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체적 타당성과 법적 안정성: 법진화론을 중심으로

생각의 서고 34화

by 소는영


I. 서론: 법이 존재하는 이유, 그리고 '두 가지 이념'의 긴장관계


1.

법학을 공부하거나 실무에서 법을 다루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법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이 질문은 과연 단순한 철학적인 유희에 그칠까. 그렇지 않다. 나는 이를 판결과 법해석에서 부딪히는 실존적인 문제임을 절감한다.


법은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예측가능성을 부여하기 위해 존재하지만, 동시에 개별사건에서 억울함 없는 정의(正義)를 실현해야 하는 사명을 띤다. 여기서 법학의 영원한 아포리아(aporia), 즉 법적 안정성(Legal Stability)과 구체적 타당성(Concrete Validity)의 충돌을 마주하게 된다. 이 둘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리고 어떤 관계에 놓여있는가.


2.

법적 안정성은 법이 명확하고 일정하여,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의 행위가 법적으로 어떤 평가를 받을지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는 요청이다. "악법도 법이다"라는 소크라테스의 격언(물론 이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지만)이나, "세상이 망하더라도 정의는 세워라"가 아닌 "세상이 망하지 않게 하기 위해 법을 지켜라"라는 식의 태도는 법적 안정성을 중시하는 입장을 대변한다.


이는 주로 성문법주의 국가에서 법전의 문언을 엄격히 준수할 것을 요구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만약 법관이 자신의 주관적 정의감에 따라 매번 다른 판결을 내린다면, 국민은 법을 믿고 생활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따라서 법적 안정성은 법치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 가치다.


3.

그러나 법적 안정성을 고집할 때, 법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기계가 되고 만다. 형식적인 법논리에는 완벽하게 부합하지만, 일반인의 상식과 정의감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결론이 도출될 때, 우리는 "이것이 과연 정의인가?"라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때 등장하는 요청이 바로 구체적 타당성이다. 구체적 타당성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건에서, 그 사건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가장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결론을 도출하려는 이념으로, 때로는 법조문의 기계적 적용을 거부하고 법의 행간을 읽어내며, 나아가 법을 창조적으로 해석할 것을 요구한다. "법에도 눈물이 있다"는 말은 바로 이 구체적 타당성에 대한 호소다.


4.

본고는 이러한 법의 두 가지 이념, 즉 구체적 타당성과 법적 안정성의 긴장관계를 한국 법학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두 가지 거대한 흐름을 통해 심층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첫 번째 흐름은 마키노 에이이치(牧野英一)가 주창하고 한국 사법부에 깊은 흔적을 남긴 구체적 타당성과 「법률의 사회화」 담론이다. 이는 사법(司法)의 영역에서 재판관이 어떻게 기계적 법 적용자가 아닌 창조적 해석자가 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두 번째 흐름은 일본 민법학의 태두이자 한국 민법학에도 결정적 영향을 끼친 와가츠마 사카에(我妻榮)의 '법진화론'이다. 이는 입법과 법 해석학(도그마틱)의 영역에서,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사회 경제적 변화에 발맞추어 법이 어떻게 진화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거시적 담론이다.


5.

이에 따라 유종우의 연구와 양천수의 연구를 바탕으로, 앞서 언급한 두 거장의 이론이 어떻게 전개되었으며, 그것이 식민지 시기 조선고등법원을 거쳐 오늘날 대법원의 판례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법 해석의 방법론은 무엇인지를 규명할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법이 고정된 화석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회 현실 속에서 정의를 찾아가는 살아있는 유기체임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II. 본론; 구체적 타당성의 기원은 어디에서 유래하였는가: 마키노 에이이치, 그리고 「법률의 사회화」담론


1.

오늘날 우리 대법원 판결문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구체적 타당성'이라는 용어는 어디서 유래했을까. 이 개념을 법학의 중심 주제로 끌어올린 인물은 일본의 형법학자 마키노 에이이치다.


그는 1925년 저작 『법률에서의 구체적 타당성(法律に於ける具體的妥當性)』을 통해, 당시 형식논리에 치우쳐 있던 법해석학에 경종을 울리고 새로운 법해석의 지평을 열었다. 비록 그는 형법학자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그의 민법 이론과 법사상은 당대의 민법학자 하토야마 히데오나, 뒤에서 언급할 와가츠마 사카에에게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마키노가 활동하던 시기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로, 서구의 근대법이 일본에 수입되어 정착하던 시기였다. 당시 주류 법학은 독일의 개념법학(Pandektenjurisprudenz)의 영향 하에 있었다. 개념법학은 법을 완결된 논리 체계로 보고, 모든 사건은 법 개념의 논리적 조작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풍토 속에서 법관은 법률을 말하는 입에 불과했고, 법해석은 수학 공식처럼 딱딱한 논리연산으로 전락해 있었다.


마키노는 이러한 기계적 법 적용이 급변하는 사회 현실과 괴리되어 있음을 간파하고, 시대선취정신(時代先取精神)을 발휘하여 다가올 법의 모습을 예견했다.


2.

마키노 에이이치가 주창한 구체적 타당성의 핵심은 바로 「법률의 사회화(Socialization of Law)」다. 그는 그의 저서 첫 장의 부제를 <법률의 사회화라고 하는 사상의 적용으로서>라고 달았을 만큼, 이 두 개념을 동일시했다. 그렇다면 '법률의 사회화'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마키노는 이를 두 가지 차원에서 정의한다.


3.

첫째, 법률의 내용은 사회 자신이 만드는 것이다. 이는 법이 입법자나 주권자의 일방적인 명령이 아니라는 선언이다. 법의 내용은 법전이라는 종이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사회 현실 속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법을 해석할 때는 법전의 문언에만 얽매일 것이 아니라, 그 법이 규율하고자 하는 사회의 실태와 관행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둘째, 법률의 실질은 사회 자신을 위한 것이다. 이는 법의 목적이 국가 권력의 유지나 추상적인 이념의 실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회 구성원들의 삶을 개선하고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는 데 있다는 뜻이다. 즉, 법은 사회를 위한 도구이며, 그 도구가 제 기능을 다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변화에 발맞추어 그 해석도 달라져야 한다는 기능주의적 관점이 내포되어 있다.

4.

결국 마키노가 말하는 구체적 타당성, 즉 법률의 사회화란 지금 우리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어떠한 문제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생각,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해결책, 즉 사회관념을 고려하여 법적 결론을 내리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는 개념법학이 지배한 당대에, 법관에게 법전에서 눈을 돌려 사회를 바라볼 것을 주문하는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5.

그러나 구체적 타당성을 강조할 때 가장 우려되는 점은 법관의 자의(恣意)에 의한 재판의 가능성인바, 그렇다면 법적 안정성을 해치지 않으면서 어떻게 구체적 타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 마키노는 그 기준으로 '사회관념', '일반의 통념', 그리고 '시대의 사상'을 제시한다. 이는 현대 법학에서 말하는 '조리(條理)', '경험칙', '사회적 타당성'과 맥을 같이한다.


마키노에 따르면, 법률의 내용은 시대의 사상을 배경으로 해야만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시대의 사상은 법률 자신이 정하는 것이 아니다. 법전은 과거의 시점에 고정되어 있지만, 시대의 사상은 끊임없이 흐르고 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재판관은 법률에 종속된 기계가 아니라, 법률로부터 독립하여 자유롭게 시대 사조가 향하는 곳을 통찰하고, 그에 부합하는 타당한 판결을 내려야 할 것이다.

이 지점에서 사법(司法)의 위상이 재정립된다. 어째서 그러한가. 전통적으로 사법은 입법의 하위에 위치하여 이미 만들어진 법을 적용하는 소극적 작용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마키노는 사법은 결코 입법 아래에 서 있지 않다고 단언한다. 입법과 사법은 모두 사회적 생활에 있어서 합리성을 밝히는 것이라는 공통된 목적을 가지며, 양자 모두 창조적 활동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대등하다는 것이다. 입법이 사법을 통해 비로소 실생활에서 움직일 수 있듯이, 사법은 입법의 불완전함을 사회관념으로 보충하여 살아있는 법으로 만드는 능동적 주체다.


이러한 마키노의 주장은 오늘날 우리가 법관에게 요구하는, 이른바 법형성적 기능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III. 판례를 통해 살펴본 구체적 타당성, 그리고 이를 위한 실천적 전개방법


1.

이론은 구체적인 사례를 만날 때 비로소 생명력을 얻는다. 마키노 에이이치는 자신의 추상적인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당시 일본 대심원(현재의 대법원)이 내린 일련의 판결들을 분석했다. 이 판결들은 법원이 성문법의 경직된 문언을 넘어서 사회관념을 수용하고, 이를 통해 어떻게 구체적 타당성을 실현해 나갔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기록이다. 유종우의 연구에서 제시된 주요 사례들을 통해 그 논리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자.


2.

근대 민법 제정 초기, 약혼(혼인의 예약)은 법적 구속력이 약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혼인은 당사자의 자유로운 의사에 기해야 한다는 근대법의 대원칙 때문에, 약혼을 했다고 해서 결혼을 강제할 수는 없다는 논리가 지배적이었다. 따라서 약혼을 파기하더라도 그것은 도의적인 비난의 대상일 뿐, 법적인 손해배상 책임까지는 지지 않는다는 견해가 존재했다.


그러나 대심원은 이러한 형식논리를 깨고 획기적인 판결을 내렸는바, 약혼이 비록 강제이행을 청구할 수는 없는 특수한 계약이라 하더라도, 당사자 일방이 정당한 이유 없이 그 계약을 위반하여 혼인을 거절하는 경우에는, 상대방이 그 계약을 믿고 행동하여 입은 유형무형의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판시한 것이다. 마키노는 이 판결을 「법률의 사회화」의 첫 번째 사례로 꼽았다.


대심원이 주목한 것은 사회통념이었다. 당사자들은 장래의 혼인을 기대하며 성실하게 준비를 하고, 관습상 의식을 치르며, 사실상 부부와 같은 생활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행동은 그가 말한, "사회의 통념에 있어서 정당시되는 바"에 속한다. 그런데도 일방이 정당한 이유 없이 이를 파기하는 것은 상대방의 정당한 신뢰를 배반하는 것이며, 이에 대해 눈감는 것은 정의에 반한다.


대심원은 이러한 손해배상 책임이 정의공평을 중요시하는 사회관념에 있어서 당연한 바로서, 법률의 정신 그 자체라고 선언했다. 이는 법관이 법률의 문언이 아니라 법률의 정신을 찾기 위해 사회관념이라는 창(窓)을 통해 사안을 바라보았음을 의미한다. 마키노는 이를, 사회 민중이 생각하는 것이 항상 법률의 정신이 되고, 따라서 그 내용이 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또한 권리 행사(약혼 파기의 자유)에 있어서도 상대방의 지위를 고려해야 한다는 공평의 원리가 작동했음을 지적했다.



3.

구체적 타당성은 때로 명백하게 존재하는 법적 권리의 행사를 제한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대표적인 것이 권리남용금지의 법리다. 마키노가 제시한 사례는 호주(가부장)의 가족에 대한 "거소지정권"과 관련된 사건이었다.


당시 민법상 호주는 가족이 살 곳을 지정할 수 있는 권한, 이른바 거소지정권을 가지고 있었고, 가족은 이에 따를 의무가 있었다. 이 사건에서 호주는 실제로는 가족과 동거할 의사가 없으면서도, 가족을 호적에서 파내거나(이적) 재산을 독차지하려는 부정한 목적으로 거소지정권을 행사했다. 형식적으로만 보면 호주는 법이 부여한 권리를 행사한 것으로 문제되지 않았다.


그러나 대심원은 호주의 청구를 기각했다. 호주가 재산상 이익을 얻기 위해 부정한 목적으로 거소지정권을 행사하는 것은 그 자체로 부정한 명령이며, 가족으로서 이러한 명령에 복종할 의무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거소지정권은 일가 정리의 필요상 부여되는 것으로서 절대 무한한 것이 아니라고 판시했다.

마키노는 이 판결을 통해 권리의 행사가 일반의 통념과 조화를 이루어야 함을 역설했다. 아무리 법전에 명시된 권리라 하더라도, 그 권리가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목적(부정한 이익 추구, 타인에 대한 가해)을 위해 사용될 때는 법적 효력을 잃는다는 것이다. 이는 권리가 개인의 사적인 소유물이 아니라, 사회적 맥락 속에서 공익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이른바 권리의 사회성을 확인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 민법 제2조가 천명하고 있는 권리남용금지의 원칙은, 바로 이러한 구체적 타당성의 추구가 쌓여서 성문법으로 정착된 결과라 할 수 있다.



4.

법률행위(계약)의 해석에서도 구체적 타당성은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마키노는 기간의 정함이 없는 신원보증계약에 대한 대심원 판결을 분석하며 이를 실증했다. 신원보증인이 피고용인의 신원을 보증하는 계약을 맺으면서 기간을 정하지 않은 경우, 문언 그대로 해석하면 보증인은 피고용인이 퇴직할 때까지 평생 책임을 져야 한다. 이는 계약은 지켜져야 한다(Pacta sunt servanda)는 원칙에 부합한다.


그러나 대심원은 이러한 해석이 신원보증계약의 성질과 맞지 않는다고 보았다. 신원보증의 사회적 기능은 어디까지나 고용주가 피고용인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를 고용할 때 발생하는 위험을 잠정적으로 담보하는 데 있으므로, 고용주가 피고용인을 신임할 수 있을 정도의 '상당한 기간'이 지났음에도 계속 보증 책임을 지우는 것은 부당하다고 본 것이다.


대심원은 설령 계약서에 '무기한'이라고 적혀 있거나 기간이 명시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해약 신청 후 상당한 기간이 경과한 때 해약의 효과가 발생한다고 보는 것이 당사자의 의사에 적합하다고 판시했다. 마키노는 이에 대해, 신원보증이 가지는 사회적 사명을 고려할 때, 일정 기간이 지나면 보증 관계는 당연히 소멸해야 한다는 것이 사회관념에 부합한다고 설명했다. 이는 법관이 계약의 문언에 얽매이지 않고, 그 계약이 사회 속에서 어떤 기능을 수행해야 하는지를 통찰하여 당사자의 의사를 '규범적'으로 해석해낸 결과다. 즉, 불합리한 계약 내용을 정의와 공평의 관점에서 수정한 것이다.



5.

여기까지 놓고보면, 마키노는 대심원의 판결을 옹호하기만 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때로는 대심원이 구체적 타당성을 외면했다고 비판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토지임대차 사건이다.


당시 도쿄를 비롯한 대도시에선, 관행적으로 토지 임대차 계약을 3년 내지 5년의 단기로 맺고 건물을 짓는 경우가 많았다. 건물은 수십 년을 견딜 수 있는데, 계약 기간이 끝났다고 해서 멀쩡한 건물을 철거하고 토지를 비워주라는 것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임차인의 생존권 차원에서나 가혹한 일이었다.


이 문제에 대해 하급심(도쿄항소원, 고베구재판소)은 구체적 타당성을 적극적으로 모색했다. 도쿄항소원은 건물소유를 목적으로 하는 토지임대차의 경우, 별도의 약정이 없는 한 그 기간은 건물이 낡아서 폐기될 때(후폐, 朽廢)까지라고 인정하는 것이 당사자의 진의에 적합하다고 판시했다. 여기에 고베구재판소는 한술 더 떠서, 집주인이 바뀌더라도 새 주인은 인류로서의 동정심(人類としての同情心)에서 기존 임대차 관계를 승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판시했다. 이는 법적 논리를 넘어선 인정(人情)과 조리에 호소한 과감한 판결이었다.


그러나 대심원은 이러한 하급심의 판결을 파기했다. 대심원은 계약에서 정한 시기에 차용물을 반환해야 한다는 민법 규정을 들어, 계약 기간이 만료되면 건물을 철거하고 토지를 인도해야 한다고 기계적으로 판결했다. 마키노는 이에 대해 대심원이 실생활의 모순을 간과하고 계약의 내용을 문언 그대로 승인하여, 사태를 너무나 개념적으로 생각한 것이라고 맹렬히 비판했다. 그는 건물을 짓는 것과 단기 계약을 맺는 것 사이에 개념적 모순은 없을지 몰라도 실생활의 모순은 엄연히 존재하며, 법관은 이 모순을 해결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사례는 구체적 타당성을 둘러싼 법원 내의 갈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법적 안정성을 중시하는 대심원과, 구체적 타당성을 중시하는 하급심 및 학계의 대립은 결국 차지법(借地法) 등의 특별법 제정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는 사법적 해석의 한계를 입법으로 해결한 사례지만, 그 과정에서 사회관념에 입각한 비판적 논의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은 부인할 수 없다.






IV. 구체적 타당성의 한국적 수용과 전개; 식민지에서 현대로


1.

마키노 에이이치가 쏘아 올린 「법률의 사회화」라는 화두는 현해탄을 건너 식민지 조선의 법조계에도 상륙했다. 비록 식민지 법원이라는 태생적 한계가 있었으나, 민사 분쟁을 해결하는 법리의 차원에서는 일본 본토의 흐름과 동조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유종우의 연구는 조선고등법원과 해방 후 대한민국 대법원의 판결을 분석하여 이 개념의 수용 과정을 추적한다.


2.

유종우는 조선고등법원 판결의 분석한 결과, '구체적 타당성'이라는 용어 자체가 명시적으로 사용된 사례는 1936년의 단 한 건에 불과하다고 지적하였으나, 용어의 부재가 개념의 부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는 조선고등법원 판결에서 '타당성'이라는 단어가 마키노가 말한 법률의 사회화와 일치하는 의미로 다수 사용되었음을 밝혀냈다.

1920년대 후반부터 조선고등법원의 판결이나 상고 이유서에는 "조리상", "사회관념상", "실생활의 현상"이라는 표현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예를 들어, 1933년의 한 판결 상고 이유서에는 "호주인 피고가 이를 하지 않은 것은 계쟁 가옥에서의 사실의 진실이자 또한 조선인 사이의 실생활 현상이다. 그렇다면 원심이 실생활과 배치되는 판시를 한 것은 타당성을 결여한 불법이 있다"는 주장이 실렸다. 이는 법률의 형식적 적용보다는 조선의 '실생활'과 '사회관념'에 부합하는 결론을 요구하는 것으로, 마키노의 이론이 당시 조선의 법조계에도 깊숙이 침투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앞서 살펴본 무기한 신원보증계약의 법리가 조선고등법원에서도 그대로 인용되었다는 점이다. 조선고등법원은 1927년 판결에서 일본 대심원 판결을 인용하며, 신원보증인의 해지권을 인정했다. 1929년 판결에서는 더 나아가 "현재의 사회 상황에서 피용자는 대개 약자의 지위에 있고... 신원보증인에게 과중한 책임을 부담시키는 것은 정의, 공평을 기초로 하는 사회관념상 타당한 것이 아니다"라고 설시했다. 이는 식민지 법원이지만 민사 법리에 있어서는 근대법의 최신 흐름인 '사회화' 사상을 수용하여 구체적 타당성을 추구하려 했음을 시사한다.



3.

해방 후 대법원은 이러한 유산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며, 구체적 타당성을 우리 법학의 독자적인 원리로 발전시켜 나갔다. 194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반의 초기 대법원 판결들은 일본 시대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구체적 타당성'을 언급한다.


1948년 대법원 판결은 부동산 매매계약에서의 동시이행 관계를 다루었다. 계약서에 잔대금지급과 등기이전의 순서가 명시되지 않았지만, 대법원은 일반 사회의 경험법칙에 비추어 볼 때 이는 동시이행 관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시했다. 그러면서 원심 판결이 구체적 타당성을 결한 판결이라고 명시적으로 비판했다. 이는 문언적 해석보다 '거래의 실질'과 '경험칙'을 우위에 둔 것으로, 구체적 타당성이 재판의 핵심 기준임을 천명한 것이다.

1962년 판결에서는 더욱 명확한 법철학적 선언이 등장한다. "법의 발전사가 논리의 역사만은 아니듯이 법의 해석 적용에 있어서도 논리적이고 자연과학적인 방법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사회 통념에 비추어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타당성을 추구하는 방법을 지향하여야 할 것이다." 마치 올리버 웬델 홈즈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의 "법의 생명은 논리가 아니라 경험이었다"는 명제를 연상시키며, 한국 사법부가 지향하는 바가 기계적 법 적용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2009년, 대법원은 구체적 타당성과 법적 안정성의 조화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임대주택법상 '임차인'의 의미를 해석하는 사건에서, 대법원은 다음과 같은 해석의 원칙을 설시했다.


법 해석의 목표는 "법적 안정성을 저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구체적 타당성을 찾는 데" 두어야 한다. 이를 위해 문언 해석은 가능한 한 "법률에 사용된 문언의 통상적인 의미에 충실하게 해석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나아가 체계적·목적론적 해석으로서 입법 취지와 목적, 제·개정 연혁, 법질서 전체와의 조화 등을 고려하여 "타당한 해석"이 되도록 한다.

이 판결은 두 이념의 긴장 관계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그 균형점을 찾기 위한 '단계적 방법론'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한국 법해석학의 성숙을 보여주는 이정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V. 와가츠마 사카에와 법진화론, 거시적 관점에서 사법(私法)의 변천과정을 중심으로


1.

지금까지 마키노 에이이치를 중심으로 개별 사건에서의 구체적 타당성을 살펴보았다면, 이제 시야를 넓혀 법 체계 전체가 사회 경제적 변화에 따라 어떻게 진화하는지를 규명한 와가츠마 사카에의 이론을 살펴볼 차례다. 양천수의 연구는 와가츠마 사카에를 단순한 민법 해석학자가 아닌, '법진화론자'로서 재조명한다.


2.

와가츠마 사카에는 일본 민법학의 대두이자, 그의 교과서가 한국어로 번역되어 오랫동안 한국 민법학의 교과서로 쓰였을 만큼 대단한 인물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그는 주로 꼼꼼한 해석론을 전개한 '실정법학자'로만 알려져 있는바, 양천수는 이러한 인식이 와가츠마의 진면목을 가리고 있다고 지적한다. 와가츠마는 스에히로 이즈타로(법사회학), 호즈미 시게토오, 그리고 앞서 살펴본 마키노 에이이치 등의 영향을 받아 법사회학, 법철학, 경제학에 깊은 조예가 있었다.

그는 단순히 법조문을 해석하는 것을 넘어, 자본주의 발달에 부응하는 사법(私法)의 변천이라는 거대 담론을 평생의 연구 과제로 삼았다. 이는 법을, 고정된 도그마가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경제적 토대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진화하는 상부구조(Superstructure)로 파악하는 시각이다. 그의 이론은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적 유물론과 칼 렌너(Karl Renner)의 법제도의 사회적 기능 이론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법해석학(도그마틱)과 법사회학을 결합하여, 법이론이 사회 현실과 유리되지 않고 공진화(共進化)해야 함을 역설한다.


3.

와가츠마는 자본주의의 발달 단계를 크게 세 단계로 구분하고, 각 단계마다 민사법이 어떻게 변화해 왔고 또 변화해야 하는지를 규명했다.


초기 자본주의인 산업자본주의 시대의 핵심은 생산이었다. 공장, 기계, 토지 등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것이 부의 원천이었으므로, 이에 따라 법은 '소유권'을 가장 신성하고 절대적인 권리로 보호했다. 이때의 소유권은 물건을 직접 사용하고 수익하는 사용가치 중심의 권리였다. 법의 사명은 소유자의 배타적인 지배권을 확립하여 자본 축적을 돕는 것이었다.


이제 자본주의가 고도화되면서 금융자본주의로 이행한다. 이제부터 중요한 것은 물건을 단순히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본화하여 굴리고 투기하여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소유권과 채권의 지위에 역전현상이 일어난다. 와가츠마의 명저 『근대법에서 채권의 우월적 지위』는 바로 이 현상을 포착한 것이다. 이때는 소유권의 사용가치보다 '교환가치'가 중요해지는 만큼, 기업은 주식을 발행하여 자본을 모으고, 부동산 소유자는 저당권을 설정하여 대출을 받는다. 실질적인 경제적 지배력은 소유자가 아니라 채권자(은행, 주주, 투자자)에게 넘어간다. 법은 이러한 현실에 부응하여 '자본의 유동화(Mobilization of Capital)'를 촉진하는 방향으로 진화한다. 요컨대, 와가츠마는 자본의 유동화를 위한 핵심 법적 기제로 채권양도의 자유화저당권의 유동화를 꼽았다. 채권이 마치 물건처럼 자유롭게 사고팔릴 수 있게 되고(채권의 물권화), 저당권이 피담보채권과 분리되어 독립된 가치로서 유통되는 현상(저당증권 등)이 그것이다. 이 단계에서 민법학의 과제는 채권과 담보물권의 유동성을 극대화하여 금융 자본의 활동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여기서 자본주의가 더욱 발달하면, 거대 기업의 독점과 빈부 격차 심화라는 모순에 직면하게 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가 개입하는 '통제경제' 혹은 '경제민주주의' 단계로 나아간다고 와가츠마는 보았다. 이 단계에서 법은 사적자치의 원칙을 수정하여 공공복리를 위해 계약의 자유와 소유권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진화한다. 이는 마르크스가 예견한 혁명에 의한 체제전복이 아니라, 법(상부구조)의 능동적 개입을 통해 자본주의의 모순을 수정하고 체제를 유지하려는 시도다.



4.

와가츠마의 법진화론은 단순한 역사서술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법해석방법론으로 연결된다. 그것이 바로 기능주의(Functionalism). 그는 법 제도를 해석할 때, 그 제도가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지를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저당권을 해석할 때, 전통적인 물권 법리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저당권이 현대 금융에서 '신용 창출'과 '자본 유동화'라는 기능을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법관에게 문언에 얽매이지 말고 제도의 사회적·경제적 기능을 통찰할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일견 마키노 에이이치의 '구체적 타당성'과 궤를 같이 한다. 다만 마키노가 개별 사건에서의 '정의'와 '인정'에 치중했다면, 와가츠마는 자본주의 시스템 전체의 효율성과 합리성이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법의 진화를 모색했다는 점이 다르다.




VI. 종합적 고찰; 정의와 법적 안정성의 변증법적 통합을 위하여


1.

마키노 에이이치와 와가츠마 사카에는 각기 형법과 민법이라는 다른 영역에서 출발했지만, 결국 살아있는 법을 지향했다는 점에서 하나의 지점에서 만난다. 마키노는 '사회관념'이라는 렌즈를 통해 개별 사건에서 법관의 창조적 재량(Micro, 미시적)을 강조했고, 와가츠마는 '자본주의의 발달'이라는 틀을 통해 법체계 전체의 진화(Macro, 거시적)를 모색했다. 이 두 흐름은 가히 상호보완적이다.


와가츠마의 거시적 분석은 법관이 개별 사건에서 구체적 타당성을 찾을 때 방향타 역할을 한다. 예컨대 임대차 분쟁에서 법관이 임차인을 보호하는 판결을 내릴 때, 그것은 단순히 '인정'에 기한 것이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에서 주거의 안정이 갖는 사회적 기능과 소유권의 제한 필요성이라는 거시적 법 진화의 흐름에 부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마키노가 강조한 구체적 타당성의 축적은 법 체계 전체를 변화시키는 동력이 된다. 하급심들이 끊임없이 제기한 문제의식들이 모여 결국 법률의 개정과 이론의 수정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2.

그러나 와가츠마의 이론, 특히 제3단계인 통제경제론은 양날의 검과 같다. 국가가 공공복리를 위해 사적 자치를 제한하고 경제를 통제한다는 논리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복지국가의 이념이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국가 권력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전체주의의 논리로 악용될 위험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와가츠마가 활동하던 시기는 전시(戰時)체제였고, 그의 이론은 전시통제경제를 정당화하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와가츠마의 기능주의적 통찰을 계승하되, 그것이 전체주의적 국가개입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변질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다시 구체적 타당성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국가의 통제나 법의 진화가 정당한지 아닌지는, 그것이 구체적인 개인의 삶에서 정의를 실현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는지(마키노가 강조한 '사회 자신을 위한 법')에 따라 판단되어야 한다.



3.

오늘날 대한민국은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이자 민주주의 국가다. 4차 산업혁명, 플랫폼 노동, 인공지능의 등장은 와가츠마가 살았던 시대와는 또 다른 차원의 법적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앞서 본 바와 같이, 대법원은 2009년 판결을 통해 법적 안정성을 저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구체적 타당성 추구라는 대원칙을 확립했다. 그러나 저해하지 않는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다원화된 현대 사회에서 보편적 사회 통념을 어떻게 포착할 것인지는 여전히 난제다. 과거처럼 단일한 '민족적 정서'나 '관습'에 호소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 법률가는 더욱 정교한 논증책임을 응당 져야만 할 것이다. 구체적 타당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직관이나 감정에 호소해서는 안 되며, 와가츠마처럼 사회 경제적 구조의 변화와 법 제도의 기능을 치밀하게 분석하고, 마키노처럼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고통과 요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그 결과를 헌법적 가치(인권, 평등, 적법절차)라는 체에 걸러 정당성을 입증해 내야 한다.





VII. 결론; 법은 완성된 명사(Noun)가 아니라 행동하는 동사(Verb)다


1.

나는 법전 속에 갇힌 정의는 죽은 정의라고 믿는다. 법은 인간의 삶을 규율하기 위해 만들어진 도구이며, 삶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마키노 에이이치가 말했듯 법률의 내용은 사회 자신이 만드는 것이며, 와가츠마 사카에가 보여주었듯 법은 자본주의라는 토대 위에서 끊임없이 진화하는 생명체다.


2.

우리가 살펴본 '혼인의 예약', '권리남용', '신원보증', '임대차' 등의 사례들은 모두 법관들이 죽어있는 법 문언에 사회관념이라는 숨결을 불어넣어 살아있는 정의로 되살려낸 투쟁의 기록이다. 때로는 법적 안정성이라는 이름 하에 이러한 시도가 좌절되기도 했지만(대심원의 토지 임대차 판결), 결국 그 흐름은 막을 수 없었고 입법과 새로운 판례를 통해 구체적 타당성은 실현되어 왔다.


3.

구체적 타당성과 법적 안정성, 이 두 이념의 긴장은 법학이 짊어져야 할 영원한 숙명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순이 아니라 변증법적 발전의 동력이다. 법적 안정성은 법의 뼈대로서 예측 가능성을 제공하고, 구체적 타당성은 그 뼈대 위에서 움직이는 근육으로서 실질적인 정의를 구현한다. 뼈대가 없으면 법은 무너져 내리고, 근육이 없으면 법은 움직일 수 없다.


4.

우리는 이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 텍스트의 감옥에 갇히지 않고 끊임없이 창문 밖의 세상을 내다보아야 한다. 변화하는 사회 현실을 직시하고, 그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법의 언어로 번역해내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법적 안정성이라는 그릇이 깨지지 않도록 정교하게 다듬어내는 것. 그것이 바로 "법대로 하라"는 차가운 명령을 "사람을 위한 법"으로 승화시키는 법률가들의 소명일 것이다.



2025. 12. 13.



참고문헌(參考文獻)



유종우, 《구체적 타당성 개념의 형성과 발전- 1910~1960년대 한국과 일본 판결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법학연구소 법이론연구센터, 『기초법학연구』 제1호, 202 1. 6., 95-134면


양천수, 《와가츠마 사카에(我妻榮)의 법진화론》, 안암법학회,『안암법학』제65호, 2022. 11., 57-9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