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랑콜리의 색은, 여전히 노랗다

생각의 서고 32화

by 소는영

​0.


​자고 일어나면 세상이 몽롱하다. 몽롱(朦朧). 이 단어만큼이나 부드럽고 세련된 발음을 지닌 게 또 있을까.


오른쪽 뒷머리에 손을 갖다 대고 손톱을 세워 긁적인다. 두피의 가려움이 느껴질 때면 항상 하던 습관이다. 그래도 피가 나올 정도로 긁어선 안 된다. 아프기도 하고 비위생적이니까 말이다.


침대 위 찻장에 놓인 블루투스 스피커에선 따뜻한 재즈의 향이 방을 감싼다. 더러운 밤꽃 냄새가 풍기는 이 헛간에선 먼 이국의 향취를 떠올리게 해주는 달콤한 음색(音色)만큼이나 정신건강에 도움 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은은하게 비쳐오는 노란색 형광등만큼이나 샛노란 세상을 볼 때면, 평소엔 내기도 힘든 옅은 미소가 얼굴을 지배한다.



1.


어째서 노란색일까. 하얀 형광등을 쬘 때면 과거의 힘겨운 일상이 떠오르곤 한다. 학교를 가나, 기차를 타나, 하다못해 집 근처의 낙원상점(樂園商店)을 갈 때 조차 모든 빛은 백색의 눈(雪)을 뿜어낸다. 각막을 뒤덮는 검은 강의 줄기를 밝혀주는 구원의 빛(目). 그것을 떠올려 주기에, 어쩌면 그런지도 모를 것이기에 나는 그것을 혐오한다. 자비와 구조는 나에게 어울리는 단어들이 아니다.


설산을 내리쬐는 저 먼 행성의 인자함은 끝을 모른 채로 ‘은총’을 연일 내린다. 모든 것을 지우고 싶었던 걸까. 말 없는 태양은 그렇게 묵묵히 분열을 지속한다. 햇빛을 쐴 때면 무한(無限)한 에너지를 느끼곤 한다.


어제도 해는 있었고 오늘도 있다. 내일도 분명 있을 것이다. 과거의 ‘나’는 ‘생각’했고, 작금의 ‘나’ 역시 생각을 한다. 하지만 미래의 ‘나’는 어떨지 의문이다. 모든 짐을 미래로 넘기는 것은 시간표를 작성해놓고 지키지 않는 것만큼이나 무책임한 일이다. 해야 할 일을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책무다. 해야 한다. 당위는 능력을 전제한다는 임마누엘 칸트의 격언이 나의 가슴을 밝혀준다.



2.


너무 뜨거운 나머지 심장이 타버리는 듯한 고통이 산불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몸속의 세포들의 울부짖음은 가히 짐승의 그것과 흡사했으니 ‘의무’를 빙자한 이러한 조용(沈默)한 지옥도의 풍경(諷經)을 애써 외면한다. 무시해야 한다. 그래야만 해.

스웨덴의 공기를 마실 때면, 항상 드는 생각이 있다. 한국의 그것과 다르다는 것 말이다. 너무도 당연한 말일지 모르겠지만 한편으론 이상하지 않은가. 이 작은 행성에서 오랫동안 지켜온 침묵의 약속이라도 깬 듯, 오늘날의 국가는 다양한 공동체를 구성해 무에서 유를 창출해냈으니 말이다. 신기하고 재밌는 현상이 아닌가 싶다.


눈을 올려 하늘을 바라보니 잿빛 구름 두 덩이가 눈에 띈다. 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띈’ 것일까. 생각컨대 그 녀석들이 나의 눈을 희롱(戲弄)해서 그렇다고 본다. 특이한 모양새였다. 여느 때의 광경과 달리 양의 털을 입은 소의 모습. 영어로 치면 cow보단 ox에 가깝다고 볼 수 있는, 마치 강인한 검은색 들소 ‘바이슨’이 연상됐다. 한국의 누런 쇠(黃牛)와 달리 근육으로 무장한 전차(戰車)와 같은 모습에선 특유의 순박함이 보이질 않았다.


그 녀석의 눈을 통해 ‘갸륵한’ 정기에 흠뻑 빠지고 싶었으나 어떠한 연유에서인지 볼 수가 없었다. 눈을 감는다.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해 방법을 강구한다. 다시 눈을 떠서 마저 보고자 했으나, 이미 소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온다고 하거늘, 나는 아직 그 녀석의 고혹(蠱惑)함을 받아들일 상태가 아니었다.


3.


​“나 학교 안갈래.”

​“왜? 무슨 일 있어?”

​“선생님이 차별하잖아. 동양인이라고 무시하는 건지. 주변에 있는 백인들이 놀려대는 것도 방치(放置)하고 난 도저히 이 모멸감을 못 견디겠어. 생각해보면 내가 왜 이 학교에 다녀야 하는 거야? 나는 경제학사 학위도 이미 가진 상태인데, 이 학교에서 한 학기를 다닌다 해서 내 스펙관리에 도움이 된다고 볼 수도 없잖아. 돈도 들고 말이야. 이러다 더 우울해질 것만 같아. 안 나갈래.”


​TV에선 오늘의 화제 뉴스가 나오고 있고, 부엌의 냄비에선 콩나물국의 냄새가 뚜껑을 뚫어 흘러 나오고 있다. 다들 눈앞에 놓인 밥공기에 못이라도 박았는지 고개를 들지 않고 묵묵히 식욕을 탐닉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런 나를 이해라도 하려곤 하는지, 그저 고개만 내저으며 손사래를 친다.


​“또 그런 소리를 하는구나. 다 너를 위한 거라고 몇 번을 말해야 하는 거니.”


​그놈의 ‘위한 것’ 타령은 언제쯤 끝나는 것일까. 애초에 고국을 떠나 이 먼 이국에 잠시 정착한 것도 모든 유산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한 걸텐데. 어째서 나의 모친께선 그러한 깊은 뜻을 마주하지 않으시는 것인가. 한탄이 나올 때 쯤,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았던 콩나물국 냄비가 하얀 수증기를 토해내고 있을 때쯤, 서둘러 그녀는 한 손은 뒷 허리에 댄 채로 달려가 밸브를 잠근다.

​“에구머니나 또 태울뻔했네. 어쨌든 또 그런말 하면 혼날 줄 알아. 알겠니?”




4.


​아직도 내 옆의 ‘가족’은 묵묵히 밥을 쳐먹고 있었으니, 가히 짐승이나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조지 오웰의 뭐시기 농장과 다른 게 있다면, 그의 작품 속 세계관은 온갖 메타포로 꾸며진 장식이 놓은 접시라는 것. 그리고 이 망할 집구석은 ‘말 그대로’ 동물농장이었던 점.

​배식이 끝난 저녁. 그는 아직도 식탁 위에 고개를 숙인 채 흐느낀다. 한번 흘린 눈물은 그칠지를 모르고 계속해서 흰 쌀밥을 물로 적셔가고 있었다. 오늘도 그는 밥에다 물을 말아 먹을 것이다. 적어도 정수기에서나 퍼먹는 냉수와 달리 눈물은 짭조름한 맛이 있으니, 반찬 없이 먹을 만 할지 모르겠다. 콩나물국이 있던 가스레인지엔 텅 빈 검은 후라이팬 만이 놓여있었다.



5.


이곳의 밤은 고국의 그것과 달랐으니, 이른바 해가 빨리 져 그의 따스한 은총을 받아 낼 시간이 적어졌다는 것을 뜻했다.


허기진 배는 어린애 마냥 반찬투정을 하며 자신을 기름진 것으로 유린해줄 것을 청한다. 마음껏 위장을 휘젓는 짐승들의 타액에 점철돼 위액을 뿜애내고 싶어 하는 피식자의 본능. 마치 한 마리의 마조히스트를 쳐다보는 기분이다.


주인을 닮는 것인가. 아니면 이것도 유전의 영향인 걸까. 전자라면 ‘기특한 내새끼’겠지만 후자면 ‘망할 놈의 개새끼’가 될 것이다. TV에선 아직도 날씨 뉴스가 나오고 있다. 사실 저건 TV도 아니다. 그냥 화면만 TV일 뿐, 그 내용은 지역 방송사에서 송출하는 것이 아닌, 누군가의 스마트폰과 연동된 녹화장면에 불과했다.


사실, 눈앞에 힌트가 놓였는데도 어째선지 나는 그것을 무시했다. 먼지가 쌓인 가구, 검은 스모그로 더럽혀진 표창장과 소파. 가죽은 이미 찢겨진 지 오래인 파란색 상형 의자. 그리고 떠나간 이를 기리는 제단.


이렇게 식탁에 앉아 「고독한 미식가」라도 찍을 줄 알았다면, 있을 때 잘해줄 걸 그랬다. 후회는 뒤늦게 엄습해오고 죄의식의 망령이 목을 죄여 온다. 숨이 막혀올 때쯤, 주머니 속에 쳐박아둔 벤토린을 꺼내 서둘러 목구멍에 뿌린다.


씨익 씨익


미약한 스테로이드 성분이 기관지를 지나가 폐를 건너 한 바퀴 돌고 나올 때 비로소 녀석의 손이 약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산소를 들이마신다. 지긋하게 오는 두통과 약효로 인해 발병한 심근박동이 나를 다시 눈 뜨게 만든다. 나는 이 모든 것이 그저 하나의 꿈이자 평소와 다름없는 악몽이길 빌었다. 모든 것이 그저 한순간의 연극에 지나지 않기를 고대한 것이다.

귓바퀴에 얼음이 송골송골 맺을 때쯤 자리에서 일어나야겠다고 다짐하며 다시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다. 어느새 죽이 된 채 나와 눈이 마주친 물밥이 옅은 미소를 띤다.



6.

​“이 학교 도서관은 정말 크다니까. 선생들이 좆같은 것만 빼곤 참 좋은데 말이야.”


​국립대학교의 특성상, 도서관의 규모는 한국에서 경험했을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다른 게 있다면 피부색의 종류가 기존의 RGB로는 파레트를 채우기에 부족하다는 정도랄까? 웅성거리는 백색소음을 지나 1관 L열로 몸을 이끈다.


나의 키도 작은 편이 아닌데, 이곳에 있는 책장은 그것의 3배에 이르렀다. 코스트코와 같은 대형매장이 떠오른다. 끝을 알기 어려울 정도로 뻗은 소나무의 숲,. 아니 오히려 그게 더 나을 수도 있겠다. 실제로 나무로 빚은 책장이었으니까.


아카시아향과 갓 구운 책의 냄새. 거기에 온갖 인종들의 각양각색의 체취가 식욕을 불러 일으킨다. 나는 리처드 포스너의 일대기를 그린 무명작가의 책을 꺼낸다. 크기는 A2정도가 됐으며 쪽 수는 360쪽에 달하는 듯 했다. 그림이라곤 겉표지를 장식한 어느 연방대법원 대법관의 뒷모습뿐이었지만 충분히 읽어볼 만해 보였다.


7.


​주머니에 돈이 있었나. 도서관이지만 서점의 역할도 겸했던 이 공간에선 계산대의 존재가 전혀 이상하지 않은 듯 보였다. 대출코너에 놓인 바코드 기계와 달리, 결제코너에 놓은 그것은 먼지도 하나 없이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이었다. 양손에 힘겹게 든 책을 조심히 내려놓는다.


쿵.


바코드를 찍으려 이리저리 책을 움직이게 하는 모습에서 흡사 동물원 조련사가 물개를 타일르는 장면이 연상됐으니, 내가 가는 곳은 전부 동물농장이 되는 듯 싶었다. 겨우 바코드를 인식해 화면에 뜬 결제금액을 가지고 있던 노란 체크카드로 긁는다.


찍.


생각보다 비싸진 않았다. 평소에 구매해 오던 책들과 가격이 다를 바 없었으니 말이다. 뒤에서 기다리는 ‘학생’의 울부짖음이 들려올 때 쯤 자리를 떠 걸음을 재촉한다.



8.


​“이곳에 당신이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아. 당신이 보고 싶어.”


과거의 ‘나’가 지금 내 앞에 있었다면, 다시 한번 말려보고 싶었다. 제발 그러지 말아달라 말이다. 뒤늦은 후회는 수많은 인파가 내려오던 에스컬레이터로 시선이 옮겨질 때 자연스레 증발했다.


아직 귓바퀴엔 얼음이 맺히지 않은 걸 보아 시간이 있어 보였다. 5kg이나 될 듯한 ‘착한’ 아령을 양손에 든 채, 엘리베이터를 기다린다. 주변의 사람들이 회빛의 먼지로 변할 때 두꺼운 철문이 열려 비로소 통로를 지날 수 있었다. 쇠문이 닫히며 세상이 멈춘다.


고요해진 그 날 밤의 기억은 ‘나’에겐 그렇게 죽어버렸다.


9.


​“다시 한번 생각해봐.”

​“아냐 이미 결정한 거야. 나는 안나갈꺼라고. 그 망할 것의 학교 따윈.”

​“알았으니 진정해. 그 칼 좀 내려놓으라고. 야.”


​사이렌 소리가 온 지천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뒷산에서 디스 한갑을 뒷주머니에 넣어둔 호랑이도 조용히 가로등에 숨어 이 장면을 목격하고 있었다. 경찰차의 경광등. 빨간색과 파란색은 어느새 공통분모가 되어 열렬히 교미를 즐기고 있었다. 저편너머, 한손에 든 확성기로 ‘이방인’과 ‘대화’하는 경찰 권력의 모습에선 그를 향한 욕망의 눈초리가 자외선(紫外線)마냥 계속 내리쬐고 있었다.


칼을 자신의 목에다 겨눈 그 자에겐 더이상 그것을 막아줄 오존층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인질극도 아니었다. 사라진다 해도 그자 한명 뿐이었다. 다음날 헤드라인을 장식할 부고란엔 이미 유명인의 이름 석 자가 게시되기로 약속되었으니, 그야말로 잊혀 질 죽음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담배 한 갑을 다 태운 금수(禽獸)는 어느새 하얀 재가 되어 사라진 자신의 검은 줄무늬를 희끗하게 쳐다본다. 시간의 흐름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비로소 그놈은 고개를 돌려 산으로 향한다. 두발로 걷는 것보단 네발로 기는 것이 더 나은 모양이었는지 이내 사륜구동으로 전환한 SUV가 되어 힘차게 산을 오르고 있었다.


만약 현장에 있던 그가 이 녀석을 보았다면 어떤 걸 떠올렸을까. 과거 어느 이국에서 본 바이슨을 떠올렸을까?



10.


담배 연기가 자욱한 주택 단지는 어느새 공장의 스모그와 결합돼 찐득한 회빛 콘크리트의 장면을 현출(現出)하기에 이르렀다.


숨쉬는 것 조차 매캐해진 나는, 어쩌면 살기 위해 다시 한번 주머니에 넣어둔 벤토린을 꺼내야만 했던 건지도 모른다.


오른쪽 손에 든 단도를 계속 목에다 겨눈 채, 왼손을 주머니에 가져다 놓아 본다. 텅빈 플라스틱의 무게감이 느껴질 때쯤 경쾌한 철분의 향취가 두뇌를 파고들었다.

탕.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바닥은 물밥처럼 질척여진다. 눈에서는 눈물이, 코에서는 콧물이, 그리고 따스한 복부에선 핏물이 나오기 시작한다. 동시적으로 나타난 3색이 회색의 세상을 유린(蹂躪)하기 시작할 때, 귓바퀴에 드디어 얼음이 맺히기 시작했다.


송골송골.


눈을 질끔 감아야 한다. 지금이 기회야. 낯선 이의 손이 강하게 내 얼굴을 두 번 내리친다. 찰싹. 퍽. 온갖 물들이 벽을 더럽혀질 때, 고통이 잦아들었음을 감지했다. 아니 사라졌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 듯 싶었다. 나는 눈을 뜬다.



11.


​“학교에 안 갈 거야.”

​“그래. 그렇게 해. 너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거야.”


​두 자매는 양옆에서 그를 지긋이 바라보며 조언을 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미래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좋은지, 건강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 어째서 중요한지 말이다. 어머니라는 작자는 그저 묵묵하게 그들의 대화를 관망했다.

가스레인지 근처에서 나오던 하얀 수증기도 어느새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들의 대화에 집중할 때, 나는 괜한 심통을 부렸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어째서 나는 이렇게도 어리석었는가. 두 손을 머리 양쪽에 옴폭 패인 언덕에 갖다 대 속절없는 자책을 시작한다. 커져 가는 진공청소기의 소리가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고주파의 백색소음을 선사하며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킨다. 오페라의 막을 암시하듯, 눈물은 커져가고 몸의 무게는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끊임없는 자기혐오가 그 끝을 도저히 알 수 없을 때, 그의 울부짖음이 멈춘다. 대지는 숨을 죽였고 하늘은 팔짱을 낀 채, 유리창을 통해 몰래 쳐다본다.


​“이래서는 안 될 것 같아. 미안해. 모두에게. 나는 도저히 못 견디겠어. 나를 용서해줘.”



12.


​“그거 아세요?”

10살로 보이는 어린 꼬마애가 나이든 노신사에게 정중히 묻는다.


​“무엇이 말입니까?”

기대승에 답한 조선의 한 위대한 유학자처럼 그는 공손히 답문을 올린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래요.”


​“아. 그것 말입니까. 저도 들은 바 있습니다. 굉장히 괜찮은 표현이죠. 저 역시 그러한 경험을 숱하게 해봤답니다.”


​“정말인가요? 어떤 기분인지 저에게도 알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저도 알고 싶습니다.”


천진난만하고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의 표정에선 어떠한 근심도 걱정도 볼 수 없었다. 노신사는 지긋하게 깊은 미소를 띄우며 설명을 이어간다.


​하늘의 잿빛 구름이 사라지고 어느새 밝은 달빛이 그 둘을 감싸기 시작한다. 카메라가 크레인을 뒤로 당겨 배우들로부터 거리를 두기 시작할 때, 감독의 귓가엔 얼음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13.

​컷.


​감독의 사인(sign)이 떨어짐과 동시에 세상의 조명이 꺼졌다. 노신사의 인자한 미소는 급료를 계산하는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의 건조한 표정으로 회귀했고, 천진난만했던 아이는 엄마를 찾으며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광경을 무대 밖, 그러니까 관객석도 아닌 어둠 속의 배전반 근처에서 웅크리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의 연극은 끝났지만 나의 연극은 아직 2막 1장 어디쯤을 헤매고 있었다. 무대 뒤편의 곰팡이 냄새는 나에게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그것은 마치 오래된 도서관의 책장 사이에서 맡았던, 썩어가면서도 생명을 유지하는 모순적인 향기였다.


​주머니 속의 벤토린을 만지작거린다. 차가운 금속성이 손끝에 닿자, 미약한 전류처럼 안도감이 흘러들었다. 인생이 비극이든 희극이든 그것은 찰리 채플린이나 셰익스피어 같은 위인들이나 할 법한 고민이다. 나에게 인생은 그저 다큐멘터리다. 그것도 편집 없이 롱테이크로 이어지는, 지루하고 때로는 역겨운 자연 다큐멘터리.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나는 포식자가 아닌, 구석진 굴에서 썩은 고기를 주워 먹는 하이에나거나, 아니면 그마저도 되지 못해 흙 속에 파묻힌 지렁이쯤 될 것이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데, 나는 밟히면 그저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노란 내장이 아스팔트 위에 흩뿌려지는 상상. 그것은 혐오스럽다기보단 차라리 예술적이었다.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처럼, 무질서 속에서 어떤 질서를 찾아내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처럼 보일 테니까.


14.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멀었다. 물리적인 거리가 아니라 심리적인 거리 탓이다. 현관문을 열면 쏟아져 나올 정적(靜寂)이 두려웠다. 아무도 없는 집, 혹은 모두가 잠든 집. 차라리 아무도 없는 편이 나았다. 누군가의 숨소리가 들리면 나는 죄인처럼 발소리를 죽여야 했으니까.


노란색 센서등이 켜진다.


깜빡. 깜빡.


수명이 다해가는 전구는 필사적으로 빛을 토해내고 있었다. 신발장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더욱 낯설다. 헝클어진 머리, 초점 없는 눈동자, 구부정한 어깨. 저것이 나인가? 아니면 나의 껍데기인가. 거울 속의 사내는 나를 비웃는 듯 입꼬리를 살짝 올린다.


​"너는 아직도 거기 있니?"


​나는 중얼거린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당연하다. 거울은 소리를 반사하지 않으니까. 오직 빛만을, 그것도 왜곡된 빛만을 반사할 뿐이다. 방으로 들어와 책상 앞에 앉는다. 노트북의 전원을 켜자 익숙한 윙 소리가 들려온다. 팬(fan)이 돌아가는 소리. 녀석도 숨을 쉬는 것이다. 뜨거운 열기를 내뱉으며, 자신이 살아있음을, 작동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15.


나는 한글 파일을 연다. 하얀 화면이 눈을 찌른다. 백색의 공포. 채워지지 않은 여백은 나에게 무언가를 쓰라고, 토해내라고 강요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배설(排泄)이다. 뱃속에 가득 찬 오물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행위. 냄새나고 더럽지만, 하고 나면 시원해지는 생리 현상. 나는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린다.


타닥. 타닥.


플라스틱 자판이 부딪히는 소리가 경쾌하다. 이 소리만이 나를 구원한다. 활자들이 모니터 위에 박힐 때마다, 내 안의 어둠이 조금씩 옅어지는 착각이 든다. 착각이어도 좋다. 그것이 나를 살게 한다면.



16.


​며칠 전,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먼 친척이라는데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이었다. 영정 사진 속의 노인은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죽음 앞에서 저렇게 웃을 수 있다니, 그는 행복한 삶을 살았을까? 아니면 사진사가 시키는 대로 억지 미소를 지었을까?


향 냄새가 코를 찔렀다. 국화꽃의 비릿한 향기. 노란 국화와 하얀 국화. 죽음의 색은 검정이 아니라 노랑과 하양의 조합이었다.


육개장을 먹으며 생각했다. 붉은 국물 속에 잠긴 고사리와 토란대. 이것들은 죽은 자의 살과 뼈를 닮았다. 밥을 말아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넘긴다. 옆자리에서는 누군가가 소주잔을 기울이며 껄껄거리고 있었다.


죽음 옆에서 삶은 더욱 뻔뻔해진다. 식욕과 성욕, 그리고 수면욕. 짐승의 본능들이 장례식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들이 역겨웠지만, 동시에 부러웠다. 그 단순함이, 그 무신경함이.


​"산 사람은 살아야지."


​누군가 내뱉은 그 말이 비수처럼 가슴에 꽂혔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죽지 못해 사는 사람은, 어쩌면 숨만 쉬고 있을 뿐, 이미 영혼이 죽어버린 사람이겠지. 장례식장을 빠져나와 담배를 피웠다. 연기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내 영혼도 저렇게 흩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흔적도 없이, 냄새도 없이.




17.

​다시 글을 쓴다. 이번에는 소설이다. 주인공은 우울감을 가지고 사는 고래. 52헤르츠 고래. 다른 고래들과 주파수가 달라 소통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고래.


녀석은 깊은 심해를 유영한다. 빛 한 점 없는 칠흑(漆黑)의 바다. 그곳에서 녀석은 끊임없이 노래를 부른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노래를.


내 소설 속의 고래는 결국 뭍으로 올라온다.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 위해서. 해변에 누운 거대한 몸뚱이. 사람들은 구경하러 몰려든다. 사진을 찍고, 신기해하고, 안타까워한다. 정작 고래가 겪었을 고통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볼거리일 뿐이다. 고래의 눈은 말라간다. 눈물이 말라버린 눈동자에 파란 하늘이 비친다. 죽어가는 순간에야 비로소 하늘을 보는 것이다. 바다에 살면서 하늘을 동경했던 녀석의 아이러니.


나를 닮았다. 아니, 내가 고래를 닮은 것인가. 숨이 막혀온다. 벤토린이 필요하다.


칙. 칙.


약물이 기도로 넘어간다. 씁쓸한 맛. 이것이 삶의 맛이다. 쓰디쓴, 뱉어내고 싶지만 삼켜야만 하는.

모니터 속의 고래가 나를 쳐다본다.


​"너도 외롭구나"


​녀석이 묻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외롭다. 사무치게 외롭다. 뼈마디가 시릴 정도로. 하지만 괜찮다. 이 외로움은 나의 것이다. 누구에게도 뺏기고 싶지 않은 나만의 영유물(領有物)이다. 나는 이 우울을 사랑한다. 이것이 나를 증명하니까. 내가 아프다는 것은,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니까.




18.


​창밖이 훤하다. 밤을 꼴딱 새운 모양이다. 새벽의 푸르스름한 빛이 방 안으로 스며든다. 노란 형광등 빛과 섞여 기묘한 색을 만들어낸다. 멜랑콜리의 색은 노랗다고 했던가. 아니, 멜랑콜리의 색은 새벽의 푸른빛을 머금은 노란색이다. 멍든 바나나 같은 색. 상처 입은 과일의 색.


배가 고프다. 위장이 꼬르륵거리며 아우성을 친다. 우울해도 배는 고프다니, 인체의 신비란 참으로 잔혹하다. 부엌으로 나간다. 냉장고를 연다. 김치통, 반쯤 남은 우유, 말라비틀어진 사과 한 쪽. 사과를 꺼내 한 입 베어 문다. 퍼석하다. 수분이 빠져나간 사과는 스티로폼을 씹는 것 같다. 그래도 씹는다. 씹어야 산다.


식탁 위에 놓인 약봉지를 본다. 아침에 먹어야 할 약들. 항우울제, 수면제, 위장약. 알록달록한 알약들이 예쁘기도 하다. 저 작은 알갱이들이 내 뇌를 조종한다니, 우습지 않은가. 나는 약을 입안에 털어 넣고 물을 마신다. 꿀꺽. 목울대가 움직인다.


다시 방으로 들어온다. 침대에 눕는다. 이불의 감촉이 서늘하다. 눈을 감는다. 여전히 세상은 몽롱하다. 하지만 어제의 몽롱함과는 다르다. 조금은 더 차분하고, 조금은 더 건조한 몽롱함. 나는 이 기분을 즐기기로 한다. 내 안의 어둠이 나를 잠식하지 않도록, 내가 어둠을 덮고 자는 것이다.




19.


스피커에서는 여전히 재즈가 흐른다. 쳇 베이커(Chet Baker)의 트럼펫 소리. 그의 연주는 슬프지만 아름답다. 우울도 그랬으면 좋겠다. 슬프지만, 누군가에게는 아름답게 보였으면 좋겠다. 아니, 굳이 남에게 보일 필요는 없다. 나 스스로에게만이라도.


​나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 나는 바이슨을 타고 달린다. 스웨덴의 들판을, 끝도 없이 펼쳐진 초원을. 바람이 내 얼굴을 때린다. 차갑고 상쾌한 바람. 바이슨의 거친 숨소리가 들린다. 녀석의 근육이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우리는 달린다. 태양을 향해, 저 노란 빛의 근원을 향해. 내 귓바퀴에 맺혔던 얼음이 녹아내린다. 물방울이 되어 뺨을 타고 흐른다. 그것은 눈물이 아니다. 해빙(解氷)의 증거다.




20.


잠이 쏟아진다. 의식이 흐려진다. 나는 깊은 심해로, 혹은 저 높은 우주로 부유한다. 그곳에는 중력도, 의무도, 타인의 시선도 없다. 오직 나만이 존재한다. 나와 나의 우울만이.


​멜랑콜리의 색은 여전히 노랗다. 하지만 이제는 그 노란색이 싫지 않다. 그것은 봄의 개나리색이기도 하고, 가을의 은행잎 색이기도 하니까. 시작과 끝을 모두 품은 색.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색. 나는 그 색을 입고 오늘을, 또 내일을 살아갈 것이다. 몽롱한 정신을 붙잡고, 벤토린을 손에 쥔 채,


묵묵히,


아주 묵묵히.



2020. 4. 15. 初

2025. 12. 14. 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