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서고 48화
이제 두 형태의 반출생주의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다. 베나타의 반출생주의는 선험적(a priori), 보편적(universal), 형이상학적(metaphysical)이다. 그것은 존재와 비존재의 가치에 대한 추상적 추론에 기초하며, 경험적 조건과 무관하게, 모든 가능 세계에서 성립한다고 주장된다.
강용수 연구원이 묘사하는 반출생주의는 이와 달리, 경험적(a posteriori), 특수적(particular), 사회경제적(socioeconomic)이다. 그것은 '이 세상'의 구체적 조건—자본주의적 착취, 세대 간 불평등, 주거 불안정—에 대한 반응이며, 그 조건들이 변화하면 함께 변화할 수 있다.
두 층위 사이에는 일정한 논리적 관계가 있다. 베나타의 선험적 반출생주의가 참이라면, 경험적 반출생주의도 참이다. 모든 존재가 비존재보다 못하다면, 고통스러운 세계에서의 존재는 당연히 비존재보다 못하다.
그러나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경험적 반출생주의가 참이라고 해서, 선험적 반출생주의가 참인 것은 아니다. '이 세상이 지옥이므로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는 주장은, '어떤 세상에서든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를 함축하지 않는다.
18.
이 구분이 중요한 이유는, 각 층위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 다르기 때문이다.
베나타의 선험적 반출생주의에 대응하려면, 그의 논증 자체를 검토해야 한다. 비대칭성의 정당화, 존재하지 않는 자에 대한 가치 귀속의 가능성, '좋음'과 '나쁘지 않음'의 구분 등 형이상학적 문제들을 다루어야 한다. 이는 순수 철학의 영역이다.
경험적 반출생주의에 대응하려면, 그것이 지시하는 사회적 조건을 변화시켜야 한다. '낮은 임금, 비싼 집세, 불안한 미래'가 문제라면, 임금을 높이고, 주거를 안정시키고, 미래를 예측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해법이다. 이는 정치경제학의 영역이다.
두 층위를 혼동하면, 문제에 대한 진단과 처방이 어긋나게 된다. 선험적 문제에 경험적 해법을 제시하거나, 경험적 문제에 형이상학적 해법을 제시하는 오류가 발생한다. 동아일보 기사의 니체 처방이 바로 이러한 혼동을 보여준다.
동아일보 기사는 반출생주의에 대한 '해법'으로 니체의 사상을 제시한다. 기사에 따르면, '반출생주의에 대한 니체의 해법은 쇼펜하우어와 다르다. 그는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는 실레노스의 답변에서 오히려 "태어난 것이 최선"이라는 답을 얻고자 했다.'
기사는 니체의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구분을 소개한다. '세계의 원인과 결과를 논리적으로 따지려는 이성을 아폴론적인 것에 비유했다면, 포도주의 신 바쿠스로 경험되는 세계를 디오니소스적인 것에 빗댄다.' 그리고 니체가 그리스인의 염세주의 극복 방법을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찾았다고 설명한다.
기사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태어나지 않았더라면…"과 같은 삶의 부정을 넘어서는 방법은 와인과 음악이 곁들여진 디오니소스 축제를 즐기는 것이다. 이 세상을 합리적으로 따져 보는 이성의 힘이 약화될 때, 삶의 부조리나 모순 또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인생은 머리로 완벽하게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아니라, 놀이처럼 즐길 수 있는 축제여야 한다.'
니체의 처방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의 원래 맥락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비극의 탄생』(1872)에서 니체는 실레노스의 지혜에 대한 그리스인의 대응을 분석한다. 그리스인은 실레노스의 지혜—'인간에게 가장 좋은 것은 태어나지 않는 것'—를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이 비관적 지혜를 직면하기보다, 올림포스 신들이라는 '아폴론적 가상'을 창조함으로써 은폐했다. 니체에게 중요한 것은 이 양자—디오니소스적 공포(존재의 근원적 고통)와 아폴론적 가상(예술을 통한 미화)—사이의 '긴장'이었다. 비극이 위대한 것은 이 긴장을 유지하면서, 고통을 직시하되 그럼에도 긍정하는 '비극적 지혜'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Nietzsche, 1872/1999).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85)에서 니체는 '대지에의 충실함'을 강조한다. '나의 형제들이여, 대지에 충실하라! 그대들에게 저 너머의 희망을 말하는 자들을 믿지 말라. 그들이 알건 모르건 독을 퍼뜨리는 자들이다'(Nietzsche, 1883-85/2000). 여기서 니체가 비판하는 것은 '피안의 희망'—내세, 천국, 구원 등 초월적 위안—에 의존하여 현세의 고통을 견디려는 태도이다.
생각건대, 니체의 '운명애(amor fati)' 개념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운명애란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것을—고통을 포함하여—긍정하고, 그것이 영원히 회귀하기를 원하는 태도이다. 이는 단순한 체념이나 수동적 수용이 아니라, 적극적 긍정이다. 니체에게 이 긍정은 '강자의 덕'이며, 초월적 위안에 의존하지 않고 현세의 삶 자체를 가치 있게 만드는 의지의 표현이다.
21.
니체의 처방은 베나타의 선험적 반출생주의에 답하지 못한다. 베나타의 논증은 삶의 내용이 어떠하든, 삶을 어떤 태도로 대하든,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다. 이 논증에 대해 '축제처럼 즐기라'고 말하는 것은 범주 오류이다.
비유하자면, 베나타의 물음은 '계약 자체가 유효했는가'이고, 니체의 답은 '계약 조건을 즐기라'이다. 후자는 전자에 답하지 못한다. 동의 없이 체결된 계약을 즐긴다고 해서, 동의 없이 체결되었다는 사실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니체의 긍정은 이미 존재하는 자의 태도에 관한 것이다. '운명을 사랑하라'는 명령은 이미 존재로 던져진 자에게 주어진다. 그러나 베나타의 물음은 애초에 존재로 던져지는 것 자체의 정당성에 관한 것이다. 니체는 이 물음을 건너뛰고, 이미 존재하는 자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를 말한다.
그렇다면 경험적 반출생주의—'이 세상이 고통스럽기 때문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에 대해서는 니체의 처방이 유효한가? 부분적으로는 그렇다. 삶이 고통스러움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긍정하는 태도, 고통 속에서도 의미를 찾는 능력은 경험적 고통에 대한 하나의 대응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경험적 고통—'낮은 임금, 비싼 집세, 불안한 미래'—은 개인의 태도 변화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가? 기사가 진단하듯이, 이 고통은 '자본가의 노예 재생산'이라는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된다. 구조적 문제에 대해 개인적 태도 변화를 처방하는 것은, 문제의 원인과 해법의 주체가 불일치한다.
이것이 두 번째 한계로 이어진다.
23.
동아일보 기사의 진단을 다시 보자. '자본가들에게는 소비자와 노동자가 필요한데, 부모의 무책임한 출산을 통해 끊임없이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예가 만들어진다.' 여기서 문제의 원인은 '구조'이다. 자본주의적 생산 체제, 노동력의 상품화, 세대 간 부담의 전가 등 사회경제적 구조가 고통을 발생시킨다.
그런데 니체의 처방은 무엇인가? '와인과 음악이 곁들여진 디오니소스 축제를 즐기라.' 이는 '개인'의 태도 변화이다. 문제의 원인은 구조인데, 해법의 주체는 개인이다. 이 불일치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법철학의 언어로 표현하면, 이는 '정당화의 부담(burden of justification)' 전가이다. 구조가 개인에게 고통을 부과할 때, 정당화되어야 할 것은 그 구조이다. '왜 이 구조가 존재해야 하는가', '왜 개인이 이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가'에 대해 구조가 답해야 한다. 그러나 니체의 처방은 이 정당화 요구를 개인에게로 돌린다. 구조를 정당화하는 대신, 개인이 구조를 받아들여야 할 의무를 지게 된다.
24.
니체의 처방에는 규범적 논증이 없다. 다음의 질문들에 니체는 답하지 않는다.
첫째, 왜 개인이 구조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가? '축제처럼 즐기라'는 권고는, 개인이 구조적 고통을 견뎌야 함을 전제한다. 그러나 왜 개인이 그래야 하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둘째, 구조가 개인에게 고통을 부과할 정당성은 어디서 오는가? 기사의 진단이 맞다면—출산이 '노예 재생산'이라면—그 구조 자체가 정당화되어야 한다. 니체의 처방은 이 정당화 작업을 생략한다.
셋째, 구조를 바꾸는 것이 선차적이지 않은가? 만약 '낮은 임금, 비싼 집세, 불안한 미래'가 문제라면, 그리고 그것이 특정한 사회경제적 구조의 산물이라면, 논리적으로 해법은 그 구조를 바꾸는 것이다. 개인의 태도 변화는 구조 변화가 불가능하거나, 구조 변화만으로는 부족할 때 보조적으로 고려될 수 있을 뿐이다.
기사는 이 질문들을 우회한다. '인생은 수수께끼가 아니라 축제'라고 말함으로써, 정당화의 요구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려 한다. 그러나 이는 정당화의 '포기'이지 '완수'가 아니다.
니체의 처방이 갖는 가장 위험한 측면은, 그것이 부정의한 구조를 유지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마르크스의 종교 비판을 참조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1844)에서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고 불렀다. '종교는 억눌린 피조물의 한숨이요, 무정한 세계의 심정이며, 정신 없는 상태의 정신이다. 그것은 인민의 아편이다'(Marx, 1844/1975). 여기서 마르크스의 비판은 단순히 '종교는 나쁘다'가 아니다. 그의 물음은 '왜 사람들이 종교를 필요로 하는가'이다.
마르크스의 답은 다음과 같다. 현실이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종교는 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견딜 만하게 만드는 위안을 제공한다. 그러나 바로 그 위안이, 고통의 원인인 구조를 온존시킨다. 종교적 위안에 의해 현실이 견딜 만해지면, 현실을 바꾸려는 동기가 약화된다. 따라서 종교는 고통의 '완화'이자 동시에 고통 원인의 '은폐'이다.
동아일보 기사에서 니체가 하는 역할을 이 구조로 분석해보자. '축제처럼 즐기라'는 처방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견딜 심리적 완충재를 제공한다. 그러나 동시에, 고통의 구조적 원인—'자본가의 노예 재생산', '세대 간 불평등'—에 대한 질문을 우회한다. 마르크스가 종교에 대해 말한 것이 여기서도 적용된다. 디오니소스적 축제는 고통의 '완화'이자, 고통 원인의 '은폐'일 수 있다.
26.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막스 호르크하이머는 『계몽의 변증법』(1947)에서 문화산업을 비판한다. 그들에 따르면, 대중문화는 '긴장 완화'를 제공한다. 영화, 음악, 오락은 억압적 노동에 지친 사람들에게 재충전의 기회를 준다. 그러나 바로 이 재충전이, 다시 억압적 노동으로 돌아갈 수 있게 만든다.
아도르노는 이렇게 쓴다. '오락은 자본주의 후기의 노동 연장이다. 그것은 기계화된 노동 과정을 견딜 수 있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다시 그 과정에 대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만 추구된다'(Adorno & Horkheimer, 1947/2002).
'디오니소스적 축제'가 정확히 이 역할을 할 수 있다. 주말의 와인과 음악이, 월요일의 착취적 노동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장치가 되는 것이다. '축제처럼 즐기라'는 처방은, 구조적 착취를 견딜 만하게 만듦으로써, 착취 구조 자체를 유지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다.
27.
슬라보예 지젝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1989)에서 현대 이데올로기의 작동 방식을 분석한다. 과거의 이데올로기가 '순진한 믿음'에 의존했다면—사람들이 체제를 좋은 것으로 진정으로 믿었다면—현대의 이데올로기는 '냉소적 거리두기'를 통해 작동한다.
지젝의 정식화는 다음과 같다.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한다'(Žižek, 1989/2008). 현대인은 체제가 부조리하다는 것을 안다. 자본주의가 착취적이고, 사회가 불평등하며, 자신이 그 구조 속에서 소외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체제 내에서 행동한다. 이 냉소적 거리두기가 더 강력한 이데올로기인 것은, 비판 자체를 무력화시키기 때문이다. '이미 알고 있으니', 더 이상 분노하거나 저항할 이유가 없어진다.
동아일보 기사의 논리를 지젝식으로 재구성해보자. (1) '출산이 노예 재생산인 거 맞아'—구조적 진실을 인정한다. (2) '그래도 축제처럼 즐기면 되지'—냉소적 적응을 처방한다. 이 구조는 체제 비판을 선제적으로 해제한다. 문제를 이미 '알고 있으니', 분노나 저항은 순진한 것이 된다. 남은 것은 냉소적 긍정뿐이다.
28.
니체의 사상이 이데올로기로 전용된 역사적 사례가 있다. 니체의 여동생 엘리자베트 푀르스터-니체는 니체 아카이브를 장악한 후, 『권력에의 의지』를 편집하며 니체를 권위주의적으로 재해석했다. '강자의 권리', '운명애', '초인' 등의 개념은 현존 체제에 대한 순응, 나아가 지배 계급의 정당화 논리로 왜곡되었다(Holub, 1995).
반대로 1960-70년대 프랑스 사상가들—미셸 푸코, 질 들뢰즈 등—은 니체를 구조 비판의 도구로 재전유했다. 푸코의 권력 비판, 들뢰즈의 탈주선 개념은 모두 니체적이지만, 그들이 강조한 것은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이었다(Deleuze, 1962/1983).
이 대조가 시사하는 바는 명확하다. 니체는 맥락에 따라 정반대로 작동할 수 있다. 저항의 철학이 될 수도 있고, 순응의 철학이 될 수도 있다. 동아일보 기사의 니체는 어느 쪽인가? '축제처럼 즐기라'는 처방은, 구조적 문제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개인적 적응을 권고한다. 이는 니체의 순응적 전용에 가깝다.
29.
'낳음을 당했다'라는 표현이 한국 사회에서 특히 도발적으로 들리는 이유는, 효(孝) 이데올로기와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효는 유교적 전통에서 유래하여, 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가족 관계를 규율하는 핵심 규범으로 기능해왔다.
효 이데올로기의 핵심 전제는 다음과 같다. 부모는 자녀에게 생명을 '주었다'. 이 생명의 '선물'로 인해, 자녀는 부모에게 '빚'을 지게 된다. 이 빚은 '효'로 갚아야 한다—부모를 공경하고, 봉양하고, 그들의 뜻을 따름으로써. 이 구도에서 부모-자녀 관계는 비대칭적이다. 부모는 준 자이고, 자녀는 받은 자이다.
법원도 이러한 관념을 반영해왔다. 대법원은 여러 판결에서 '효도'를 '우리 민족의 미풍양속'으로 언급하며, 자녀의 부모 부양 의무를 당연시해왔다. 민법 제974조는 직계혈족 간의 부양 의무를 규정하고 있으며, 이는 효 이데올로기의 법적 표현으로 읽힐 수 있다.
'낳음을 당했다'는 표현은 이 구도 자체에 균열을 낸다. '당했다'는 피동 표현은, 출생이 자녀에게 가해진 사건임을 드러낸다. 생명을 '받은' 것이 아니라, '부과당한' 것이라면, 빚의 방향은 어떻게 되는가? 자녀가 부모에게 빚을 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모가 자녀에게 동의 없이 존재를 부과한 것이 아닌가?
'어떻게 부모에게 그런 표현을 할 수 있는가'라는 반응은, 효 이데올로기의 작동을 보여준다. 이 반응은 표현의 내용—출생이 피동적 사건이라는 존재론적 사실—을 검토하지 않는다. 대신, 표현 자체가 '불경'하다고 선언한다. 이로써 질문 자체가 봉쇄된다.
30.
효 이데올로기는 세대 간 권력관계를 은폐하고 재생산하는 기능을 한다. 부모 세대가 자녀 세대에게 기대하는 것—경제적 부양, 정서적 돌봄, 사회적 존경—은 효의 언어로 정당화된다. 자녀가 이를 거부하면, 그것은 '불효'가 된다.
그러나 이 구도는 세대 간 자원 이전의 비대칭성을 묻지 않는다. 부모 세대가 자녀 세대에게 무엇을 물려주었는가? 동아일보 기사가 지적하듯이, '현 세대의 경제적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게 될 미래 세대'가 있다. 부동산 가격 상승, 국가 부채 증가, 환경 파괴, 연금 고갈 등 부모 세대가 향유한 것의 비용이 자녀 세대에게 전가되고 있다면, '효'의 요구는 일방적인 것이 된다.
효 이데올로기는 이 비대칭성을 은폐한다. '부모는 자녀에게 생명을 주었다'는 전제가, 부모 세대가 자녀 세대에게 전가한 부담을 보이지 않게 만든다. 생명이라는 '선물'이 모든 것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낳음을 당했다'는 표현은 이 은폐를 해제한다. 생명이 '선물'이 아니라 '부과'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고, 세대 간 정의의 문제를 제기한다.
31.
반출생주의는 세대 간 정의(intergenerational justice)의 문제와 연결된다. 세대 간 정의란 세대들 사이의 자원, 기회, 부담의 공정한 배분에 관한 문제이다. 존 롤스는 『정의론』에서 '정의로운 저축 원리(just savings principle)'를 제안하며, 현 세대가 미래 세대를 위해 저축해야 할 의무를 논했다(Rawls, 1971).
한국 헌법재판소도 세대 간 형평의 문제를 다룬 바 있다. 국민연금 관련 결정(2001헌바82 등)에서 헌법재판소는 현 세대의 부담을 미래 세대에 전가하는 것의 정당성을 심사했다. 이는 세대 간 정의가 단순한 철학적 논의가 아니라, 법적으로도 다루어지는 문제임을 보여준다.
반출생주의는 세대 간 정의의 가장 급진적인 형태로 볼 수 있다. '미래 세대에게 부담을 전가하지 말라'는 요청의 극한이, '미래 세대 자체를 창출하지 말라'가 되기 때문이다. 만약 존재하게 된다는 것 자체가 부담이라면—베나타의 논증이 옳다면—출산은 부담의 최초의, 그리고 가장 근본적인 전가이다.
독일 윤리위원회(Deutscher Ethikrat)는 2013년 보고서에서 재생산의 윤리를 다루며, 생식의 자율성과 태어날 자의 이익 사이의 긴장을 분석했다. 특히 유전병이 있는 경우, 부모의 출산할 권리와 자녀가 고통을 피할 이익 중 무엇이 우선인가? 독일의 논의는 동의 불가능성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룬다. 반면 한국의 논의에서 효 담론은 이 문제를 체계적으로 우회해왔다.
32.
베나타의 반출생주의는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동의 없이 존재로 던져진 것의 정당성이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 니체의 긍정—'축제처럼 즐기라'—은 답이 되지 않는다.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와, 삶을 시작하게 된 것의 정당성 문제는 서로 다른 층위에 있기 때문이다.
베나타 논증에 대한 진지한 철학적 응답이 필요하다. 예컨대, '존재하지 않는 자에게는 권리가 없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권리는 존재하는 자에게만 귀속될 수 있으므로, 존재하지 않는 자의 '동의'나 '이익'을 운운하는 것은 범주 오류라는 것이다. 혹은 베나타가 전제하는 고통/쾌락 비대칭의 정당화가 불충분하다는 비판도 가능하다. 이러한 철학적 논쟁은 계속되어야 하며, '축제를 즐기라'는 처방은 이 논쟁을 대체할 수 없다.
33.
동아일보 기사가 묘사하는 경험적 반출생주의는 다른 종류의 질문을 제기한다. 착취적 사회구조의 재생산이 정당한가? '낮은 임금, 비싼 집세, 불안한 미래'를 만들어내는 구조가 왜 유지되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 '개인이 긍정하라'는 답은 적절하지 않다. 문제의 원인이 구조인데 해법의 주체가 개인이라면, 정당화의 부담이 잘못 배치된 것이다. 구조가 정당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구조가 정당화되지 못한다면, 변화되어야 한다.
물론 구조 변화는 쉽지 않다. 개인의 태도 변화가 구조 변화를 기다리는 동안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보조적' 역할이지 '대체'가 아니다. '축제처럼 즐기라'가 구조 변화의 '대신'이 되는 순간, 그것은 이데올로기가 된다.
34.
이 에세이는 반출생주의가 제기하는 물음에 대해 '축제처럼 즐기라'는 답이 왜 불충분한지를 논증했다. 남겨진 과제는 다음과 같다.
철학적 차원에서, 베나타의 선험적 반출생주의에 대한 진지한 응답이 필요하다. 동의 불가능성이 곧 부정의인가? 존재하지 않는 자에게 이익이나 해악을 귀속시킬 수 있는가? 고통과 쾌락의 비대칭성은 정당화되는가? 이 질문들은 형이상학과 윤리학의 교차점에 있으며, 단순한 태도 변화로 해소될 수 없다.
사회적 차원에서, 경험적 반출생주의가 지시하는 구조적 조건의 변화가 필요하다. '낳음을 당한' 이들이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하는 제도적 개입—노동권 보장, 주거 안정, 세대 간 정의의 실현—이 요청된다. 이는 정치경제적 실천의 영역이다.
한국 사회의 맥락에서, 효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필요하다. 효가 세대 간 정의의 물음을 어떻게 은폐해왔는지, '낳음을 당했다'는 표현이 왜 불경으로 취급되는지, 그리고 이러한 구조가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지를 물어야 한다.
35.
이 에세이는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반출생주의가 옳은지 그른지, 출산이 윤리적인지 비윤리적인지에 대한 최종적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이 에세이가 하는 것은 질문의 정리이다.
그러나 적어도 무엇이 답이 될 수 없는지는 명확해졌다. '축제처럼 즐기라'는 처방은, 선험적 반출생주의에 답하지 못하고, 경험적 반출생주의의 구조적 원인을 개인에게 전가하며, 이데올로기로서 부정의한 구조를 은폐할 위험이 있다. 이것은 충분한 답이 아니다.
2018년 LEET 시험장에서 마주한 베나타의 논증은, 8년이 지난 지금 다른 무게로 다가온다. 그것은 더 이상 논리 퍼즐이 아니다. '낳음을 당했다'는 표현이 불경이 아니라 존재론적 사실의 정확한 기술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사실 앞에서 '축제를 즐기라'는 말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것이 이 에세이를 통해 정리된 생각이다.
대화는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대화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질문이 무엇인지는 명확히 해야 한다. 이 에세이가 그 명확화에 기여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2026. 1.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