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의 꿈, 꿈의 미완

불쏘시개 연작, 121번

by 소는영



신선한 공기를 맛 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눈을 뜨니 아담한 사무실이 보였다. 하얀 벽지와 책상 하나. 기다란 형광등이 환하게 아래를 내리 쬐고 있었다. 나는 방안에 누워있던 병상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주변을 좀더 살펴보았다. 아무도 없는 흰 공간 속에서 하얀 노이즈가 귓가에 맴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백색소음. 창밖은 어두웠으나 비는 내리지 않았다. 피곤한 몸을 다시 눕혀 서서히 눈을 감는다. 잔다.


침상.png 내 방은 426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방안의 왁자지껄한 소리에 몸을 뒤척이다 잠에서 깬다. 눈앞에 놓인 광경은 이질적이었다. 이름모를 노교수가 하얀 가운을 걸친 채, 책상에 앉아 조촐하게 책을 읽고 있었다. 애초에 환자 방안에 책상이 왜 있는지도 의문이었지만, 조용히 집중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침묵을 유지하였다. 내 방이라고 생각했다면, 누구인지 물어보는게 우선일듯 하였지만 말이다.



잠시 후 교수가 나를 바라보며 굳은 표정을 한 채 다가온다. 뚜벅뚜벅. 내 침상에 어지럽혀진 자료집들을 쳐다보며 내 자세를 지적한다. 이리 와서 앉아. 교수는 자신의 옆에 놓인 쇼파형 의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나를 오게 시켰다. 주섬주섬 자료들을 양손에 담았을 때 의식이 뚜렷해졌다. 나는 젊은 교수의 옆에 앉아 다시금 오른손에 힘을 준다. 하지만 제대로 필기에 들어가고자 했을 때 몸은 다시 한번 취침을 명령했다. 저항하고 싶은 나. 최소한의 발악이라도 하고자 눈을 한번 질끔 감았다 다시 떠본다. 하지만 그 찰나의 순간이 무대위의 광경을 변모시켰으니. 내 옆에 있던 교수는 사라져 있었고 빈 공간 속에 우두커니 놓인 책상 하나가 또렷이 나를 쳐다본다. ppt의 내용은 온데간데도 없고 하얀 백지뿐이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병상 밖을 나가보고 싶었다. 무엇이 밖에 있을까. 왼쪽 다리의 근육에서 고통이 느껴졌고 오른쪽은 신경이 마비된 기분이었다. 간신히 일어날 수 있을 때 천장의 형광등이 깜빡거리기 시작했고 어느새 흑이 백을 덮어버렸다. 나는 눈을 떴다. 그럼에도 눈은 감았다.




가면.png


병원 로비로 나가본다. 수 많은 인파들이 병원 곳곳을 누볐다. 휠체어에 탄 노파를 끄는 중년 남성의 주름살은 두껍게 파여있었고 꼬마아이는 뭐가 좋은지 캔디바를 손에 든 채 복도를 달리고 있었다. 마치 놀이공원의 한 풍경같았다. 잠시후 정문에서 5명 정도 되는 무리들이 한손에 피켓을 들고 소리를 친다. 아니 구호를 외친다가 좀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나는 시점을 옮겨 서둘러 그들의 옆 편의점 화초 속에 잠입한다. 탄압을 중지하라는 내용이 담긴 피켓에서 그들이 병원 소속임을 짐작했다.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씩 그들을 의식하기 시작했고 어느새 많은 이들이 우수수 모인 진풍경이 연출되기에 이르렀다.



나는 다시 2층으로 시점을 옮기려고 했으나 그 순간 병원관계자로 보이는 이들이 2층 에스컬레이터 앞에 나타났다. ‘당신들 누구요’. 검은색 양복을 입은 젊은 청년이 헐레벌떡 에스컬레이터를 내려온다. 땀이 너무나서 양복안에 입은 옷매무새가 어지럽혀져 있는게 눈에 보일 지경이다. ‘누군데 병원에서 행패질입니까. 당장 그만두세요.’ 애처로운 목소리였다. 다시 오른쪽 위를 곁눈질해보니 안경을 매만지며 헛기침을 하는 중년 무리배들이 보였다. 아마 고위급 간부겠지. 그들은 그저 손을 뒷짐지며 저 청년의 행동 하나하나를 주시한다. 인턴인가.



청년의 고함소리는 인파들에 묻혀 음소거나 다름없었다. 잠시 후 피켓무리들 중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와 주머니에서 한 종이뭉치를 주섬주섬 편다. 그리고 그것을 그에게 제시하며 말한다. ‘법원에서 발부한 소환장이오. 얌전히 따라오는 게 좋을 것이오’. 법원? 소환장? 그럼 저 사람들이 노조가 아니라 법원관계자라고? 청년은 쭈뼛하게 서있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겠지. 소환장같은걸 받고 제정신을 유지할 인간이 몇이나 될까. 잠시후 무리들은 정문을 향해 발을 옮겼고 청년을 그 뭉치를 든채 다시 헐레벌떡 계단을 뛰어올라간다. 손에 든 소환장을 본 간부의 얼굴은 낯빛이 어두웠다. 왜 그랬을까. 멀리서 고함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이어진 폭발. 병원 밖은 검은 연기의 지배하에 놓여있었다. 장삼이사(張三李四) 환자들은 모두 병원 안으로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테러인가? 아니면 그냥 무뢰배들의 농간인가? 병원은 혼비백산의 분위기로 고조됐다. 바닥에 놓인 캔디바는 이미 수차례 밟혀져 형체를 알 수 없었고 휠체어도 파손된 채 구석으로 내몰려 있었다. 잠시후 내 귓가에 정체모를 수신음이 들려온다. 내가 입고 있던 복장은 사라지고 쓰던 안경도 어느새 사라져있었다. ‘사태를 진압하라’ 뭐지. 이번에는 군경인가? 사태란 아마도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말하는 것이겠지. 나는 바깥으로 나가본다.


9룡성채자동차.png 자동차인가? 무언가가 빼곡하게 채워져있다. 양쪽.앞 모두?


그곳에서 내가 본 장면은 앞으로 두 번다시 보기 힘든 괴이함 그 자체일 것이다. 자동차들이 세로로 테트리스의 벽처럼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그 중 대개는 폐차상태에 놓였으며 녹슨 자국이 그윽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8차선 도로를 빼곡하게 막을 정도로 많은 차량이 동원됐고 그 높이는 못해도 30미터는 되는 듯 싶었다. 홍콩의 구룡성채와 흡사한 동벽이 나를 압도했다. 잠시후 폭약 냄새가 주변을 감돌더니 시각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총격이 오가는 전장에서 민간인들은 오발탄에 수차례 맞고 쓰러져있었다. 시야각 왼편에서 한 여성이 고통을 호소한 채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복부에 한발, 다리에 두발의 총알이 박혀있었다.



서둘러 시점을 옮겨 건물 외벽으로 이동한다. 부상자에게 마약성 진통제를 투여 한 뒤, 서둘러 병원 내부로 들어가라고 소리친다. 제한시간은 30분이며 그 이후부턴 생사를 장담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혔다. 엄청난 굉음이 바로 지척에서 들려왔다. 아래를 살펴보니 가드레일에 차량 2대가 파손된 채 회색 연기를 내고 있었다. 구출하기 위해 시점을 변환하는 순간, 빨간 물감이 차에서 나오고 있었다. 나는 확인하였다. 인지하였고, 그렇게 단념한다.





2020. 1. 20.





REFERENCE


AI 이미지 제작 도구 : Google Gemini Bana

프롬프트 제작 및 수정 : 소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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