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서고 47화
"보통" 이라는 단순한 단어가, 다시금 우리 앞에 놓여져 있다. 한번만 더 누군가에게 학습시키려는 과정을 상상해보자.
"보통"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나에게 묻는다면, 아는 단어와 개념, 사고의 현현(顯現)을 최대한으로 하고자 애쓸 것이다. 비단 나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닐 것이다. 남들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보통을 설명하고자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의 결과물은 서로 다르지 않고, 하나로서 일치할 것인가? 단언컨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설령 동일한 개념의 표지(標志)로서, 비가시적인 영역을 "볼" 수 있다면, 경우에 따라 상동(相同)함을 확인할 수 있겠지만 작금의 기술력으론 불가하기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나의 '보통'은, 나 이외의 존재에게 있어서 '보통'과 다를 것임은 분명하다.
익명의 두 사람, 갑(甲)과 을(乙)의 대화를 목격해보자. 그들은 [국민의 뜻이 무엇인가]에 대해 대화하고 있었고, 해당 주제의 하위개념으로 집단성(集團性)을 논하는 과정에서 "보통"이라는 단어가 문제되었다.
甲은 10명 중 7명 이상이 특정 상황에 해당될 때 보통이라는 말을 허용할 수 있음이 뒤늦게 밝혀졌다. 그러나 乙은 100명중 95명 이상이 특정 상황에 해당될 때 비로소 쓸 수 있었기에, 甲이 사용한 보통 이라는 단어가 적절치 못하다고 비판한다. 물론 乙이 그러한 허용범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甲은 당시에 전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이것은 단순한 오해인가, 아니면 더 깊은 곳에 뿌리박힌 구조적 문제인가. 우리는 이 질문을 통해, 언어가 작동하는 방식과 대화가 무너지는 지점을 응시해야 한다.
사람은 경험을 통해 습득한 "개념"을, 각자의 도메인에서 사용하는 "언어"로 치환한 후, 각자의 화폐로 사용한다. 가치보존적 성격으로서 의미에서의 "화폐"는 도메인 내에서의 활동에 멈추지 않은 채, 영역 밖으로 확장을 모색한다.
이 과정에서 마주하게 된 일련의 사람들은, 정의하기에 따라 [사회 내 인간]이 되거나 [사회 외 사람]이 된다. 인간이 사람(人) 사이(間)를 뜻한다는 건, 생각건대 사람과 인간을 구분할 수 있음에 기인한 사유는 아니었을지 사료한다.
영역 밖에서 마주친 사람은, 그렇게 [사회 내 인간] 으로서 "타자"로, [사회 외 사람]으로서 "타자 이외의 대상"으로 대분(大分)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정보. 그것을 공유할 수 있는 무리는, 집단으로서의 외관적 형질을 가진 것에 머물지 않고, "우리"라는 별호(別號)를 직함에 새기기 시작한다.
그렇게 "우리"는 [타자]와 [타자 이외의 사람]을 모두 ["우리" 이외의 여집합]으로 새로이 분류하려는, 획일화로서 폭력을 가시화하기에 이른다. 이 배타성은 은밀하게, 그러나 확고하게 작동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우리가 공유하는 개념, 우리가 인정하는 범위. 그 경계 밖에 선 자는 대화의 상대가 아니라 설득의 대상이 되거나, 더 나아가 배제의 대상이 된다.
앞서 언급하였듯, 언어라는 화폐는 가치보존의 수단을 넘어 도메인 외부로의 확장을 도모하고 있다. 화폐의 '예시'와 [화폐, money]의 차이가 있다면, 전자와 달리 후자는 양적완화를 통해 현금유통의 부족함을 채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자는 그렇지 않다.
언어는 화폐로서 교환수단(이때의 교환의 목적 및 대상은 도메인 내에서 축적한 지식과 정보를 총칭한다)은 필연적으로 문자를 구성요소로 삼아야하는데, 문자의 양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무한정으로 늘리는 방식으로, 단어를 새로이 창출하는 것도 일견 가능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어사용의 기본으로, "경제성"을 중요시하고 있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러한 지적이 과연 온당한지 의구심이 든다.
요컨대, 주어진 문자의 물리적 자원제약 하에서 우리와 우리 이외의 여집합이 사용할 수 있는 "단어"는, 중첩이 불가피하다. 같은 단어, 다른 의미. 같은 문장, 다른 함의. 이것이 언어의 숙명이다.
6.
"보통"이라는 일상언어를 사용한다고 했을때, "보통"이 구체적으로 어떤 개념상태를 함의하는지에 관하여, 서로 다른 도메인에서 살아온 A와 B가 우연히 마주쳐 대화를 한다고 생각해보자.
7.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보통"인가. 산술적으로 표현이 가능하다면, 몇 퍼센트까지 "보통"의 영역에 넣을 수 있는가. 70%인가, 95%인가. 아니면 단순 다수인 51%도 보통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는가.
그렇다면 "공감"이라는 개념은 또 어떨까. 엄밀한 의미에서의 '공감'을 사용하는 도메인(대표적으로 철학)의 인간은, 상대적으로 느슨하게 활용하는 도메인의 그들과 [같은 언어를 쓰지만 동시에 다른 언어를 쓰는 셈]이다. 한쪽에서 공감은 타자의 감정을 온전히 이해하고 그 입장에 서보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다른 쪽에서 공감은 단지 상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 어느 정도 이해한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으로 충분할 수 있다.
8.
그렇게 대화는 나와 타자, 나와 타자 이외의 사람의 도메인 간극을 좁히기 위한, 언어라는 이름의 화폐를 바꾸기 위한, 가히 화폐환전소가 된다. 환전소에서 우리는 각자가 가진 화폐의 가치를 확인하고, 상대의 화폐로 전환한다. 이 과정은 결코 일방적일 수 없다. 환율이 일방적으로 정해질 수 없듯, 언어의 의미 또한 일방적으로 강제될 수 없다.
나는, "보통"을 "일상적이며 비상(非常)적이지 않은채, 평균적인 일반 대중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크게 상이(相異)하지 아니한 수준을 칭함"이라고 정의할 것이다. 나의 발언은, 앞서 물은 것에 대한 답변이자 동시에, 나 이외의 존재를 상대로 자행한 공격으로서, [일상은 무엇인지], [평균적인 일반은 또 어떤 것인지], [상이하지 않다는 건 어느정도의 표준점이 기준인지] 등 그들의 반박에 방어를 해야 한다. 정중한 태도로서 '지적'으로 표출될 지, 아니면 엄혹한 자세로서 '무뢰배'와 같은 폭력으로 나타날 건진, 맞이하기 전까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9.
우리가 "쉽게" 쓴 용어, 단어조차 사람마다 개념의 정의는 분명 다를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미디어나 사회일반에선 거리낌없이 '보통'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데, 어째서 이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
10.
생각건대, 나는 이를, "통용된 신뢰상태"가 있음에 비로소 연유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통용된 신뢰상태"란 무엇인가.
바로 '사회에서 허용가능한 의미개념 범위 내에서, 특정 용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즉 서로가 서로를 쉽게 양해할 수 있는 정도에서, 규칙을 깨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대화에 임할 수 있는 물적, 인적 토대가 갖춰진 상황' 정도로 지칭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정의는 복잡해 보이지만, 그 핵심은 단순하다. 우리가 대화할 때, 상대방이 나와 완전히 같은 의미로 단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의 범위 안에서는 같은 것을 지칭하고 있다고 믿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믿음이 일방적이지 않고 상호적이라는 것. 상대방도 나를 그렇게 신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정의를 전제하고 다시 앞의 예시를 적용해보자.
11.
- 나(이하 乙)는 익명의 사람 갑(이하 甲)과 대화를 하는 과정에서, 보통 이라는 단어가 문제되었다.
- 甲은 10명 중 7명 이상이 특정 상황에 해당될 때 보통이라는 말을 허용할 수 있음이 뒤늦게 밝혀졌다. 그러나 乙은 100명중 95명 이상이 특정 상황에 해당될 때 비로소 쓸 수 있었기에, 甲이 사용한 보통 이라는 단어가 적절치 못하다고 비판한다.
- 물론 乙이 그러한 허용범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甲은 당시에 전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당시의 그들은 [국민의 뜻이 무엇인가]에 대해 대화하고 있었고, 해당 주제의 하위개념으로, 집단성(集團性)을 논하는 과정에서 그와 같은 비판을 마주했다.
이들 간의 "의견불일치" 쟁점은, 보통이라는 개념의 "통용된 신뢰상태"가 존재하는지 여부, 만약 존재한다면 어디까지 서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조율해야 하는지로 논의가 집중될 수 있을 것이다.
12.
전자는 "甲과 乙, 乙과 甲이 상호간의 신실한 존중에 기하여 대화와 토론에 임하고 있는지 여부"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며, 후자는 "내가 생각한 기준에 정확히 부합하지 않더라도 어느정도 선에서 타협하여 양해를 구할 수 있는지 정도"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13.
그렇다면 이 사안에서 그들에겐 "통용된 신뢰상태"가 존재하고 있었을까. 이것만으론 확인하긴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통용된 신뢰상태"가 전제되지 않으면, 본류에 놓여진 걸걸한 주제는 만져보지도 못한 채, 하류의 잔가지만 쳐다보다 논의가 끝난다는 것이다.
통용된 신뢰상태는 대화의 필요조건이다. 충분조건은 아닐지라도, 이것 없이는 대화가 시작조차 되지 않는다. 환전소에 가서 상대방의 화폐가 위조지폐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면, 환전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상대방도 나의 화폐를 의심하면, 거래는 성립하지 않는다.
14.
언어가 가진 근본적 한계로 돌아가보자. 주어진 문자의 물리적 자원제약 하에서 우리와 우리 이외의 여집합이 사용할 수 있는 "단어"는, 중첩이 불가피하다.
이 중첩은 단순히 같은 단어를 다른 의미로 쓴다는 차원을 넘어선다. 그것은 각자가 살아온 도메인, 경험한 맥락, 축적한 지식의 총체가 언어 안에 압축되어 있다는 뜻이다.
"보통"이라는 단어 하나에도, 甲이 살아온 세계가 담겨 있다. 그가 속한 공동체에서 70%는 충분히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수치였을 것이다. 반면 乙의 세계에서는 95% 이상이 되어야만 "보통"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었다. 그것은 각자가 속한 도메인의 엄격함, 정밀함, 혹은 포용성의 차이를 반영한다.
이러한 차이는 누가 옳고 그르다는 문제가 아니다. 甲의 70%가 틀렸거나, 乙의 95%가 과도하게 엄격하다고 단언할 수 없다. 그것은 각자의 도메인에서 형성된, 나름의 합리성을 가진 기준이다.
15.
문제는 이 차이를 인식하지 못한 채, 혹은 인식하더라도 상대방의 기준을 수용하지 않은 채, 자신의 기준만을 절대화할 때 발생한다. 甲이 乙의 95%를 "지나치게 까다롭다"고 비난하거나, 乙이 甲의 70%를 "너무 느슨하다"고 공격할 때, 대화는 논쟁이 되고 논쟁은 싸움이 된다.
환전소의 비유로 돌아가보자. 환전소에서 우리는 각자의 화폐가 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한다. 1달러가 1300원이 될 수도 있고 1200원이 될 수도 있다. 그 환율은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시장의 상황에 따라 변동한다. 중요한 것은, 환전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양측이 그 환율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언어도 마찬가지다. 甲과 乙이 대화를 지속하려면, 서로의 "보통"이 어느 정도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차이를 조율할 수 있어야 한다. "당신이 말하는 보통은 70%를 의미하는군요. 나는 95%를 생각했지만, 이 대화에서는 80% 정도로 합의하는 것이 어떨까요?" 이런 식의 조율이 가능해야 한다.
16.
그러나 이러한 조율은 통용된 신뢰상태가 전제될 때만 가능하다. 상대방이 나를 속이려 한다고 의심하거나, 상대방의 기준이 악의적이라고 판단하면, 조율은 불가능하다. 그저 자신의 기준을 관철시키려는 힘겨루기만 남을 뿐이다.
17.
소모전은 생산적이지 않다. 모든 소모전이 그렇다고 감히 말할 순 없겠으나, 적어도 위 사례에 있어선 서로에게 너무도 이로울 것이 없는 비(非) 제로섬 게임에 가깝다.
신뢰라는 것은 가히 잃는 건 쉽지만, 쌓는 건 너무도 어려운 개념이다. 이 지면에 고작 몇글자 따위로 설시할 수 있는, 쉽고도 편한 설명은 본질의 무게를 한없이 가볍게 만든다. 모래가루 한톨만으론, 다소 레토릭에 가깝지만, 역사라는 이름의 거대한 물줄기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신뢰가 무너지면 우리가 믿어온 가치. 정확히는 최소한의 규칙으로서 법, 그리고 사회에서 약속한 신뢰 사이의 간극이 허물어지게 된다.
그렇게 사고의 상이함, 차이에서 기인한 다양함은 획일화와 표준으로 강제된다. 대화와 토론의 영역에서 어느새 벗어난채, 옳고 그름을 따지는 사법(司法)의 장으로 이동하게 되는 것이다.
18.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점점 더 많은 문제들이 대화가 아닌 법정에서 해결되고 있다. 명예훼손, 모욕, 심지어 의견의 차이조차 법적 분쟁으로 비화한다. 왜 그런가. 대화를 통해 차이를 조율할 수 있다는 신뢰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지금은 사고의 상이함에서 나타난 서로간의 반목, 괄시에 기한 일련의 모욕과 명예훼손적 언행이 주제지만, 언젠간 사고의 상이함 그 자체에 대한 옳고 그름을 논하게 될 지도 모른다.
이것은 암울한 전망이지만, 결코 비현실적인 것은 아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사고의 다양성 그 자체를 위협으로 간주하고 단일한 사고만을 강제했던 시대가 있었다. 종교재판, 사상통제, 문화대혁명. 이름은 다르지만 본질은 같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의 기준만을 절대화하려는 시도.
나는 그런 시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바로 "통용된 신뢰상태"를 회복하고 유지해야 한다.
19.
나는 타자를 "이해"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진지하게 던져져야 한다. 완전한 이해는 불가능할지 모른다. 甲과 乙이 완전히 같은 의미로 "보통"을 사용하게 만들 수는 없다. 그들이 살아온 도메인이 다르고, 축적한 경험이 다르기 때문이다.
20.
그러나 부분적 이해는 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甲이 乙의 95%를 완전히 받아들일 수는 없어도, "乙은 나보다 더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있구나"라고 인식할 수 있다. 乙도 甲의 70%를 수용할 수는 없어도, "甲은 나보다 더 포괄적인 기준을 사용하는구나"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과 이해가 바로 대화의 출발점이다. 환전소에 가서 우리는 환율을 확인한다. "아, 오늘은 1달러가 1300원이구나." 그리고 그 환율을 수용하든지, 아니면 다른 환전소를 찾아보든지 결정한다. 중요한 것은, 환율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21.
대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상대방의 기준을 확인하고("당신의 보통은 70%를 의미하는군요"), 그것을 인정하고("나와는 다르지만 그것도 하나의 합리적인 기준일 수 있겠네요"), 그 위에서 조율을 시도한다("그렇다면 이 대화에서는 80%를 기준으로 삼는 것이 어떨까요?").
이 과정은 물론 쉽지 않다. 자신의 기준을 양보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양보가 아니라 조율이다. 환전소에서 환율을 받아들이는 것이 손해가 아니듯, 대화에서 상대방의 기준을 일부 수용하는 것도 손해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통해 대화가 가능해지고, 대화를 통해 더 큰 가치를 얻을 수 있다.
22.
그렇게 대화는 나와 타자, 나와 타자 이외의 사람의 도메인 간극을 좁히기 위한, 화폐의 환전소가 된다. 환전소에서 우리는 각자가 가진 화폐의 가치를 확인하고, 상대의 화폐로 전환한다. 이 과정은 결코 일방적일 수 없다. 환율이 일방적으로 정해질 수 없듯, 언어의 의미 또한 일방적으로 강제될 수 없다.
대화는 다름을 인정하며, 타협과 설득을 통해 구현된다는 점에서 가히 숙성을 함축한 시간적 개념에 다름없다. 급하게 결론을 내려고 하면, 대화는 논쟁이 되고 논쟁은 싸움이 된다. 천천히,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고, 그들의 도메인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그 위에서 공통의 기반을 찾아나가야 한다.
23.
그것에 대한 답을 위해서라도, 나부터 "우리"라는 이름의 배타성을 직시하여 경청의 시간을 늘려야겠다 다짐한다.
경청은 단순히 상대방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상대방이 사용하는 언어의 의미를, 그들의 도메인에서 이해하려는 적극적인 시도다. 甲이 "보통"이라고 말할 때, 그것이 나의 "보통"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甲에게 "당신이 말하는 보통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요?"라고 물어보는 것. 그리고 그 답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자신의 기준이 보편적이고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상대방이 다른 기준을 사용하면, 그것을 이상하다고 여기곤 한다.
나부터,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오늘도 각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2025. 12.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