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만자, 그를 위한, 한편의 장송곡

불쏘시개 연작 - 13번

by 소는영



"모든 것은, 결국 끝난다. 그것이 '능동'이든 '피동'이든 간에,"

"Everything, eventually, ends. Whether that ending is 'active' or 'passive'."



"그렇다면 삶과 죽음의 연속성조차, 사라질 수 있을까."

If that is so, can even the very continuity of life and death disappear?






새벽. 찬 바람이 폐부에 꽂힌다. 날이 추워졌나. 아니다. 지금은 이런 걸 차분히 논하고 있을 시간이 아니. [지금, 현재] 내 눈앞에 놓여진, 내 마음의 감정에 대해 솔직하게 적어야 할 때다. 어줍짢은 텍스트 몇 글자로, 평소에 내가 해왔던 것처럼 본심을 숨겨서 해소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나는 기만자다. 내가 그렇게나 혐오하고 질책하던 ‘속이는 자’ 말이다. 구태여 사기꾼과 다른 게 있다면 타인을 대상으로 경제적 이득을 취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과 그 대상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점 정도일 것이다. 차분하게 생각하자. 내가 누군지 차분히 생각해보는 것이다. 심장이 요동치는 소리, 귓가에 맴도는 심해의 파랑(波浪), 손이 부들거리는 작금의 사태속에서 나는 알아야만 한다.





수정, 바라보는 아이.png 속이려는 자들, 그리고 속지 않으려는 자


나는 무엇인가. 최대한 기억하자. 나는 누구인가. [냉정하게 현상을 분석하고 대책을 판단하는 A]인가. 아니면 [슬픔에 잠식돼 눈물을 멈추지 않는 B]인가, 만약 그것조차 아니라면, [모든 것을 방기(放棄)한 채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C]인가? 셋 중에 하나에 속하기는 할까?


모르겠다. 적어도, 속한다고 믿고(believe) 싶을 뿐이다. 만약 가능하다면, 최소한 이 셋 중에서 고르고 싶다. 하나가 아니면 두 개라도 말이다.


나 자신과 싸우는 것만큼 힘들고 역겨운 것도 많지 않을 것이다. 어느 대상까지 신뢰할 수 있는가에 대해 논할 때 ‘자기 자신’은 당연히 포함되지 않으니 말이다. 자신의 뇌를 의심하는 자는 항시 녹음을 생활화하며 복기를 습관처럼 행한다. 기억을 불완전하고 ‘순수’하게 왜곡될 수 있는 소지가 높기에 그렇다.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은밀하게 이뤄지는 속임수는 늘 경계해야 한다. 나에게 있어 그러한 녹음장치는 바로 이 Word 프로그램이었다. 누구도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의 감정을 [믿을 수 없어 믿지 못하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단지 [기록해야만] 한다는 정언명령의 준수뿐이었다. 격동의 파도에 휘말려 나조차 목숨을 잃어버리는 결말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그래야만 했으니까.






고민하는자.png 때로는 고민의 깊이가 얕던, 어린 시절의 그날로 돌아간 모습을 회상한다. 돌아갈 수 없기에 소중한 건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지금 내가 고민하는 것은 무엇인가. 꿈, 불면증, 우울감, 미래의 불투명성, 아니면 가까운 이의 죽음일까? 만약 하나를 골라야 할까. 그렇다면 지금은 ‘이별’을 화두로 삼고 싶다. 떠난다는 의미를 지닌 이 단어는 사용하는 맥락에 따라 긍정과 부정의 뉘앙스가 결정된다. 부정적인 대상이 앞에 놓여있을 땐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고 긍정적인 대상일 땐 그 반대로 적용된다. 그렇다면 ‘죽음’은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


[별세], [작고], [순직], [극단적 선택], [사망], [자진(自盡)]등, 죽음을 상정하는 단어들은 지천에 널려있다. 이들은 하나같이 사회에서 정한 『긍정』과는 거리가 멀며, 사회가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어렴풋이 볼 수 있다. 한 공동체 내에서 죽음이 가지고 있는 크기를 알고 싶다면, 그곳의 장례식을 참관하라는 말마따나, 생(生)과의 이별을 터부시할수록 장례식은 거창해지곤 한다.


주변 사람에게 널리 알려, 작고한 이를 저 멀리 보내고 있는 작금의 우리 모습을 보면, 단언컨대 죽음은 부정의 파토스(情念)로 점철되어 있다. 그렇다면 ‘죽음’ 그 자체가 부정적인 것으로만 비춰질 수 있을까. 그건 또 아니다. 수십 명의 무고한 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악인을, 넓디 넓은 광장의 한 가운데서 단두대로 공개처형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알 수 있다. 그 자를 죽여, 이 사회에서 사라지게 하라는 대중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을 때는 어떤가. ‘용서받지 못할’죄를 범한 이를 감옥으로 보낼 바에, 교수형에 처하게 하라고 할 때는 또 어떠한가. 이때의 '죽음'은 카니발적 요소를 띄며, 집단의 감정은 스포츠를 바라볼 때의 환호와 고조된 감정 속에서, '긍정'으로 승격된다.


전동차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의인을 바라볼 때는 어떤가. 결과적으로 [삶의 종착역]에 도달한 것은 매한가지 일테니, '똑같은 무게의 죽음'이라고 볼 수 있을까. 섣불리 답하기엔 너무도 어려운 주제다. 하지만 적어도, 그때 '죽음의 의미'는 앞서 본 사례와는 다르게 와닿는다는 점은 확고하다.



두개의 고민.png 박물관에 놓인 두 개의 그림, 죽음의 무게를 저울에 올렸을 때, 어느 쪽이 '먼저' 가라앉을까?


그렇다면 이를 '원칙과 구분되는,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로 치부하는 걸로 족한가. 아니면 아직 드러나지 않은 ‘예외’들도 있을테니, 긍정과 부정에 관한 나의 판단 역시 유보(留保)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전자는, '뭔가 대단한 권위에 기댄채 당장의 대답을 회피'한다는 점에서, 평소의 나답지 않으나 '사회적 관점'에서 볼 땐 너무나 [합리적이고 안전한] 선택지다. 반면 후자는, 언젠가는 반드시 [스스로, 단독자의 입장에서] 결단을 내려야하는 점에서, 남과는 다른, 이른바 '관종짓'에 익숙한 나 자신다운 행동이다. 하지만, '자유로운 선택'은 그에 상응하는, 아니 어쩌면 더욱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이 '사회의 시선'이든, '법의 심판'이든 무엇이든지 간에 말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묻는다면, '지금의 나'는 후자를 택하겠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하나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싶지 않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 자신이 무너질까 두렵기 때문'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이 가상의 공간에 국한된다는 전제 하에서만] 그럴 것이다. 평소의 나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는다. [어줍잖은 전제]를 방패삼아, 겉으론 현자인척 변장한채, 속으론 흔하디 흔한 소인배마냥 행동할 것이라는 점을 나는 인정한다.


이런 점에서, 나는 속이려는 자로서, [기만]의 화신(化身)이다.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결국 누군가를 잃을 수 있다는 것을, '나의 머리'는 이미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나의 가슴’은 다르게 작동하고 있었다. '양심'의 깊숙한 곳에 각인이라도 된 건지, 탈(脫)인간화로 전착(纏着)된건지,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어떠한 사안을 마주할 때, 본능적으로 결론부터 내린 후 그에 맞는 이유를 사후적으로 정리해 이를 ‘합리화’ 하려는 경우는 굳이 법 영역에 들어갈 필요 없이 일상에서 '은밀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만약 내가 누군가의 '죽음'을 듣고 운다면(Crying), 그것은 이미 두뇌가 지시를 내리기도 전에 이미 눈은 샘을 짜내고 있을테니, [사전조치&사후보고] 에 부합할 것이다. 하극상(下剋上)으로 해석할 필요조차 없다. '본능'이라는 최상위 권원을 판단논거로 제시하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땅히 울어야만 한다고 뒤늦게 결론]을 내렸다면 어떨까? 당황한 두뇌로선 차분히 상황을 지켜본 후 사후적 조치로서 [눈물샤워]를 명령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괘씸하기 짝이 없는' 눈을 멀게 하여 벌하게 할지도 모른다.


물론, [굳건한, 강철과 같은 의지]와는 다소 거리가 먼, '나'는, 그런 무시무시한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을 안다. "눈(目)은 시각영역을 전담하는 기관으로, 그 또한 인간의 오관(五官)을 담당하는 중핵 중 하나다. 따라서 두뇌의 명령은 부적법하니 기각함이 옳다"는 식으로 '정당화'하면 어차피 그만이다.


아니, 오히려 그러한 명령을 내린 '두뇌'가 잘못된 것이라고, 눈(目)이 기꺼이 '적극적 항변'을 할수도 있다. 두뇌가 「괘씸」이라는 단어를 쓴 순간, 이미 이성으로만 무장해야할 기관에서 감정을 판단논거로 제시했기 때문이다. '괘씸'하다고 말한 건 두뇌가 눈에게 가진 왜곡된 '시각'(아이러니하게도)이자 편향된 곡해(曲解)에 불과하다고 반박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결국, 차곡차곡 누적돼온, 두뇌로의 질책은 '마땅히 벌하여야 한다는' 상소문으로 승화되었다. 나의 몸은, 이때를 놓치지 않은 채 마치 조선의 사관(史官)마냥 상처를 한땀 한땀 소중하게 기록한다. 기록물을 '피드백'의 명목하에 두뇌 속에 쑤셔 넣는다. 그 중 '이성'과는 물과 기름과 같은 녀석들조차 '비판'의 테두리를 갖춰 송두리채 보내지고 있었다. 두뇌는 최대한 ‘이성적’으로 모든 걸 탐닉하고 배설한다.





동해안에 있는 불법 건조물 식당에서 화재로 사망한 7명의 일가족 뉴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진심으로 그들을 애도하고 추모했을까. 아니다. 그렇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안타까움은 들었을지언정, 단언컨대 장송곡을 부르진 않았다. '나와 관계없는 인물들'이고, 지금 이 순간 어딘가에선, 이미 많은 이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생으로부터 이별을 고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간, 과거 스페인 독감은 어떤가. 앞서 본 7명보다 몇만배는 훌쩍 넘는, 수천만명의 인간이 병마(病魔)에 쓰러졌다는 텍스트를 읽었을 때, 나는 그 사실에서 [눈물샘이 터져 마를 기미를 보이질 않았던 적]이라도 있었던가. 아니다. 전혀 그러지 않았다. 1950년에 발발한 비정한 참극을 접하였을 땐 어땠는지, 다시 한번 나 자신에게 물어본다.


아니 나는 울지 않았다. 설령 셀 수 없는, 많은 이들의 촛불이 꺼졌더라도, 나는 그것을 과거의 기록물로서 하나의 텍스트로만 보았을 것이 분명하다.


이건 이중적인 작태가 아니다.

그렇지? 아니겠지? 아니라고 말해줘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부탁이야. 제발.


나는 문제없다. 지금의 일도 다 지나가리라는 것을 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잘 될 것이다. 풍랑을 맞이하는 배도 폭풍우가 계속 몰아칠 것이 아님을 안다. 겨울 뒤에 봄이 온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다. 내 몸이 썩어 문드러져 가지 않는 한, 이 더러운 육신은 내일도 밥을 꾸역꾸역 목구멍에 처넣는 신성한 행위를 할 터이니. 다 지나갈 것이다.


그래. 아무렇지 않을 것이다.




나는 기만자다.

아니다. 너는 기만자가 아니다.

나는 기만자가 분명하다.

다시 말하지만, 너는 기만자가 아니다.

나는 기만자임이 틀림없다.


너는기만자다기만자가아니다.png 거울을 경계로, 안과 밖 중 어느 쪽이 '기만자'로서 속이려는 자일까?



그래. 너는 기만자다.

물론이다. 너는 기만자임이 틀림없다.

당연히도 너는 기만자일 수밖에 없다. 기만자여야만 하니까.






2020. 7. 11.





AI 이미지 프로그램 : Google Gemini Bana

이미지 제작을 위한 프롬프트 입력: 소는영

원작: '일기는 일기장에 쓰라길래', 2020, 소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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