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서고 63화
1935년 베를린, 60대의 유대인 공무원 한 명이 법원 앞에 서 있었다. 그는 독일 제국 시절부터 30년 넘게 성실하게 일했고, 이제 은퇴하여 연금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그러나 나치 정권 하의 법원은 그의 청구를 기각했다. 판결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유대인에게 연금을 지급하는 것은 민족적 공공의식과 양립할 수 없으며, 따라서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한다."
근거 조문은 독일 민법 제242조였다.
"채무자는 거래관행을 고려하여 신의성실의 원칙에 따라 급부를 이행할 의무가 있다."
이 조항은 1900년 독일 민법 제정 당시부터 있던 것이었다. 35년 동안 이 조항은 계약법의 일반 원칙으로 기능했고, 누구도 이것이 인종 차별의 도구가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신의성실"이라는 표현은 중립적이고 윤리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나치 정권이 들어서자, 법원은 이 조항을 완전히 새롭게 해석했다. "신의성실"의 내용은 "민족감정"에 의해 채워졌고, "민족공동체의 이익"이 개인의 권리를 압도했다. 법 조문 자체는 한 글자도 바뀌지 않았다. 단지 해석이 바뀌었을 뿐이다.
이것이 헤데만이 경고한 일반조항 남용의 현실이었다. 그는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하기 직전에 출판한 책에서 입법자가 "신의성실", "선량한 풍속", "공공의 안녕질서" 같은 추상적 표현에 의존하면, 권력을 가진 자가 그 내용을 마음대로 채울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의 표현대로 "이렇게 계속된다면 비잔티움이 부상할 것"이었다. 비잔티움, 즉 전제주의적 자의가 법치를 대체하는 상황 말이다. 불행히도 그의 예측은 정확했다.
나치 시대 독일 법원의 판결문들을 읽다 보면 소름이 돋는다. 법원은 자신이 법을 어기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법을 "올바르게" 해석하고 있다고 믿었다. 어떤 판결은 이렇게 적었다.
"선량한 풍속 위반의 개념은 정권 장악 이후 지배적인 민족감정, 국가사회주의 세계관을 통해 그 내용을 부여받는다."
이 논리에 따르면, 법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정권의 이념에 따라 유동적인 것이었다. 일반조항은 바로 이 유동성의 통로였다. 구체적 규칙은 바꾸기 어렵지만, 추상적 원칙은 재해석만으로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전후 독일의 법학자 Bernd Rüthers 베른트 루더스는 1968년 출판한 기념비적 저작 "무제한적 해석"에서 이 과정을 철저히 분석했다. 그는 나치 시대 수천 건의 판결을 검토하며, 민법 제157조(해석), 제242조(신의성실), 제138조(선량한 풍속) 같은 일반조항이 어떻게 체계적으로 남용되었는지를 입증했다. 그의 결론은 충격적이었다. "방법론의 문제는 헌법의 문제다." 법을 어떻게 해석하는가는 단순한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누가 권력을 가지는가라는 헌법적 권력배분의 문제라는 것이다.
여기서 더 아이러니한 것은 헤데만 본인의 운명이다. 그는 일반조항의 위험을 경고했지만, 1936년 베를린 대학으로 이직한 후 나치 정권과의 관계가 깊어졌다. 1939년에는 독일 민법을 대체할 "민족법전" 제정 위원회의 주위원장이 되었다. 그는 "입법자로서의 아돌프 히틀러의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위대함"을 언급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어떻게 일반조항의 위험을 가장 날카롭게 지적한 학자가, 바로 그 위험을 실행하는 체제에 협력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은 단순한 개인의 도덕적 실패를 넘어선다. 헤데만의 비극은 법실증주의의 한계를 보여준다. 그는 법을 기술적 체계로 봤다. 일반조항은 "나쁜 입법 기술"이고 구체적 규칙이 "좋은 입법 기술"이었다. 그러나 이 접근은 법의 내용을 묻지 않는다. 나치가 "유대인은 공직 취임 불가"라고 매우 구체적으로 규정했을 때, 그것은 Hedemann의 기준으로는 "명확한" 입법이다. 형식은 완벽하지만 내용은 끔찍하게 부정의한 것이다.
이것이 그가 나치와 협력할 수 있었던 이론적 맹점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극단적 사례는 나치 독일만의 문제일까? 한국은 무관할까? 불행히도 그렇지 않다. 한국의 권위주의 시대, 특히 유신체제와 신군부 시기에도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패턴이 나타났다.
1975년 긴급조치 제9호는 "유신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했다. 여기서 "왜곡", "비방"의 기준은 무엇이었나? 아무도 몰랐다. 결과적으로 정권 비판은 모두 처벌 대상이 되었다. 법원은 이 조항을 광범위하게 적용했고, 대법원은 긴급조치에 대한 사법심사권을 포기했다. "고도의 정치적 결단에는 사법부가 개입하지 않는다"는 논리였다.
국가보안법 제7조도 마찬가지다. "국가의 존립을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이적표현물을 소지하면 처벌한다는 이 조항은, "위태롭게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구체적 기준을 제시하지 않는다. 어떤 법원은 북한 관련 학술 자료를 소지한 대학원생을 유죄로 판단했고, 다른 법원은 유사한 사례를 무죄로 봤다. 같은 법이 법관에 따라 정반대로 해석되는 것이다. 민주화 이후에도 이 문제는 지속된다. 헌법재판소는 2015년 이 조항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렸지만, 재판관 3인은 명확성 원칙 위배를 지적하며 반대했다.
이 장은 헤데만의 경고가 어떻게 역사적 현실이 되었는지를 추적한다. 나치 독일에서 일반조항이 어떻게 남용되었는지, 한국의 권위주의 시대에 유사한 패턴이 어떻게 반복되었는지를 구체적 사례를 통해 보여준다. 또한 헤데만 본인의 아이러니한 운명을 통해, 법의 형식만 강조하고 내용을 간과하는 법실증주의의 위험을 성찰한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지만, 배운 자만이 반복을 피할 수 있다. 90년 전의 경고를 듣지 않은 대가가 무엇이었는지를 기억해야,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다.
1935년 가을, 베를린 지방법원에 한 노인이 섰다. 그의 이름을 기록은 남기지 않았다. 나치 시대 문서들은 유대인의 이름을 가능한 한 지우려 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그가 60대 중반이었고, 프로이센 정부에서 30년 넘게 일한 공무원이었다는 것을 안다. 그는 은퇴 연금을 청구하기 위해 법원에 왔다.
형식적으로 보면 그의 청구는 명백히 정당했다. 공무원연금법은 25년 이상 재직한 공무원에게 연금을 지급하도록 규정했다. 그는 32년을 근무했다. 특별한 징계 기록도 없었다. 상급자들의 평가는 "성실하고 근면함"이었다.
법리적으로 다툴 여지가 없는 사안이었다.
그러나 1933년 이후 독일에서 법리는 더 이상 결정적이지 않았다. 법원은 그의 청구를 기각했다. 판결문의 핵심 논리는 이랬다.
"청구인은 유대인이다. 유대인에게 독일 국가의 재원으로 연금을 지급하는 것은 민족공동체의 건전한 감정에 반한다. 따라서 연금 지급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위배된다."
이 판결의 법적 근거는 독일 민법 제242조였다. "채무자는 거래관행을 고려하여 신의성실의 원칙에 따라 급부를 이행할 의무가 있다." 이 조항은 1900년 독일 민법이 제정될 때부터 있었다. 35년 동안 이 조항은 계약법의 일반 원칙으로 기능했다. 채무자가 악의적으로 채권자를 기만하거나, 계약의 본질을 벗어나는 방식으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을 막는 조항이었다. "신의성실"은 보편적 윤리 기준을 의미했다.그런데 1935년의 법원은 이 조항을 완전히 다르게 읽었다. "신의성실"은 더 이상 보편적 윤리가 아니라 "민족감정"이었다. 유대인을 차별하는 것이 "신의성실"에 부합한다는 것이었다. 법 조문은 한 글자도 바뀌지 않았지만, 그 의미는 180도 달라졌다. 헤데만이 경고한 일반조항의 위험이 가장 끔찍한 형태로 현실화된 순간이었다.
판결을 받은 노인이 어떻게 되었는지 기록은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1935년부터 1945년 사이 독일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안다. 1938년 수정의 밤(Kristallnacht)에 유대인 상점과 회당이 불탔다. 1941년부터 유대인들은 노란 별을 달고 다녀야 했다. 1942년 반제 회의에서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이 결정되었다. 600만 명이 학살당했다. 그 시작점 중 하나가 바로 법원이 "신의성실"을 재해석한 순간이었다. 이 사례가 충격적인 이유는 나치가 새로운 법을 만든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나치는 많은 새로운 법률을 제정했다. 1933년 4월 "직업공무원제도재건법"은 유대인 공무원을 해고할 수 있게 했다. 1935년 9월 뉘른베르크 법은 유대인의 시민권을 박탈했다. 이런 법률들은 명시적으로 차별을 규정했고, 명백히 부정의했다. 전후 독일은 이런 법률들을 "극단적 불법"으로 규정하고 무효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더 교묘하고 위험한 것은 기존 법률의 재해석이었다. 민법 제242조 같은 일반조항은 표면적으로 중립적이었다. "신의성실"이라는 단어 자체에는 유대인 차별이 들어있지 않았다. 그러나 법원이 그 내용을 "민족감정"으로 채우면, 같은 조항이 차별의 도구가 되었다. 법의 형식은 유지되지만 내용이 변질되는 것, 이것이 일반조항 남용의 본질이다.
1936년 또 다른 판결은 이를 더욱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유대인 사업가가 독일인 거래처와 맺은 계약 이행을 청구했다. 계약서는 명확했고, 대금도 지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법원은 이렇게 판시했다. "유대인과의 거래 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것은 선량한 풍속에 반한다. 따라서 계약은 무효다." 근거 조문은 민법 제138조였다. "선량한 풍속에 반하는 법률행위는 무효다."
여기서 법원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계약 체결 당시(1932년)에는 유대인과의 거래가 합법이었다. 그러나 "1933년 이후 변화한 민족감정"을 고려하면 이제는 풍속 위반이라는 것이었다. 법원이 과거에 합법이었던 행위를 소급하여 불법으로 만든 것이다. 이는 형법의 소급입법 금지 원칙조차 일반조항을 통해 우회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이런 판결들이 쌓이면서 독일 법질서는 급속히 변질되었다. 유대인은 재산권을 보호받지 못했다. 계약을 맺어도 이행을 강제할 수 없었다. 손해배상을 청구해도 기각되었다. 형식적으로는 법원이 존재하고 재판이 진행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법치주의가 무너진 것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신의성실", "선량한 풍속" 같은 아름다운 말들로 정당화되었다.
1938년 한 법률 잡지는 이렇게 썼다.
"신의성실과 선량한 풍속의 내용은 민족의 생활 의식에 의해 결정된다. 국가사회주의 혁명 이후, 이 개념들은 총통과 민족사회주의 운동이 제시한 가치 질서에 의해 채워진다."
이것이 공식적으로 인정된 법해석 방법론이었다. 일반조항은 나치 이념의 "침투구"가 된 것이다.
법학자 베른트 루더스는 전후 이를 연구하면서 독일 민법 제157조와 제242조를 "활짝 열린 뒷문"이라고 표현했다. 정문으로는 헌법과 기본권이 보호하지만, 뒷문인 일반조항을 통해 독재 이념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뒷문은 입법자가 열어놓은 것이었다. 헤데만이 경고했듯, 입법자가 구체적 기준을 제시하지 않으면 법관이 그 내용을 채우는데, 나치 시대 법관들은 그것을 독재 이념으로 채웠다.
많은 사람들은 나치가 법을 파괴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더 정확한 표현은 나치가 법을 전용했다는 것이다. 법 형식은 대부분 유지되었다. 법원은 계속 존재했고, 재판은 열렸으며, 판결문은 법 조문을 인용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완전히 달랐다. 나치의 법 장악 전략은 세 단계로 진행되었다.
첫 번째 단계는 법관 인사를 장악하는 것이었다. 1933년 4월 "직업공무원제도재건법"은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공무원을 해임할 수 있게 했다. 이 법은 표면적으로 유대인을 대상으로 했지만, 실제로는 나치에 비판적인 모든 법관을 제거하는 도구였다. 1933년 한 해 동안 약 15퍼센트의 법관이 해임되거나 사임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민주적 가치를 옹호했던 법관들이 주로 제거되었다. 동시에 나치당원 법관들이 대거 임용되었다. 특히 젊은 법관들 사이에서 나치당 가입률이 높았다. 1933년 이후 사법시험을 통과한 젊은 법조인들은 대부분 나치 이념 교육을 받은 세대였다. 그들에게 "민족공동체"는 자연스러운 법이념이었고, 유대인 차별은 당연한 정책이었다. 법원은 빠르게 나치화되었다.
두 번째 단계는 법학 교육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대학 법학부에서 "유대법학"이라는 비난을 받은 교수들이 쫓겨났다. 로마법, 자연법, 개인주의적 권리 이론을 가르쳤던 교수들이 제거되고, "독일법학"을 표방하는 나치 이념가들이 들어왔다. 법학 교재가 개편되었다. 예를 들어 계약법을 가르칠 때,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보다 "민족공동체의 이익"이 우선한다고 가르쳤다. 1935년 출판된 한 민법 교재는 민법 제242조를 이렇게 설명했다. "신의성실의 원칙은 개인주의적 계약 자유를 민족공동체의 요구에 종속시키는 수단이다. 법관은 이 조항을 통해 계약 내용이 민족의 이익에 부합하는지 심사할 수 있다." 이것이 법대생들이 배운 내용이었다. 이들이 법관이 되었을 때, 일반조항을 나치 이념으로 해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세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단계는 법해석 방법론을 바꾸는 것이었다. 전통적 법해석론은 문언 해석에서 시작했다. 법 조문의 문언이 명확하면 그대로 따르고, 불명확할 때만 입법 취지나 체계적 해석을 동원했다. 그러나 나치 법학은 이를 뒤집었다. "민족의 생활 의식"이 가장 중요하고, 법 문언은 그에 따라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36년 한 법률 학술지에 실린 논문은 이를 명시적으로 주장했다.
"법관은 법 조문의 노예가 아니다. 법관은 민족 공동체의 양심이다. 법 조문이 민족의 생활 의식과 충돌하면, 법관은 생활 의식을 따라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법 발견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법 조문에 "모든 시민"이라고 써 있어도 유대인은 제외할 수 있었다. "시민"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민족 동지"이기 때문이다.
일반조항은 이런 재해석의 완벽한 도구였다. "신의성실", "선량한 풍속", "공공질서" 같은 개념은 원래부터 추상적이었다. 나치 이전 시대에도 법관이 그 내용을 채워야 했다. 그런데 이제 법관들은 그것을 "민족감정"으로 채웠다. 그리고 이것이 정당한 법해석이라고 주장했다.
1937년 제국법원(독일 최고법원)의 한 판결은 이를 체계화했다.
"민법 제242조와 제138조의 일반조항은 민족사회주의 세계관이 법질서로 침투하는 통로다. 법관은 이 조항들을 통해 낡은 자유주의적 법 규정을 민족공동체의 요구에 맞게 조정할 수 있다."
이것이 최고법원의 공식 입장이었다. 일반조항은 단순히 법의 흠결을 메우는 보충적 도구가 아니라, 전체 법질서를 개조하는 혁명적 수단이 된 것이다.
이 재해석 기술은 민법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형법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형법 제2조는 "법률에 의하지 않으면 처벌할 수 없다"는 죄형법정주의 원칙을 규정했다. 그러나 법원은 이를 우회했다. 1935년 개정 형법은 "건전한 민족감정"에 따라 처벌할 수 있다는 조항을 추가했다. 법률에 명시되지 않은 행위라도 "민족감정"에 반하면 처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죄형법정주의가 사실상 폐지된 것이다.
예를 들어 1938년 한 사건에서, 피고인은 히틀러를 비판하는 말을 사석에서 했다. 당시 형법에는 사적 대화를 처벌하는 조항이 없었다. 그러나 법원은 "민족감정에 따르면 이는 민족공동체에 대한 공격"이라며 유죄를 선고했다. 법 조문이 없어도 처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일반조항 남용의 극단적 형태다.
행정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경찰법은 전통적으로 "공공의 안녕과 질서"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허용했다. 나치 정권은 이 일반조항을 무한정 확대 해석했다. 유대인 상점 앞에 나치 돌격대를 배치하는 것, 정권 비판자를 예방 구금하는 것, 집회를 원천 금지하는 것이 모두 "공공 질서 유지"라는 명목으로 정당화되었다. 법 조문은 바뀌지 않았지만, "공공 질서"의 의미가 바뀐 것이다.
1939년에 이르면 일반조항의 나치적 해석은 완전히 정착되었다. 법관들은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 한 법률 실무서는 이렇게 조언했다.
"의심스러운 경우, 법관은 총통의 의지가 무엇인지를 자문해야 한다. 그것이 법의 진정한 의미다."
법해석이 더 이상 법 조문에서 출발하지 않고, 독재자의 의지에서 출발하게 된 것이다.
이 모든 과정에서 헤데만의 경고가 정확했음이 입증되었다. 입법자가 일반조항으로 도피하면, 권력을 가진 자가 그 내용을 자의로 채운다. 1900년 독일 입법자들은 "신의성실"과 "선량한 풍속"이 보편적 윤리 기준으로 해석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35년 후, 같은 조항들이 인종 차별과 정치적 탄압의 도구가 되었다. 법의 형식은 유지되었지만 법치주의는 무너진 것이다.
1968년, 서독 법학자 Bernd Rüthers 베른트 루더스는 나치 시대 판례를 철저히 분석한 연구서를 출판했다. 제목은 "Die unbegrenzte Auslegung"(무제한적 해석)이었다. 이 책은 나치가 어떻게 법을 전용했는지를 가장 체계적으로 밝힌 저작으로 평가받는다. Rüthers 자신은 나치 시대를 경험한 세대였다. 1930년 출생한 그는 소년기에 나치 독일을 보았고, 전후 법학을 공부하면서 한 가지 질문에 사로잡혔다.
"어떻게 법관들이 그런 판결을 내릴 수 있었는가?"
Rüthers가 발견한 것은 놀라운 일관성이었다. 나치 시대 법원의 판결들은 무작위적이거나 혼란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매우 체계적이었다. 법원은 일정한 해석 방법론을 따랐고, 그 방법론은 학계에서 이론적으로 뒷받침되었다. 루더스는 이를 "무제한적 해석"이라고 명명했다. 법 조문의 문언적 한계를 무시하고, "민족의 생활 의식"이라는 이름으로 무한정 확장 해석하는 기법이었다.
그는 특히 민법 제157조와 제242조에 주목했다. 제157조는 "계약은 거래관행을 고려하여 신의성실의 원칙에 따라 해석되어야 한다"고 규정한다. 제242조는 "채무자는 신의성실의 원칙에 따라 급부를 이행할 의무가 있다"고 한다. 이 두 조항이 나치 시대에 어떻게 활용되었는지 그는 수백 건의 판례를 분석했다.
한 사례는 이렇다. 1936년 유대인 의사가 독일인 환자를 치료했고, 진료비를 청구했다. 환자는 지급을 거부했다. 의사는 소송을 제기했다. 계약법의 원칙에 따르면 의사의 승소가 명백했다. 진료 계약이 성립했고, 의사는 의무를 이행했으며, 환자는 대가를 지급해야 한다. 그러나 법원은 환자의 손을 들어줬다.
판결의 논리는 이랬다.
"민법 제157조에 따르면 계약은 신의성실에 따라 해석되어야 한다. 신의성실의 내용은 민족의 생활 의식에 의해 결정된다. 1935년 뉘른베르크 법 이후, 유대인과 독일인 사이의 밀접한 관계는 민족의 생활 의식에 반한다. 따라서 유대인 의사에게 진료비를 지급하는 것은 신의성실에 반한다."
법원은 제157조라는 일반조항을 이용하여 계약의 효력을 부정한 것이다.
루더스가 지적한 핵심은 이것이었다. 일반조항은 본래 계약 당사자들의 의사를 보충하거나 명확히 하는 도구였다. 당사자들이 명시하지 않은 세부사항을 "신의성실"에 따라 채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치 시대 법원은 이를 전복시켰다. 당사자들의 명시적 합의조차 "신의성실"로 무효화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일반조항이 계약을 보충하는 것이 아니라 파괴하는 도구가 된 것이다.
또 다른 사례는 더 극단적이다. 1938년 독일인 지주가 유대인 세입자와 맺은 임대차 계약을 해지하려 했다. 계약서에는 3년 기간이 명시되어 있었고, 아직 1년이 남아 있었다. 법률적으로 지주는 기간 만료 전에 계약을 해지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주는 민법 제242조를 근거로 즉시 해지를 주장했다. "유대인에게 주거를 제공하는 것이 신의성실에 반한다"는 것이었다.
법원은 지주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민법 제242조는 법관에게 개별 사안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형평에 맞는 해결을 할 권한을 준다. 1938년 현재, 독일 민족의 생활 의식에 따르면 유대인과의 밀접한 관계는 바람직하지 않다. 따라서 임대인이 계약을 해지하는 것은 신의성실에 부합한다."
명시적 계약 기간조차 "신의성실"로 무시된 것이다.
루더스는 이런 판결들이 단순히 나치 이념에 동조한 결과가 아니라고 분석했다. 더 근본적으로는 법해석 방법론의 문제였다는 것이다. 나치 이전에도 독일 법학은 일반조항에 상당한 권한을 부여했다. "신의성실"은 경직된 법 규칙을 유연하게 만드는 "황금 조항"으로 불렸다. 법관은 이를 통해 구체적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이 유연성이 독재 시대에는 자의성으로 변질되었다. "신의성실"의 내용을 채우는 기준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치 이전에는 법관들의 자제와 양식이 남용을 막았다. 그러나 나치 시대에는 법관들이 정권의 압력을 받았고, 많은 법관들이 나치 이념을 내면화했다. 그때 일반조항은 억압의 도구가 되었다.
루더스의 가장 유명한 명제는 이것이다.
"방법론의 문제는 헌법의 문제다"(Methodenfragen sind Verfassungsfragen)
법을 어떻게 해석하는가는 단순한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누가 권력을 가지는가라는 헌법적 권력배분의 문제라는 것이다. 일반조항의 해석 권한을 법관에게 무제한으로 주면, 법관이 실질적 입법자가 된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입법자가 만든 법이 선출되지 않은 법관의 해석으로 변형되는 것이다.
평시에는 이것이 큰 문제로 보이지 않을 수 있다. 법관들이 대체로 합리적이고 공정하다고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기 시대, 특히 독재 정권이 들어서면 상황이 달라진다. 법관들이 정권의 압력을 받거나 스스로 정권에 동조할 때, 일반조항은 독재의 도구가 된다. 그리고 이것이 법의 형식으로 포장되기 때문에, 저항하기가 더 어렵다. "법원이 판결한 것인데 어떻게 불법이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논리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일반조항의 남용을 막을 수 있는가? 그의 답은 두 가지였다. 첫째, 입법자가 가능한 한 구체적 기준을 제시해야 한다. 일반조항에 의존하는 것은 최소화해야 한다. 둘째, 법관의 해석 권한에 헌법적 한계를 설정해야 한다. 특히 기본권은 법관의 자의적 해석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
이는 헤데만의 경고를 한 단계 발전시킨 것이었다. 헤데만은 입법자의 도피를 비판했지만, 해결책은 제시하지 않았다. 루더스는 헌법적 통제를 해법으로 제시했다.
독일 기본법은 이를 반영하여 제103조 제2항에 "어떠한 행위도 그 행위 이전에 법률로 처벌 가능성이 규정되어 있지 않으면 처벌될 수 없다"는 죄형법정주의를 명시했다. 또한 제20조 제3항은 "입법은 헌법적 질서에, 집행과 사법은 법률과 법에 구속된다"고 규정했다. 법관의 재량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루더스의 연구가 나온 1968년은 독일 사회가 나치 과거와 본격적으로 대면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1960년대까지 많은 나치 시대 법관들이 전후에도 법원에서 일했다. 그들은 "우리는 법을 적용했을 뿐"이라고 변명했다. 루더스의 책은 이 변명이 거짓임을 입증했다. 그들은 법을 적용한 것이 아니라 왜곡했다. 일반조항을 이용하여 법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바꾼 것이다.
이 연구는 한국 법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한국 법학자들은 유신 시대와 신군부 시기의 사법부 역할을 반성적으로 검토했다. 루더스의 책은 주요 참고 문헌이 되었다. 권위주의 정권이 어떻게 법을 전용하는지, 일반조항이 어떻게 남용되는지를 이해하는 틀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역사는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서 반복되고 있었다.
헤데만의 인생 궤적은 20세기 독일 지식인의 비극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1933년 그는 일반조항의 위험을 날카롭게 경고했다. 입법자가 도피하면 법관이 자의적으로 권력을 행사하게 되고, 이는 "비잔티움의 부상", 즉 전제주의로 이어진다고 예견했다. 그의 예측은 정확했다. 불과 몇 년 만에 나치 법원은 일반조항을 이용하여 법질서를 왜곡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본인이 나치 체제에 협력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이 질문은 단순히 한 개인의 도덕적 실패를 넘어선다. 법학 자체의 한계, 특히 법실증주의의 맹점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1936년 헤데만은 예나 대학을 떠나 베를린 프리드리히-빌헬름 대학 교수로 임용되었다. 이는 학문적으로 승진이었다. 베를린 대학은 독일 법학의 중심지였고, 가장 권위 있는 자리였다. 그러나 1936년의 베를린은 나치 권력의 심장부이기도 했다. 그가 그곳으로 간 것은 나치 정권과의 타협을 의미했다.
1939년, 헤데만은 더 나아갔다. 그는 나치 정권이 추진한 Volksgesetzbuch(민족법전) 제정 위원회의 주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1900년 제정된 독일 민법을 폐기하고 나치 이념에 맞는 새로운 민법을 만들려는 것이었다. 기존 민법은 "로마법의 개인주의적 잔재"로 비판받았고, 새로운 법전은 "민족공동체의 원리"를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되었다.
그는 이 위원회를 이끌며 실제로 법안을 작성했다. 예를 들어 가족법 부분에서는 "혈통의 순수성"이 강조되었다. 상속법에서는 "민족공동체에 기여한 자"가 우선시되었다. 계약법에서는 "개인의 자유"보다 "공동체의 이익"이 앞섰다. 이는 명백히 나치 이념을 법률화하는 작업이었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가 남긴 글이다. 1943년 한 학술지에 실린 그의 논문은 "입법자로서의 총통"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그는 이렇게 썼다.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입법자다. 그의 입법은 민족의 생활 의식을 완벽하게 반영한다. 법학자의 임무는 총통의 의지를 법적으로 정교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1933년 일반조항의 위험을 경고했던 사람이 쓴 글이다.
전후, 헤데만은 전범 재판을 받지 않았다. 그는 직접적으로 유대인 박해에 관여하지 않았고, 민족법전도 결국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나면서 프로젝트가 중단되었다. 그러나 학계에서 그의 평판은 땅에 떨어졌다. 전후 독일 법학자들은 헤데만을 기회주의자로 보았다. 그는 1963년 사망할 때까지 학문적 재활을 이루지 못했다.
그렇다면 왜 그는 자신이 경고한 함정에 빠졌을까?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 단순히 출세욕 때문이었을 수 있다. 1936년 그는 58세였다. 학자로서 정점에 도달할 마지막 기회였을 수 있다. 나치에 협력하지 않으면 베를린 대학 자리를 얻을 수 없었다. 그는 양심보다 명예를 택했을 수 있다.
둘째, 정치적 순진함 때문이었을 수 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헤데만이 초기에는 나치의 극단성을 과소평가했다고 본다. 그는 나치가 일시적 현상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독일 보수 엘리트들 사이에는 "우리가 히틀러를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이 있었다. 헤데만도 이런 착각에 빠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이론적 맹점이었다.헤데만은 법실증주의자였다. 그에게 법은 기술적 체계였다. 일반조항은 "기술적으로 나쁜" 입법이고, 구체적 규칙이 "기술적으로 좋은" 입법이었다. 이 관점에서는 법의 내용이 중요하지 않다. 형식만 중요하다.
나치가 "유대인은 공직에서 배제된다"고 매우 구체적으로 규정했을 때, 그것은 헤데만의 기준으로는 "명확한" 입법이다. 일반조항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민은 자신이 해야 할 행동을 정확히 알 수 있다. 법적 안정성이 확보된다. 내용이 끔찍하게 부정의하다는 것은 별개 문제다. 법실증주의는 형식과 내용을 분리하기 때문에, 악법도 법으로 인정하게 된다.
이것이 법실증주의의 함정이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독일 법학은 법을 과학으로 만들려고 했다. 도덕이나 정치와 분리된 순수한 법 이론을 추구했다. 이는 법학의 객관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동시에 법이 도덕적 판단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이 법이 정의로운가"라는 질문이 법학의 영역 밖으로 밀려났다.
나치 경험 후, 독일 법학은 이를 깊이 반성했다. Gustav Radbruch, 라드부르흐의 유명한 전환이 대표적이다. 그는 나치 이전에는 엄격한 법실증주의자였다. "법은 법이다"라는 입장이었다. 부정의한 법이라도 법으로 인정해야 하며, 그것을 바꾸는 것은 정치의 역할이지 법학의 역할이 아니라고 봤다.
그러나 1945년 전쟁이 끝나고 나치의 만행이 드러났을 때, 라드부르흐는 충격을 받았다. 법실증주의가 나치를 막지 못했다. 오히려 나치 법률가들은 "우리는 법을 따랐을 뿐"이라고 변명했다. 그는 1946년 논문에서 입장을 바꿨다. 그는 "Radbruch Fomular, 일명 라드부르흐 공식"이라고 불리는 명제를 제시했다.
"법적 안정성과 정의 사이에 갈등이 있을 때, 원칙적으로 법적 안정성이 우선한다. 제정법은 내용이 부정의하고 부적절하더라도 우위를 가진다. 그러나 정의에 대한 모순이 참을 수 없는 정도에 이르러 법률이 '부정의한 법'으로서 정의에 양보해야 할 때는 예외다. 또한 법률이 정의의 핵심인 평등을 의식적으로 부정할 때, 그 법률은 단지 '부정의한 법'이 아니라 법적 성질을 전혀 갖지 못한다."
이는 혁명적 주장이었다. 극도로 부정의한 법은 법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법실증주의를 넘어 자연법적 요소를 인정한 것이다. 라드부르흐는 나치 시대 법률들, 특히 유대인 차별법들은 이 기준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그것들은 "법의 탈을 쓴 불법"이었다는 것이다.
헤데만의 비극은 그가 이 전환을 이루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는 1933년 일반조항의 형식적 위험을 보았지만, 법의 내용적 정의는 보지 못했다. 그래서 나치가 "명확한" 법률로 불의를 저지를 때, 그는 저항하지 못했다. 오히려 협력했다. 이것이 형식과 내용을 분리하는 법실증주의의 맹점이었다.
현대 한국 법학도 이 교훈을 배워야 한다. 일반조항의 위험은 단지 불명확성이 아니다. 부정의한 내용으로 채워질 수 있다는 점이다. 반대로 구체적 규칙이라도 내용이 부정의하면 법으로 인정할 수 없다. 법의 형식과 내용은 분리될 수 없다.
1975년 5월 서울형사지방법원에 한 대학생이 섰다. 그는 긴급조치 제9호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 혐의 내용은 간단했다. 대학 도서관에서 유신헌법을 비판하는 유인물을 읽고 친구들과 토론했다는 것이었다. 검사는 징역 3년을 구형했다.
변호인은 이렇게 주장했다. "피고인은 사적 공간에서 학술적 토론을 했을 뿐이다. 유신헌법에 대한 학문적 비판은 헌법이 보장하는 학문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에 속한다. 긴급조치는 이 기본권을 침해한다."
변호인은 긴급조치 자체가 위헌이라고 주장했다. 법원은 변호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판결문은 이렇게 적었다. "긴급조치 제9호는 '유신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한다. 피고인의 행위는 이에 해당한다. 긴급조치는 대통령이 국가안보를 위해 발한 긴급명령으로서, 법률과 동일한 효력을 가진다. 법원은 이를 적용할 의무가 있다." 피고인은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이 판결의 구조는 40년 전 나치 독일 법원의 판결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법원은 법 조문을 형식적으로 적용했다. 긴급조치라는 "법"이 있고, 피고인이 그것을 위반했으므로 유죄라는 것이다. 그 "법"의 내용이 기본권을 침해하는지, 정의로운지는 묻지 않았다. 법실증주의적 태도였다.
문제는 긴급조치 자체가 극도로 불명확했다는 점이다. "왜곡"과 "비방"의 기준이 무엇인가? 유신헌법의 문제점을 학술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왜곡"인가? 개헌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비방"인가? 긴급조치는 이에 대해 아무런 기준도 제시하지 않았다. 이것이 헤데만이 경고한 일반조항의 전형이다.
더 악질적인 것은 긴급조치 제9호 제4항이었다. "이 조치를 비방하거나 이 조치에 반대하는 행위를 하는 자"도 처벌한다는 것이었다. 일반조항에 대한 비판조차 금지하는 순환적 억압 구조였다. 시민은 긴급조치가 정당한지 의문을 제기할 수조차 없었다. 의문을 제기하는 순간 처벌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1975년부터 1979년 사이, 긴급조치로 기소된 사람은 공식 기록만 천 명이 넘는다. 실제로는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영장 없이 구금되었고, 재판 없이 풀려났다. 또 많은 사람들이 긴급조치를 두려워하여 자기 검열을 했다. 이것이 불명확한 법의 "위축 효과"다. 어디까지가 허용되는지 알 수 없으므로, 안전하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다.
대법원의 태도는 더욱 문제였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긴급조치에 대한 사법심사 가능성을 판단하는 역사적 기회를 가졌다. 사건번호 74도3323 판결이다. 피고인 측은 긴급조치가 헌법에 위반된다며 위헌 여부를 판단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를 거부했다. 판결문은 이렇게 적었다.
"긴급조치는 고도의 정치적 결단에 속하는 문제다. 사법부는 정치적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이 권력분립의 원칙이다. 따라서 긴급조치의 위헌 여부는 사법심사의 대상이 아니다."
대법원이 스스로 심사권을 포기한 것이다.
이는 법원의 근본적 책임 포기였다. 법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권력의 남용으로부터 시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다. 특히 행정부나 입법부가 헌법을 위반할 때, 법원만이 이를 교정할 수 있다. 그런데 대법원은 "정치적 문제"라는 말로 이 역할을 회피했다. 나치 시대 독일 법원이 "총통의 의지"를 따랐듯, 유신 시대 한국 법원은 "대통령의 결단"을 존중한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2013년이 되어서야 이 판결을 뒤집었다. 2013년 3월 21일 선고 2010헌바132 결정에서 헌법재판소는 긴급조치 제1호와 제2호에 대해, 2013년 11월 28일 선고 2011헌바36 결정에서 긴급조치 제9호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재판소는 명확하게 판시했다.
"긴급조치 제9호는 처벌 대상 행위가 지나치게 광범위하고 불명확하여 명확성의 원칙에 위배된다. '왜곡'과 '비방'의 개념이 무엇인지 일반 시민이 예측할 수 없다. 또한 긴급조치는 표현의 자유, 학문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등 기본권을 과도하게 제한한다. 이는 헌법 제37조 제2항의 과잉금지원칙에 위배된다."
재판소는 또한 긴급조치가 "국가의 존립이나 헌법 질서에 중대한 위협"이 있는 상황에서 발해진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1970년대 중반 한국은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있었고, 북한의 군사적 위협도 특별히 증가하지 않았다. 긴급조치는 진정한 국가 위기에 대응한 것이 아니라, 유신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도구였다는 것이다.
이 결정은 38년이 지나서 나왔다. 그 사이에 수천 명이 부당하게 처벌받았다. 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파괴되었다. 학생들은 퇴학당했고, 교수들은 해직되었으며, 언론인들은 직업을 잃었다. 어떤 이들은 고문을 받았고, 어떤 이들은 감옥에서 사망했다. 이 모든 것이 "법"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다.
역사의 교훈은 명확하다. 일반조항의 남용은 나치 독일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시대와 장소는 달랐지만, 구조는 같았다. 권위주의 정권이 불명확한 법 조항을 이용하여 반대파를 탄압한 것이다. 그리고 법원이 이를 방관하거나 협력한 것이다. 헤데만의 경고는 1970년대 한국에서도 유효했다.
긴급조치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한국의 권위주의 시대 전반에 걸쳐 일반조항은 억압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국가보안법이다.
국가보안법 제7조는 "이적표현물"을 처벌한다.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이적표현물을 제작, 배포, 소지하면 처벌한다는 것이다. 이 조항은 1980년 전두환 정권이 권력을 장악하며 강화했고, 이후 수십 년간 정권 비판을 억압하는 주된 도구가 되었다.
문제는 "위태롭게 한다는 정"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북한 정권을 찬양하는 내용이 "이적"인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북한의 경제 정책을 객관적으로 소개하는 학술 논문은? 남북 화해를 주장하는 사설은?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는 시위 구호는? 경계가 불분명하다.
대법원은 오랜 시간에 걸쳐 이를 구체화하려 했다. 대법원 2008도557 판결은 "이적성"의 개념을 정의했다. "이적성은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실질적 해악을 끼칠 명백한 위험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실질적 해악"과 "명백한 위험"이라는 용어 역시 일반조항이다. 일반조항을 또 다른 일반조항으로 정의한 것이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도 유사한 문제를 가진다. 이 법 제5조 제1항 제2호는 "공공의 안녕질서에 직접적인 위험을 명백히 초래한다"는 경우 집회를 금지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공공의 안녕질서"라는 개념은 독일 경찰법의 "öffentliche Sicherheit und Ordnung"을 번역한 것인데, 독일에서도 이 개념의 불명확성은 오랜 논쟁거리다.
한국에서는 권위주의 시대에 이 조항이 정치적 집회를 원천 차단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경찰은 거의 모든 정권 비판 집회에 대해 "안녕질서 침해 우려"를 이유로 금지 통고를 했다. 실제로 폭력이 발생할 위험이 있는지 구체적으로 심사하지 않고, 포괄적으로 금지한 것이다.
민주화 이후에도 문제는 지속되었다.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2016년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 등 대규모 집회가 열릴 때마다 "공공 질서" 논란이 반복되었다. 경찰은 집회를 금지하거나 엄격히 제한하려 했고, 주최 측은 이것이 집회의 자유 침해라고 반발했다.
대법원 2011두2361 판결은 일정한 기준을 제시했다. "공공의 안녕질서에 대한 직접적이고 명백한 위험은 집회 참가 예정인원, 집회 장소의 특수성과 주변 상황, 소요 예상 시간, 집회 목적과 과거 집회 양상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판단해야 한다." 그러나 이 기준 역시 상당히 추상적이다. "종합적으로 고려"한다는 것은 결국 법원의 재량에 맡긴다는 의미다.
이 모든 사례에서 공통점은 입법자가 구체적 기준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적성", "공공의 안녕질서", "명백한 위험" 같은 일반조항만 제시하고, 구체적 판단은 법원과 행정부에 맡겼다. 이는 정치적으로 편리했다. 국회가 "북한 관련 자료 중 어떤 것을 금지할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정하려면 치열한 논쟁이 불가피하다. 보수와 진보 간 합의가 어렵다. 그래서 국회는 추상적 조항만 두고, 법원이 판례로 정리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헤데만이 경고한 도피다. 입법자가 어려운 가치 선택을 회피하고 사법부와 행정부에 떠넘긴 것이다. 그 결과 권위주의 시대에는 이 조항들이 억압의 도구가 되었다. 민주화 이후에도 법적 불확실성과 위축 효과는 계속되었다. 역사는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반복되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 법질서는 큰 변화를 겪었다. 헌법재판소가 설립되어 위헌법률심사를 시작했다. 대법원도 인권 보호에 더 적극적이 되었다. 긴급조치 같은 노골적 억압 도구는 사라졌다. 그러나 일반조항을 통한 입법자의 도피 구조는 여전히 남아 있다.
2019년 윤철홍 교수의 연구는 이를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한국 법률에서 일반조항 사용 빈도를 분석했고, 그것이 헤데만이 경고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진단했다. 특히 신의성실 원칙이 모든 법 영역에서 "제왕적 조항"으로 기능한다고 지적했다. 민법뿐 아니라 상법, 노동법, 행정법, 심지어 형사법에서도 신의칙이 적용된다.
구체적 사례를 보자. 2017년부터 2023년까지 진행된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사건은 일반조항 문제를 생생히 보여준다. 회사가 정년을 60세에서 65세로 연장하면서 임금 체계를 불리하게 바꿨다. 노동자들은 불이익 변경이므로 무효라고 주장했다. 회사는 정년 연장으로 얻는 이익이 크므로 합리성이 있다고 반박했다.
근로기준법은 "취업규칙의 불이익 변경은 근로자 과반수 동의가 필요하다"고만 규정한다. 동의를 얻지 못했을 때 변경의 효력이 어떻게 되는지, 어떤 경우에 예외가 인정되는지는 규정하지 않는다. 입법자가 구체적 기준을 제시하지 않은 것이다.
대법원은 신의성실 원칙과 권리남용 금지 원칙을 동원하여 판단했다. 2023년 5월 11일 선고 2017다35588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대법관들은 치열하게 의견이 갈렸다. 다수의견, 별개의견, 반대의견이 나왔고, 각자 신의칙을 다르게 해석했다. 어떤 대법관은 정년 연장이라는 이익이 크므로 신의칙상 동의 거부는 권리남용이라고 봤다. 다른 대법관은 임금 불이익이 중대하므로 신의칙으로 동의를 대체할 수 없다고 봤다.
이 사건은 입법자의 도피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 보여준다. 대법관들조차 의견이 갈리는데, 일반 기업과 노동자가 어떻게 법적 결과를 예측할 수 있겠는가? 근로기준법이 "정년 연장과 임금 조정을 함께 하는 경우, 이익과 불이익을 비교하여 합리성을 판단한다"는 식으로 명시했다면, 예측 가능성이 훨씬 높았을 것이다. 그러나 국회는 이런 구체적 기준 제시를 회피했다. 노사 양측의 반발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또 다른 사례는 공정거래법이다.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제23조는 "불공정거래행위"를 금지한다. 그러나 무엇이 불공정인지 법률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고 "대통령령으로 정한다"며 위임한다. 시행령은 다시 "거래상 지위를 부당하게 이용하여"라는 일반조항을 사용한다.
결과적으로 기업들은 어떤 행위가 위법인지 확신할 수 없다. 공정거래위원회의 심사를 받아봐야 안다. 같은 행위에 대해 공정위는 위법이라고 하고 법원은 합법이라고 판단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법적 안정성을 해친다. 기업들은 적극적 경영 활동을 주저하게 되고, 혁신이 위축된다.
이 문제에 대해 경제학자들과 법학자들이 오랫동안 비판했다. 구체적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회는 움직이지 않는다. 공정거래법을 구체화하려면 "대기업에 유리한가 중소기업에 유리한가"라는 정치적 논쟁이 불가피하다. 국회의원들은 이 논쟁을 피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추상적 조항을 유지하고, 공정위와 법원이 판례로 정리하게 하는 것이다.
민법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대법원 2015년 10월 15일 선고 2012다64253 판결은 신의칙 적용의 한계를 명확히 했다. "신의성실의 원칙은 법적 안정성을 해칠 수 있으므로 일단 유효하게 성립한 계약상의 책임을 공평의 이념 및 신의칙과 같은 일반원칙에 의해 제한하는 것은 극히 예외적으로 인정하여야 한다."
이 판시는 중요하다. 대법원이 일반조항 남용의 위험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극히 예외적"이라는 표현은 신의칙을 함부로 쓰지 말라는 경고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여전히 신의칙이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대법원 판례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하면 매년 수백 건의 판결에서 신의칙이 등장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근본 원인은 입법자의 도피다. 민법은 1958년 제정된 이래 기본 구조가 거의 바뀌지 않았다. 사회는 급격히 변했지만, 민법 조문은 그대로다. 예를 들어 인터넷 거래, 전자계약, 구독 경제 같은 새로운 거래 형태에 대한 구체적 규정이 없다. 그래서 법원이 신의칙을 동원하여 공백을 메워야 한다.
입법자가 적극적으로 개정했다면 이런 문제가 줄어들었을 것이다. 독일은 2000년대 초 민법을 대대적으로 개정하여 소비자 보호 규정을 정비했다. EU 지침을 반영하여 철회권, 약관 규제, 소비자 계약 특칙 등을 구체화했다. 한국도 이런 개정이 필요하지만, 국회는 움직임이 느리다. 민법 개정은 정치적 관심을 끌지 못하고, 이해관계가 복잡하여 합의가 어렵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한국 법질서는 헤데만이 비판한 구조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입법자는 일반조항으로 도피하고, 법원은 판례로 구체화하며, 시민과 기업은 불확실성 속에서 법적 위험을 감수한다. 민주화로 억압적 남용은 줄었지만, 구조적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90년 전 헤데만의 경고는 2020년대 한국에서도 여전히 울려 퍼진다.
다음 편 예고: 제3편 "법의 시간 속에서 판단한다는 것 - 법관은 입법자가 될 수 있는가"에서는 입법자의 도피가 만든 공백을 법원이 어떻게 메워야 하는지, 법의 시간성과 판단의 진정성이라는 법철학적 관점에서 탐구한다.
윤철홍, "헤데만의 '일반조항으로 도피'에 대한 수용적 고찰", 「법학논총」 제39권 제3호, 숭실대학교 법학연구소, 2019.
대법원 1975. 4. 8. 선고 74도3323 전원합의체 판결 [긴급조치 사법심사 거부]
대법원 2008. 2. 28. 선고 2008도557 판결 [이적성 개념]
대법원 2011. 1. 27. 선고 2011두2361 판결 [집회 금지 요건]
대법원 2015. 10. 15. 선고 2012다64253 판결 [신의칙의 예외적 적용]
대법원 2023. 5. 11. 선고 2017다35588 전원합의체 판결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헌법재판소 2013. 3. 21. 선고 2010헌바132 결정 [긴급조치 제1, 2호 위헌]
헌법재판소 2013. 11. 28. 선고 2011헌바36 결정 [긴급조치 제9호 위헌]
헌법재판소 2015. 11. 26. 선고 2013헌바322 결정 [국가보안법 제7조 합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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