철문이었다.


끼익거리며 느리게 그 위세를 선보인 철벽이 마침내 그 내용을 보여주기에 이르렀다.





9.


문 밖을 나서니 오른쪽엔 화장실이 있었고 바로 앞엔 4명 정도 되는 어린 아이들과 그들을 통솔하는 교사로 보이는 이가 있었다. 단언컨대 엄마는 아니었다. 그녀보다 젊었기 때문이다. 그가 누구인진 당장은 알 수 없었기에 일단은 시급한 문제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통증이 본능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왼쪽으로 시선을 돌려 거실·부엌으로 몸을 움직였다.


멀리 있는 외딴 방에서 들려오는 자그마한 TV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이 있는지 알 수는 없었으나 누군가 보고 있는 건 분명했다. 모든 감각이 통증으로 집중되니 미세한 것 하나하나가 스트레스로 다가왔기에, 작은 인기척 하나쯤 파악하는 건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온몸에 퍼진 부정적 신호가 비명을 산출했다. 너무도 아팠다. 쓰러진 채 거친 숨을 밖으로 내뱉음과 동시에 욕설이 쏟아져 나왔다. 잠시 후 각각의 방에서 2명의 여성이 나온다. 내 누나들이 그 여배우 역을 자청한 것이었다.


작은누나로 보이는 이가 아이들 방에서 나왔고 큰누나는 TV방에서 나왔다. 어째서 엄마가 보이지 않았는진 모르겠다. 작은누나의 표정이 매우 뒤틀린 채로 쓰러진 나를 한심하게 쳐다본다.


"저거 또 시작이네." 어떻게 하면 사람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있는지 잘 아는 사람이었다. 촌철살인이 이런 거였을까.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나의 모습에선 이질감이 느껴졌다. 현실의 와 너무도 달랐기에 그렇다.


나는 잘못한 게 없었다. 아니 아파서 쓰러졌고 도움을 요청하는 게 그렇게나 질타받을 행동인가. 게다가 저 태도는 또 뭐지. 내가 알던 사람이 맞았나. 최대한 머릿속에 있는 단어들을 뇌까리며 사태파악에 나섰으나 고통이 내 머리를 세게 후려쳤다. 한 상태로 그들을 쳐다보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큰누나는 양팔을 모은 채 아무 말 없이 나를 쳐다본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 화폭의 물감을 보충하지 않은 상태였는지 단지 흑칠된 채로 남겨져 있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분명히 그녀였다. 차이가 있다면 데시벨이 낮아서 뭐라고 말하는지조차 제대로 알기 어려웠다는 점이랄까.





10.


나는 천천히 허리를 세워 어떻게든 억울함을 하소연하고자 입을 연다.


"내가 그런 게 아니야."


"또 거짓말하는 거잖아. 안 아프면서 아픈 척하는 건 꼴도 보기 싫다. 꺼져라"


아. 이 자는 정말 듣기 싫은 말만 골라서 한다. 어떻게든 내가 아프다는 것을 설명하고 싶었다. 5분 동안 의미 없는 공방전만 한 뒤, 잠시 후 작은누나가 부엌에 있던 관상용 맥주병과 소주병에 시선을 옮긴다. 오른손에 잡힌 맥주병. 그건 고스란히 내 머리로 내려쳐진다.


쨍그랑.


갈색 유리파편과 붉은 선혈이 부엌바닥을 적신다. 고통스런 외마디를 내뱉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한 채 곧바로 소주병이 나를 강타한다. 연녹색의 자질구레한 파편조차 나보다 권한이 더 많아 보였다. 적어도 그들은 색깔을 드러내기 위해 허락받을 필요도 없었으니까.


시야가 흐려지는 줄 알았으나 오히려 더욱 또렷했다. 어느새 전신의 통증은 모두 두피로 집중돼 고통스러운 역할을 마음껏 뽐내고 있었다.


아.


제대로 앉아 있는 것조차 힘들어 몸을 바닥에 던져놓았다. 한심한 말을 내뱉고 작은누나는 다시 그녀가 있던 아이들방으로 간다.


"선생님. 무슨 일이에요?"

"아무것도 아니란다. 애들아. 거짓말쟁이 삼촌이 또 거짓말을 해서 혼내주고 왔어요."


정말 아프다. 그런데, 그자가 태연하게 그렇게 말하는 걸 들으니 구역질이 올라온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저렇게 역겨운 짓거리를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거짓말쟁이가 아니다. 아. 엄마. 엄마가 보고 싶다. 엄마도 이랬을까. 미안해요.


큰누나 역시 낮은 목소리로 경멸이 담긴 말을 한 채, 자신이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 바닥이 점점 붉어져 갔고 파편들도 그 색깔을 잃어가기 시작한다. 동공의 RGB도 어느새 단색톤으로 조정되었다. 슬프고 억울한 날이다. 나는 제대로 주먹도 하나 뻗어보지 못한 채 사라진다.





11.


프로이트는 멜랑꼴리 환자의 자기비난을 설명하기 위해 퇴행적 동일시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자아의 자기 비난의 근원, 그것은 애초에 대상에 대해 가해졌던 비난이다. 자아 이상에 의한 자아의 비난, 그것은 자아가 대상을 향해 퍼부었던 비난이 자아 자신에게 되돌아온 것이다. 자아가 자신의 대상이었던 무언가에 동일시를 함으로써 자신이 그 대상을 향해 쏜 비난의 화살을 맞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설명에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고 느낀다. 꿈속의 나는 누구에게도 비난을 퍼부은 적이 없었다. 오히려 나는 계속해서 이해받고자 했고, 나의 고통을 인정받고자 했다. 내가 정말 아프다고, 거짓말이 아니라고 설명하려 했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유리병에 맞아야 했을까? 어째서 나는 거짓말쟁이로 낙인찍혀야 했을까?


오히려 라캉의 설명이 여기서 더 설득력을 갖는다. 멜랑꼴리에서 자기비난의 망상은 자신 안에 있는 어떤 이질성을 직접적으로 겨냥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존재. 대상이 평상시엔 나르시시즘의 뒤에 감춰져 있고 근본적으로 오인된다는 사실로 인해, 필연적으로 환자는 자신의 이미지를 관통하면서 넘어서서 대상에 도달하기 위해 그 이미지를 공격할 수밖에 없다.


즉, 작은누나가 내 머리를 내리친 것은 실은 내가 나 자신을 내리친 것에 다르지 않다. 나는 나 자신의 이미지를, 고통 속에서 도움을 구하는 나약한 나를, 거짓말쟁이로 몰린 억울한 나를 공격함으로써, 그 뒤에 숨어있는 더 근본적인 무언가에 도달하려 했던 것이다. 쓰레기통에 내던져진 찌꺼기로서의 나, 애초부터 버려질 수밖에 없었던 나, 욕망의 광채를 상실한 나. 그것이 진짜 나였다.


그래서 나는 현실의 나와 너무도 달랐다. 꿈속에서 나는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고, 제대로 주먹 하나 뻗어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꿈속의 나는 진짜 나, 즉 버려진 대상으로서의 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방어할 가치도 없는 것, 이미 폐기된 것이었다. 그래서 폭력은 정당화되었고, 나의 고통은 부정되었다. 거짓말로 치부되었다.


엄마가 없었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엄마는 최후의 보루다. 세상 모두가 나를 버려도 엄마만은 나를 받아줄 것이라는 환상. 하지만 꿈속에서 엄마는 부재했다. 전화도 받지 않았고, 집에도 없었다. 엄마마저 나를 버렸다. 아니, 어쩌면 엄마는 애초부터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상징적 질서 속에 제대로 기입되지 못한 나에게는, 타자의 욕망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누구에게도 욕망되지 않는 존재였다. 그래서 나는 버려다.


무엇이 미안했을까? 아프다고 한 것? 도움을 청한 것? 아니면 애초에 태어난 것? 존재한 것 자체가 미안한 일이었을까? 멜랑꼴리한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죄책감으로 경험한다. 자신이 여기 있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느낀다. 왜냐하면 자신은 애초부터 버려져야 할 것이었으니까.






12.

손가락에 힘을 주는 것도 힘든 나날이다. 기록하면서도 느끼는 거지만, 꿈속의 나는 너무도 약하다. 자기 몸 하나 지키지도 못하고 당하기만 하는 피지배자 신분. 그것이 나다. 심장박동수가 다시금 원래대로 돌아왔고 그 외 기타 신체징후도 정상 범주로 돌아왔음을 감지했다. 침구에 누우면 다시 잘 수 있을까. 이번에는 악몽 없이 잘 수 있을까. 불확실한 작금의 현실에서 분명한 건 글을 쓰는 지금의 나는 정신이 또렷하다는 것이다. 여러모로 억울하다. 기발한 건지 뒤틀린 건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 두뇌는 '괘씸한 천덕꾸러기'인 것 같다. 미워할 수도 없는 이걸 평생 가지고 다녀야 한다는 걸 생각하니 마음 한 구석이 아려온다.


시계는 여전히 2시 30분이었다.




2025. 12.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