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서고 66화
【국문초록】
본 글은 폭력의 일상화라는 현상을 법감정(Rechtsgefühl)의 굴절 과정으로 재구성하고, 피해자 귀책 담론이 이 굴절을 공론장 차원에서 구조적으로 고착시키는 메커니즘을 분석한다. 나아가 이 메커니즘이 국가의 보호의무 불이행과 결합될 때, 단순한 개별 위법이 아닌 시스템적 불법(systemische Illegalität)의 요소를 충족한다는 점을 논증한다. 이를 위해 리쾨르(Paul Ricoeur)의 전이해(Vor-Verständnis) 개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의 체계적으로 왜곡된 의사소통 이론,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독사(doxa) 개념을 법이론적 틀과 접합한다. 또한 사적자치와 국가 개입의 관계를 순차적 모델이 아닌 상호구성적 모델로 재정립하고, 입법층위의 선제성과 행정집행의 반응성 사이의 간극이 시스템적 불법의 작동 공간이 됨을 밝힌다. 결론적으로, 과소보호금지원칙의 심사 범위가 물리적 개입의 수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귀책 담론의 방치 여부까지 포함되어야 함을 제안한다.
주제어: 법감정, 시스템적 불법, 피해자 귀책, 과소보호금지원칙, 공론장, 전이해, 사적자치
법은 단순한 규범명제의 집합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정의감각(正義感覺)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실질적 효력을 유지한다. 이 정의감각의 법적 표현이 바로 법감정(Rechtsgefühl)이다. 그런데 법감정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며, 특정한 사회적 조건 속에서 형성되고, 문화적 전이해(Vor-Verständnis)에 의해 굴절되며, 공론장(Öffentlichkeit)의 담론 구조에 의해 재형성된다.
최근 글로벌 미디어 환경의 발전으로 우리는 타국의 일상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비교적 인식(comparative cognition)의 가능성은 그간 내면화되어 있던 '폭력의 일상화'(normalization of violence)에 대한 새로운 문제제기를 가능케 한다. 그러나 이 비교는 단선적으로 법감정을 상향 교정하는 것이 아니다. 피해자귀책담론(victim-blaming discourse)이 공론장에 만연해 있을 때, 정당한 규범적 청구권은 언어화되기 이전에 이미 문화적 전이해의 층위에서 굴절되어 버린다.
본 글은 이 과정을 세 가지 차원에서 분석한다.
첫째, 폭력의 일상화가 법감정의 둔화와 어떻게 연계되는지를 해석학적 관점에서 규명한다.
둘째, 피해자 귀책 담론이 공론장을 어떻게 구조적으로 왜곡하고 법감정의 재각성을 차단하는지를 검토한다.
셋째, 이 담론적 왜곡이 국가의 보호의무 불이행과 결합될 때 시스템적 불법의 요소를 충족한다는 점을 논증한다. 나아가 사적자치와 국가 개입의 관계를 순차적 모델이 아닌 상호구성적 모델로 재정립하고, 과소보호금지원칙의 심사 범위를 확장해야 할 필요성을 제시한다.
근대 문명국가에서 사인(私人) 간의 폭력은 일탈적 이벤트(event)로 규정된다. 이벤트의 본질적 속성은 비일상성, 특이성, 그리고 사건성(eventhood)에 있다. 규범적으로 이것은, 폭력이 발생할 때 사회 구성원들이 그것을 정상적 상태로부터의 이탈로 인식하고 분노와 개선 의지를 표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반응이 바로 집합적 법감정의 발현이다.
그러나 폭력이 반복될 때, 그것의 이벤트로서의 속성은 점차 소각된다. 어제의 사건(event)이 오늘의 일상(everyday)이 된다. 이 전환은 단순한 심리적 적응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규범 위반에 대한 집합적 법감정 자체의 구조적 변화를 의미한다. 폭력이 일상화될 때, 법감정은 그 대상에 대한 반응 기제를 정지시킨다. 이를 법감정의 둔화(Abstumpfung des Rechtsgefühls)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러한 법감정의 둔화는 단순히 개인적 차원의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 전체가 특정 불법 상태를 '정상'으로 수용하는 집합적 인식의 재편을 수반한다. 이 재편은 라드부르흐(Gustav Radbruch)가 말하는 '법감정의 마비(Lähmung des Rechtsgefühls)'와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라드부르흐가 불법 국가의 맥락에서 분석한 이 현상은, 보다 일상적인 치안 실패의 맥락에서도 동일한 구조로 작동할 수 있다.
폐쇄된 사회에서 법감정의 둔화는 비교 대상의 부재로 인해 자기교정 능력을 잃는다. 그러나 글로벌 미디어 환경은 타국의 일상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는 비교적 인식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한국에서는 밤거리를 자유롭게 걸을 수 있고 노트북을 카페에 두고 화장실을 다녀올 수 있다는 사실은, 그것이 타국과의 비교를 통해 인식될 때 비로소 하나의 규범적 성취로서의 의미를 획득한다.
이 비교적 인식은 둔화된 법감정을 재각성시키는 외부 자극으로 기능한다. 이는 법감정이 순수하게 내생적(endogenous)이지 않고 비교적·관계적으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함의한다. 법감정은 개별 사회 내부의 규범 경험만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비교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함으로써 그 내용이 규정된다. 이것은 해석학적으로 말하자면, 법감정 형성에 있어서의 지평융합(Horizontverschmelzung)의 사례이다.
그러나 비교적 인식은 단선적으로 법감정을 상향 교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중적으로 작동한다. 한편으로는 자국의 법적 성취에 대한 자각을 통해 그것을 유지하려는 의지를 강화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는 저것보다 낫다'는 비교에 의한 자기만족을 통해 내부의 개선 의지를 이완시킨다.
이 이중성은 푸코(Michel Foucault)의 정상화(normalisation) 개념으로 포착된다. 비교를 통한 정상화는 중립적 인식 행위가 아니다. 어떤 비교 기준선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 규범적 함의는 역전된다. 'LA보다 서울이 안전하다'는 비교는 서울의 치안 개선 노력을 정당화하는 데도, 현 수준에 안주하는 데도 활용될 수 있다. 따라서 비교적 인식의 법감정 형성 효과는 단순하지 않으며, 그 방향성은 담론 구조에 의해 결정된다
1. 공론장의 왜곡과 규범적 청구권의 봉쇄
'왜 그걸 들고 나왔어?', '왜 거기를 갔어?'와 같은 피해자 귀책 담론이 사회적 상식으로 정착되는 현상은, 하버마스(Jürgen Habermas)의 공론장 이론의 맥락에서 심각한 의미를 갖는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공론장은 시민들이 규범적 청구권(normative Ansprüche)을 자유롭고 강제 없이 제기하고 토론할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그러나 피해자 귀책 담론은 이 공간 내에서 특정 규범적 청구권의 제기 가능성 자체를 사전에 봉쇄한다.
이것은 하버마스가 말하는 '체계적으로 왜곡된 의사소통(systematisch verzerrte Kommunikation)'의 구조를 갖는다. 표면적으로는 자유로운 의견 교환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권력 관계에 의해 특정 주제와 관점이 논의 불가능한 것으로 처리되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내가 조심하지 못했나?'라고 자문하는 순간, 국가의 보호 실패에 대한 규범적 청구권은 공론장에 도달하기도 전에 소멸한다.
이 봉쇄의 효과는 단기적이지 않다. 피해자 귀책담론이 일상화될수록, 시민들은 자신이 입은 피해를 공론장에서 정치적 의제로 전환하는 능력 자체를 상실한다. 그 결과 국가의 보호 실패는 가시화되지 않고, 개선을 위한 정치적 의지 형성도 방해받는다. 이것은 단순한 의사소통의 실패가 아니라, 민주주의적 자기통치 능력의 구조적 훼손이다.
리쾨르(Paul Ricoeur)의 해석학은 피해자 귀책 담론의 문제를 더 심층적인 차원에서 포착한다. 리쾨르에 따르면, 모든 해석은 전이해(Vor-Verständnis)라는 선(先)구조 위에서 이루어진다. 이 전이해는 해석자가 텍스트를 만나기 이전에 이미 그의 이해 방식을 구조화하는 선행적 인식 틀이다.
피해자 귀책담론이 문화적으로 내면화될 때, 그것은 단순한 사후적 해석의 편향이 아니다. 그것은 피해를 경험한 주체가 그 경험을 의미화하는 전이해 자체에 침투한다. '내가 조심했어야 했다'는 인식은, 피해의 원인에 대한 반성적 분석의 결과가 아니라, 피해 경험 자체를 처음 언어화하는 과정에서 이미 작동하는 전이해적 굴절이다.
이 굴절의 결과, 법감정이 언어화되기 이전에 이미 문화적으로 재단된다. 가다머(Hans-Georg Gadamer)의 용어로 말하자면, 이것은 지평 융합이 아닌 지평억압(Horizontsuppression)이다. 정당한 법감정이 공론장에서 타자의 지평과 만나 풍부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언어화되기 이전 단계에서 이미 지배적 문화 지평에 의해 흡수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피해자 귀책 담론이 단순한 몰인정한 태도가 아니라 해석학적 폭력(hermeneutical violence)의 성격을 갖는 이유이다.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장(場) 이론은 이 현상에 또 다른 층위의 설명을 제공한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독사(doxa)란 장(champ) 안에서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의문 자체가 제기되지 않는 믿음 구조이다. 독사는 담론의 형태를 취하지 않는다. 그것은 논쟁의 전제로서 작동하기 때문에, 논쟁 안에서는 가시화되지 않는다.
피해자 귀책담론이 독사의 수준에 도달할 때, 그것은 더 이상 의식적으로 주장되는 명제가 아니다. 그것은 치안 실패를 논의하는 공간 자체의 전제로서 작동한다. '당연히 조심해야지'라는 말은 논거가 아니라 전제이다. 이 수준에서의 피해자 귀책 담론은 어떤 반론에 의해서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반론 자체가 '현실을 모르는 순진한 주장'으로 처리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적 맥락에서 이것은 소위 '눈치껏' 문화와 연결된다. '눈치껏'이라는 규범은 명시적으로 선언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화(人和)를 위시로 한 집단적 면피의 논리로서, 개인의 진정한 의사 표명 이전에 이미 자기검열을 작동시킨다. 이 문화적 독사가 법감정의 공론장 진입을 구조적으로 차단하는 비가시적 통제 기제로 작동할 때, 그것은 단순한 예절 규범의 문제가 아니라 법적 의미를 갖는 공론장 왜곡의 문제가 된다.
대한민국 헌법 제10조 후단은 국가의 기본권 보장 의무를 명시하고, 이로부터 국가의 기본권 보호의무(Schutzpflicht)가 도출된다. 헌법재판소는 이 보호의무의 이행 여부를 과소보호금지원칙(Untermaßverbot)을 기준으로 심사한다. 즉, 국가가 기본권 보호를 위해 적절하고 효율적인 최소한의 보호 조치를 취하였는지를 판단한다.
이 심사의 구조에는 두 가지 내재적 긴장이 존재한다.
첫째, 보호의무가 인정되려면 당해 사안이 기본권 관련성을 가져야 한다. 기본권과 무관한 영역에 대해서는 애당초 보호의무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치안 문제가 기본권 — 신체의 자유, 생명권, 재산권 등 — 에 직접 연결되는지 여부가 먼저 확인되어야 한다.
둘째, 보호의무의 정도는 국가의 능력 수준에 상대적이며 불확정적이다. 이는 과소보호 판단을 다분히 맥락 의존적으로 만든다.
그러나 현행 헌재의 과소보호금지 심사는 국가의 물리적 보호 조치의 수준에 주로 집중되어 있다. 피해자 귀책 담론의 제도적 방치가 보호의무 위반의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관점은 아직 충분히 논의되지 않았다. 이것이 본 논문이 심사 범위의 확장을 제안하는 이유이다.
국가는 기본적으로 행정 주체로서 반응적(reactive)이다. 분쟁이 발생하고 그것이 행정청에 문제제기될 때 비로소 행정 개입이 정당화된다. 이것은 법치국가의 핵심 원리인 법률유보원칙(Vorbehalt des Gesetzes)과 연결된다. 행정부가 독자적으로 선제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민주적 정당성의 관점에서 제약된다.
그러나 이 반응성이 총체적 진실은 아니다. 입법(Gesetzgebung)의 층위에서 국가는 이미 선제적 규범 설정자이다. 형법의 구성요건, 경찰법의 수권 조항, 피해자 보호 관련 입법들은 분쟁 발생 이전에 행위 가능성 자체를 구조화한다. 즉, 사적자치의 공간을 형성하는 것은 이미 입법적 선제 행위의 결과이다.
이 구분에서 시스템적 불법의 작동 공간이 드러난다. 입법은 보호 구조를 설계했음에도 집행 단계에서 구조적으로 공백이 발생하고, 그 공백이 반복·지속되며, 그것이 피해자 귀책 담론을 통해 정당화되는 패턴 — 이것이 시스템적 불법이다. 단순한 개별 집행의 실패가 아니라, 실패가 재생산되는 구조 자체가 문제이다. 헤데만(Justus Wilhelm Hedemann)이 경고한 '일반조항으로의 도피(Flucht in die Generalklauseln)'가 행정 집행 수준에서 반복될 때, 그 결과는 법원칙의 공동화(空洞化)이다.
시스템적 불법의 핵심적 특성은 그것이 담론적으로 정당화된다는 점이다. 국가의 보호 실패가 피해자의 부주의로 재명명(renaming)될 때, 이 재명명은 단순히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 책임의 담론적 사유화(privatization of state responsibility)를 수행한다. 국가는 치안 실패의 책임을 면제받고, 피해자는 '리스크 관리에 실패한 주체'로 호명된다.
이 과정은 무의식적으로도, 의식적으로도 작동한다. 경찰의 수사 과정에서 피해자의 행동을 문제 삼는 관행, 언론의 '피해자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보도 관행, '조심했으면 됐을 텐데'라는 주변인들의 반응 — 이 모든 것이 국가의 구조적 보호 실패를 가리는 담론적 망으로 기능한다.
이 담론적 정당화가 시스템적 불법을 시스템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개별 위법과 달리, 시스템적 불법은 스스로를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것으로 제시하는 담론 구조를 통해 재생산된다. 이것이 시스템적 불법에 대한 법적 분석이 규범 명제의 분석에 그치지 않고 담론 분석으로 확장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사적자치(Privatautonomie)가 국가개입에 논리적으로 선행한다는 관념은 독일 법철학의 보충성 원칙(Subsidiaritätsprinzip)에서 전형적으로 표현된다. 이 원칙에 따르면, 개인과 소집단이 자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더 큰 단위인 국가가 개입해서는 안 된다. 국가는 사적 해결이 불가능하거나 불충분한 경우에만 보충적으로 개입이 정당화된다.
이 논리는 직관적으로는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그 전제를 면밀히 검토하면 문제가 드러난다. 보충성 원칙이 전제하는 것은, 사적자치가 독립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기본 조건이 이미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당사자들이 대등한 교섭력을 가지고, 안전하게 의사표시를 할 수 있으며, 합의를 이행할 수 있는 제도적 환경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본 조건들 — 계약의 자유, 신체의 안전, 재산권의 보호 — 은 국가의 법적 인프라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화폐는 국가가 보증하는 제도이고, 계약의 효력은 법원이 집행할 때 실질적이 되며, 재산권은 경찰력이 뒷받침될 때 의미를 갖는다. 즉, 사적자치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미 국가의 법적 구조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 점에서 사적자치와 국가 개입의 관계는 보충성 원칙이 전제하는 순차적(sequential) 모델이 아니라 상호구성적(mutually constitutive) 모델로 이해되어야 한다. 국가는 사적자치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야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사적자치가 실질적으로 가능한 조건 자체를 구성한다.
이 모델에서 과소보호금지원칙의 의미는 재해석된다. 그것은 단순히 국가가 어느 시점에 개입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사적자치가 실질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조건을 국가가 충분히 유지하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치안 실패가 사적자치의 공간 자체를 잠식할 때, 국가는 이미 사적자치의 가능성 조건을 훼손하고 있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피해자 귀책담론의 방치는 이중적으로 문제가 된다. 그것은 직접적으로는 규범적 청구권의 공론장 진입을 차단하고, 간접적으로는 사적자치의 가능성 조건인 안전한 법적 환경이 훼손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은폐한다. 이 이중적 효과야말로 피해자 귀책 담론을 단순한 의사소통의 실패가 아닌 법적 의미를 갖는 현상으로 만드는 것이다.
국가가 사적자치의 하방(下方)을 지탱한다는 혹자의 비유는 적확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 하방의 두께이다. 이것은 추상적인 수치로 결정될 수 없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맥락 의존적이고 능력 비례적이다. 헌재가 과소보호금지의 심사에서 국가의 능력 수준을 고려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두께의 불확정성이 두께 자체의 불필요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교정적 정의(corrective justice)와 분배적 정의(distributive justice)의 고전적 긴장은 이 문제에서도 반복된다. 반응적 개입주의는 발생한 잘못에만 교정적으로 대응하고 개인의 자율성을 최대한 존중한다. 예방적 개입주의는 잘못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 자체를 미리 손보아야 한다고 본다.
이 긴장은 어느 한쪽으로 해소될 수 없다. 그것은 구체적 사안에서 균형점을 탐색하는 실천적 판단력(phronesis)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 판단을 위한 핵심 질문은 다음과 같다:
해당 피해가 발생했을 때, 그것을 이미 예측 가능한 구조적 귀결로 볼 수 있었는가?
이 소급적 판단이 하방 두께의 실질적 기준선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 판단 과정 자체가 법감정의 교정적 역할을 수행한다.
본 글은 폭력의 일상화라는 현상을 법감정의 구조적 둔화 과정으로 분석하고, 피해자 귀책 담론이 그 둔화를 공론장 차원에서 고착시키는 메커니즘을 해석학적·비판이론적 틀에서 규명하였다. 나아가 이 담론적 고착이 국가의 보호의무 불이행과 결합될 때 시스템적 불법의 요소를 충족함을 논증하였다.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이 도출된다.
첫째, 과소보호금지원칙의 심사 범위는 국가의 물리적 보호 조치의 양적 수준에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 국가가 피해자 귀책 담론을 제도적으로 방치하거나 조장하는지 여부, 즉 규범적 청구권의 공론장 진입을 구조적으로 억제하는 담론 환경을 방치하는지 여부가 심사의 요소에 포함되어야 한다.
둘째, 사적자치와 국가 개입의 관계는 보충성 원칙의 순차적 모델이 아닌 상호구성적 모델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모델에서 국가의 보호의무는 사적자치가 실질적으로 가능한 조건의 유지를 그 핵심 내용으로 한다.
셋째, 시스템적 불법의 분석은 규범 명제의 분석에 그치지 않고 담론 분석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법의 형식적 구조와 그것을 지탱하거나 잠식하는 담론적 환경을 함께 분석하는 것만이 시스템적 불법의 전모를 드러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법감정은 이 분석 전체에서 단순한 감정적 반응이 아니라 규범 질서의 정당성을 인식론적으로 확인하는 도구로서 기능한다. 법감정의 굴절을 추적하는 것은, 그것이 가리키는 규범 질서의 왜곡을 추적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법감정론과 시스템적 불법론은 독립적 이론 체계가 아니라, 하나의 현상을 다른 층위에서 포착하는 상보적 분석 틀이다.
2026. 2. 10.
1. 국내문헌
김도균, 『권리의 문법 — 도덕적 권리·인권·법적 권리』, 박영사, 2008.
계희열, 『헌법학(중)』, 박영사, 2004.
허영, 『한국헌법론』, 박영사, 2023.
이준일, 「기본권의 기능과 제한 및 정당화의 세 가지 유형」, 공법연구 제29집 제1호, 2000.
정문식, 「기본권 보호의무의 법적 성격 — 독일에서의 논의를 중심으로」, 공법학연구 제8권 제3호, 2007.
이부하, 「헌법영역에서 기본권 보호의무」, 공법학연구 제8권 제3호, 2007.
2. 외국문헌
Bourdieu, Pierre, Le sens pratique, Les Éditions de Minuit, 1980.
Bourdieu, Pierre / Wacquant, Loïc, An Invitation to Reflexive Sociology,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2.
Foucault, Michel, Surveiller et punir: Naissance de la prison, Gallimard, 1975.
Gadamer, Hans-Georg, Wahrheit und Methode: Grundzüge einer philosophischen Hermeneutik (6. Aufl.), Mohr Siebeck, 1990.
Habermas, Jürgen, Strukturwandel der Öffentlichkeit, Suhrkamp, 1962.
Habermas, Jürgen, Theorie des kommunikativen Handelns, Bd. 1-2, Suhrkamp, 1981.
Habermas, Jürgen, Erläuterungen zur Diskursethik, Suhrkamp, 1991.
Hedemann, Justus Wilhelm, Die Flucht in die Generalklauseln: Eine Gefahr für Recht und Staat, Mohr Siebeck, 1933.
Hesse, Konrad, Grundzüge des Verfassungsrechts der Bundesrepublik Deutschland (20. Aufl.), C.F. Müller, 1995.
Kaufmann, Arthur / Hassemer, Winfried (Hrsg.), Einführung in die Rechtsphilosophie und Rechtstheorie der Gegenwart (8. Aufl.), C.F. Müller, 2011.
Radbruch, Gustav, Rechtsphilosophie (8. Aufl., hrsg. von Erik Wolf und Hans-Peter Schneider), Koehler, 1973.
Radbruch, Gustav, "Gesetzliches Unrecht und übergesetzliches Recht", Süddeutsche Juristen-Zeitung 1 (1946), S. 105-108.
Ricoeur, Paul, Le conflit des interprétations: essais d'herméneutique, Seuil, 1969.
Ricoeur, Paul, Du texte à l'action: essais d'herméneutique II, Seuil, 1986.
Ricoeur, Paul, Soi-même comme un autre, Seuil, 1990.
Zippelius, Reinhold, Rechtsphilosophie (6. Aufl.), C.H. Beck,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