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서고, 4편
등용문(登龍門), 그것을 얻어내고자 전국각지의 용사들이 온다. 이 용(龍)을 잡으려면, 제1관문을 수호하는 자, 바로 [자기소개서]를 격파해야만 한다.
용사의 [무뎌진 검은 검(Sword)]은, [날카로운 진홍의 창]에 쓰러진다. 그들을 덮고 있던, 아니, 그들이 스스로 입었던 하얀 갑옷은 이색(異色)으로 물들어간다. 난전(亂戰)속에서의 불순한 상상은 [선혈이 낭자한] 모습으로 승화되어, 검열현장으로 탈바꿈한다.
문득 든, [자기소개서]에 관한 생각, 어쩌면 지극히 사소하기만 한 주제였지만 왜인지 모르게도, 쓰고 싶어졌다.
[자기소개서]의 '자기'는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 여러 종류의 글 중 단지 하나에 불과한, 그저 목적에 맞는 글쓰기로 보는게 맞을지, 아니면 '연극 무대 위에 올라온 채' 강제로 스포트라이트화된 '주인공'으로 승격화한 [또 하나의 나]를 말하는 것인지, 이 또한 아니라면 [지금, 현재] 글을 숨쉬고 있는 [현실의 나]를 말하는 것일까.
순간적으로 쉽게 생각한 (나)는, 세번째 선택지를 고르고 싶었다. 하지만, 재고(再考)가 발사한 총탄의 궤적이 들려오자, [나]는 서둘러 방향을 선회했다.
적절한 타협으로, {나}는 "어떤 목적으로 [자기]를 소개하는 지에 따라, 표현되는 [자기]도 그에 맞춰 변모(變貌)한다"는 명제를 전제하였다. 그리고 자기소개서의 [자기]란, 마치 나를 잡아먹기 위하여, 내 목소리를 따라하는 장산범과 닮았음을, 나름대로의 소결(小結)을 하였다.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를 부디 뽑아주길 바라는, 변장한 가면]에 가까울 테지만 말이다.
자기소개서 각각의 항목에 적혀 있는 '모든 내용은 사실대로 적어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문구, 이른바 진솔성조건(眞率性條件을 볼 때 마다, 제1관문 수호자의 간계가 흉악하기 그지없다고 생각한다. ['솔직하게 적은 자'를 배척하기 위한 도구적 수사(rhetoric)]로, '작성자를 시험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는, [자기소개서]의 특징상, 최대한 [나를 뽑아주려는 담당자를 기분 좋게 하기 위하여], [정성스러운 포장지를 덧붙인 채로], 스펙이라는 이름의 선물과 함께 보여주는 것이라 판단했기에 그렇다. 수없는 고배를 마셔봐서 그런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뒤틀려서 왜곡되어버린 성정의 발현일수도 있다. 그냥 살아오면서 그렇게 '삐딱스러운' 면모만 봐서 그런건지도 모르겠지만.
자기소개서와의 만남. 우선은 처음이니까 "그냥" 솔직하게 쓰기 시작한다. 뭐라도 적어야, 텅 빈 절대영역을 조금이나 채울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모든 초안이 그렇듯, 첫 걸음은 언제나처럼 엉망진창이다. 두서없이 쓴 게 분명하고,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쓴 나조차도 말이다. 그래도 최대한 차분하게 [전체적인 글의 양상에서 발생한 화마(火魔)]를 1차적으로 소거한다.
이후, 어색한 주술관계라든가, 문맥과 어긋난 단어와 같이 하자있는 제품을 수정(혹은 퇴고)하는 2차적 소거를 통하여, 비로소 반출가능한 매끈매끈한 자기소개서가 만들어진다.
단순히 비문과 논리적 전개를 손보는 정도에 그치면 다행이겠지만, 아쉽게도 나의 초안은 일획(一劃)으로 완결된 적이 없었다.
내용수정은 피할 수 없었다. 목적에 맞는 글쓰기라면, 적어도 읽는 이의 기분을 좋게 해줘야 할테니까. 그렇게 사건(Event)은 이야기(Storytelling)로, 상관의 개연성은 인과의 필연성으로 초월한다. 마치 모든 것이 사전에 기획된 듯한, 애초부터 [나는, 숭고한 사명을 달성하고자 이 땅에 마땅히 태어난 국민]이 된 것처럼, 모든 것은 하나의 대서사시로서 오디세이아가 된다. 약간의 내용, 이를 뒷받침할 적절한 최소한의 증거로서 증명력, 그리고 질소뭉텅이처럼 빵빵한 포장지. 그것으로 자기소개의 삼위일체가 완비된다.
시점을 어떻게 설정하는가에 따라, 보이는 관점도 달라져 삭막한 배경조차 풍경으로 격상될 수 있다. 물론 카메라의 성능이 절대적으로 중요하겠지만, 최소한 피사체를 어떻게 촬영할지는 사진작가의 상대적 재량으로 여지를 둘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나를 바라보는 건, 거울 속 피조물을 제3자에게 형용하는 것을 기본골자로 한다. 그렇기에 너무나 어렵다.
주관(SUBJEKT)을 객관(OBJEKT)으로 치환하는 과정은 늘상 고역이다. 스토리의 결여는 자기객관화나 메타인지의 [결여]라는 죄목으로, 첨삭형(刑)에 처해진다. 그렇게 비판의 연속은 비난이라는 전주곡으로 변한다. 얼마 남지 않은 자존감은 마치 인간으로서의 최소함마저 부정당하는 듯한 조소(嘲笑)로 새겨진다. 그렇게 서사의 부재는 경험의 비존재이자 주체자로서의 인간실격이 된다,
이처럼 내가 [나]를 쓴다는 건, 종국적으론 철저하게 소거대상으로의 전락으로 귀결된다. [인위적, 비자연적, 작위적]을 은폐한 첨삭의 대가(大家)의 덕택에, '나'는 타자의 수정(KORREKTUR)으로, 비로소 [나다운 '존재(SEIN)로서의 나'가 될 수 있다.
기독교와 기독교적인 것이 상이하듯, 나와 나다운 것 또한 그와 다르지 않다. [자기소개서]는 부정성을 소거하며 긍정성만을 강조한다. 제1관문 수호자에게 바칠 공물로서 ', 그렇게 [자기소개서의 채워진 칸]은, [비워지기 위한 '작위적 소거'의 장]이 된다. 언젠간 자기소개[ZAGISOGAE]하라는 말을 들으면, 작위적 소거[ZAGWIjeok SOGEr]하라는 것으로 들리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나 다운게 뭔데!]를, 단지 시간축적으로 사라진 밈(MEME)이라 치부하기에는, 2025년 현재도 여실히 그 이빨을 날카롭게 선보인다. [나 다움]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대중관심(Catch)으로부터 멀어져, 언젠간 자유의 몸이 된다면, 그때서야 '나'가 '나 다움'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럼 비로소 '나'로의 견성(見性, Aufklärung)도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한다.
당분간은, [통상, 보통, 일반]의 렌즈로 바라본 거짓된 나(非我)만이, 작금의 '수정된 자기소개서'에 그려져있을 것이다.
생각 그만하고, 다시 자기소개서나 마저 고치러 가야겠다. [완성본.hwp]이라는 제목 뒤에 [_최종본_수정최후_진짜로_ㄹㅇ찐최종.hwp] 이 들어가야 함을 다시금 생경했을 때, 근심은 나이테처럼 그곳에 남아있었다.
2025. 9.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