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고지기의 생각, 제5면
지배와 저항의 문자- 접근가능성, 권력, 그리고 민주주의의 역설에 관한 문답
최경은, "지배와 저항의 문자" (인문논총 제72권 제1호, 2015)를 중심으로
問
논문의 핵심 테제는 문자와 권력의 상관관계입니다. 중세 교회가 문자를 독점함으로써 지배권을 행사했다는 것인데, 이 구조를 어떻게 이해하셨습니까?
答
문자독점이 단순히 읽고 쓰는 능력의 독점이 아니라, 해석권의 독점이었다는 점이 핵심입니다. 성서는 공개되어 있었지만 라틴어로 기록되었고, 그 해석은 성직자만이 할 수 있었습니다. 즉, 텍스트에 대한 물리적 접근과 의미론적 접근이 모두 차단된 이중 봉쇄 구조였습니다.
問
그렇다면 인쇄술이 가져온 변화는 단순한 기술혁신이 아니라, 권력구조의 해체였겠군요?
答
그렇습니다. 논문이 지적하듯 교회는 인쇄술을 처음에 면벌부 대량생산의 도구로 환영했습니다. 그것이 오히려 루터의 95개 논제를 15일 만에 독일 전역에 퍼뜨리는 수단이 된 것입니다. 이 역설 — 지배의 도구가 저항의 무기로 전환되는 구조 — 이 논문 전체의 핵심 서사입니다.
問
선생님께선 이 구조가 헤겔의 정반합 모델과 상동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문자독점이 正, 인쇄술·대학·종이의 등장이 反, 종교개혁이 合이라는 도식인데, 완전히 일치한다고 보십니까?
答
헤겔의 지양(Aufhebung)은 더 높은 통일로의 이행을 함의합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의 결과는 오히려 탈중심화였습니다. 루터의 sola scriptura는 각자가 스스로 신학자가 되는 세계를 열었고, 이는 새로운 정통과 이단을 동시에 만들어냈습니다. 합 이후에 다시 정반합이 반복되는 구조입니다. 그 점에서 헤겔 모델과는 방향성이 다릅니다.
問
논문의 역사적 사례를 현재에 적용하면 어떤 구조가 보입니까?
答
중세의 접근불가능성은 외부에서 가해진 것이었기에 피지배자도 자신이 배제되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현대는 다릅니다. 정보는 넘쳐흐르고 법률 텍스트는 공개되어 있으며 투표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법률용어, 불투명한 정치수사, 득표계산식 등이 주권자의 문제해결의지를 스스로 꺾게 만들고 있습니다. '타의적 접근불가능성'이 '자의적 접근자제'로 전환되어 은폐됩니다.
問
그 전환의 핵심은 책임귀속의 문제이군요. 중세 농민은 읽지 못했고, 현대 시민은 읽지 않습니다. 후자는 개인의 선택으로 귀결됩니다.
答
바로 그것입니다. 한병철의 《피로사회》 논리와도 공명합니다. 규율사회가 '하라'는 금지로 주체를 억압했다면, 성과사회는 '할 수 있다'는 긍정성의 과잉으로 주체를 내부에서 소진시킵니다. 정보과잉도 동일한 구조입니다. 알 수 없어서가 아니라, 알려고 할수록 판단의 불가능성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問
제도가 이 복잡성을 재생산하는 공범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요?
答
공범이라는 규정 자체를 재검토해야 합니다. 어떤 제도가 Structure로서, 의도적 설계물에 다름 아니라면 그것은 공범이 아닌 본범으로서 제도고안자와 일체입니다. 그러나 어떤 제도가 고안 이후 자율적 시스템으로서 스스로 사고하고 집행한다면, 그때는 형사법 체계 하에서 공동정범 혹은 간접정범의 양태로 볼 수도 있습니다.
問
그렇다면 제도 고안자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복잡성이 재생산된다면 어떻죠?
答
그 경우라면 제도에 고유한 독자적 귀책 문제가 됩니다. 공범이라는 비유적 수사가 아니라, 제도 자체의 구조적 결함에 대한 분석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問
합리적 선택이 가능한 조건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접근이 필요합니까? 무용한 과잉지식공급을 제도적으로 막아야 한다는 입장이신가요?
答
그것이 저의 암묵지였던 것 같습니다. 가짜뉴스 규제, 악의적 거짓유포 방지를 위한 알고리즘 설계 및 사후 처벌 등 공급 측 규제를 우선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접근은 스스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問
무엇이 무용한가를 결정하는 주체가 새로운 권력이 되는 역설이군요. 중세 교회도 '성서는 오해의 위험이 있으니 교회를 통해 이해하라'고 했으니까요.
答
그렇습니다. 공급 규제 대신 비판적 해석능력의 제도적 육성, 즉 수요 측 역량 강화가 덜 위험한 접근 아닌가 하는 반론이 가능합니다. 다만 이것도 교육권력의 문제를 다시 불러옵니다. 역량강화만으로는 정보 오염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현실적 판단이 공급 규제 우선론의 배경에 있을 것입니다.
問
정답이 있습니까?
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 '모른다'는 것이 오히려 이 대화 전체가 암시하는 바와 맞닿아 있습니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그 선택 자체가 새로운 권력구조를 만듭니다. 어쩌면 이 긴장 자체를 해소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위험하고, 규제 기구에 대한 메타 감시와 역량 강화 프로그램에 대한 지속적 이의제기 — 그 긴장을 의식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더 현실적인 답일지 모릅니다.
대담을 마친후, 녹음된 라디오테이프를 마저 재생한다.
정답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정답이 있다고 믿고 그것을 관철하려는 것보다 민주주의에 덜 위험한 태도일 수 있다.
2026. 2.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