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 상속금지와 법형성: Riggs v. Palmer

생각의 서고 75화

by 소는영


목차

Ⅰ. 서론

Ⅱ. 사건의 개요와 법적 쟁점
Ⅲ. 다수·소수의견의 논리 구조
 1. 다수의견(Earl J. 등): 공통 법격언과 입법 목적에 따른 제한 해석
 2. 반대의견(Gray J.): 성문법 체계의 완결성과 법관의 자기절제
 3. 분기점에 대한 소결
Ⅳ. Riggs v. Palmer의 법형성(Rechtsfortbildung)으로서의 성격
Ⅴ. Riggs v. Palmer와 법이론: 규칙, 원칙, 그리고 Hart–Dworkin 논쟁
Ⅵ. Riggs v. Palmer와 slayer rule의 발전
Ⅶ. Riggs v. Palmer의 법철학적 함의: 법과 도덕, 법발견과 법형성
Ⅷ. 결론


I. 서론


Riggs v. Palmer(115 N.Y. 506, 22 N.E. 188, 1889)은 유언법과 상속법의 문언을 그대로 적용하면 피상속인을 살해한 손자가 상속인이 되는 사안에서, 뉴욕 항소법원이 “어느 누구도 자신의 불법행위로 이익을 취할 수 없다”는 공통 법격언과 공공정책을 근거로 상속을 부정한 판례이다. 이 판결은 상속법의 측면에서는 이른바 'slayer rule'(살인자 상속금지 규칙)의 출발점으로 평가되며, 법철학의 측면에서는 법실증주의와 자연법론, 나아가 하트와 드워킨의 논쟁을 관통하는 사례로 자리 잡았다.

성문 상속법에 살인자 상속금지 규정이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법원이 공통법상의 원칙과 상상된 입법자의 의사에 의거하여 유언의 효력을 제한한 점은, 법원(法源)의 구조, 법관의 법형성(Rechtsfortbildung) 권한, 법과 도덕의 관계에 관한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한다.


우리 법제, 특히 상속결격 규정과 최근 이른바 ‘구하라법’으로 불리는 민법 개정까지 고려할 때, “살인자가 그 범죄로 이익을 얻어서는 안 된다”는 명제는 더 이상 낯설지 않은 규범이다. 그러나 Riggs 사건이 제기하는 문제는, 이 명제가 어디까지 ‘법’으로서 인정될 수 있는가, 즉 그것이 단순한 도덕적 직관을 넘어 공통법상의 법원칙으로 기능할 수 있는지, 그리고 성문법의 문언과 충돌하는 경우 법원이 어떤 방식으로 이를 조화시키거나 우선시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뉴욕 항소법원의 다수의견은 공통 법격언과 공공정책, 입법 목적을 근거로 살인자의 상속을 배제한 반면, 반대의견은 상속·유언법 체계의 완결성과 문언의 우위를 내세워, 그러한 결과는 입법을 통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대립은 법을 규칙들의 집합으로 이해하는 법실증주의적 관점과, 법을 규칙과 원칙의 통합된 체계로 이해하는 관점 사이의 긴장을 응축적으로 보여준다.


본 글은 Riggs v. Palmer(이하 Riggs) 판결을 중심으로, (1) 사건의 사실관계와 법적 쟁점을 정밀하게 재구성하고, (2) 다수·소수의견이 전제하는 법원, 공통법 격언, 입법자의 가정적 의사의 지위를 분석하며, (3) 이 판결이 Hart–Dworkin 논쟁 및 slayer rule 입법 발전 과정에서 가지는 위치를 평가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통해 Riggs 판결이 단순한 “살인자 상속금지”의 사례를 넘어, 법과 도덕의 경계, 법발견과 법형성의 구분, 그리고 법관의 해석권한에 관한 이론적 논의에 어떠한 기여와 한계를 갖는지 밝히고자 한다.




Ⅱ. 사건의 개요와 법적 쟁점


Riggs v. Palmer 사건의 사실관계는 비교적 단순하다.

피상속인 Francis B. Palmer는 1880년경 작성한 유언을 통해 두 딸(원고 Riggs와 Preston)에게는 비교적 소액의 유증을 하고, 손자인 피고 Elmer Palmer(이하 '에르모파마')에게는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유증하였다. 엘머는 유언의 내용을 알고 있었고, 이후 피상속인이 재혼하고 배우자와의 생활보장 계약을 체결하는 등, 유언 변경의 가능성이 현실적인 우려로 떠오르자, 자신에게 유리한 현 상태의 유언이 변경될 것을 두려워하였다. 엘머는 이러한 우려를 해소하고자 피상속인을 독살하였고, 형사재판에서 살인죄로 유죄 판결을 선고받았다.


형사절차와는 별도로, 두 딸은 상속소송에서 “살인자가 그 범죄를 통하여 유산을 취득하여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유언에 따른 '에르모파마'의 유증 부분을 무효로 선언해 달라고 청구하였다. 당시 뉴욕의 상속법과 유언법은, 적법하게 작성·검인된 유언의 효력과 그 취소·변경 요건을 상세하게 규정하고 있었으나, 상속인이 피상속인을 살해한 경우 상속을 박탈한다는 명문의 결격 규정을 두고 있지는 않았다.

이 지점에서 Riggs 사건의 핵심 법적 쟁점, 즉 (1) 명문 규정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살인자의 상속을 배제할 수 있는가, 그리고 (2) 그러한 결론을 정당화할 수 있는 “법원(法源)”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다수의견은, 유언법·상속법의 문언을 문자 그대로 적용할 경우 '에르모파마'가 유산을 취득하는 결과가 되지만, 이는 “자기 범죄로 이익을 얻을 수 없다”는 공통법상의 법격언과 공공정책에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본다. 따라서 법원은 성문법의 문언을 그 입법 목적과 공통법 원칙에 비추어 제한적으로 해석함으로써, 피상속인을 살해한 상속인의 유산취득을 부정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반대로 반대의견은, 상속·유언법이 이미 유언의 무효·취소 사유와 상속결격 사유를 열거하고 있는 이상, 그 목록에 포함되지 않은 새로운 결격 사유를 판례를 통해 인정하는 것은 사실상 입법행위에 해당한다고 보고, 살인 여부와 무관하게 유언은 유효하다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요컨대 Riggs 사건의 쟁점은, 살인자 상속금지가 “법”의 일부인지, 그렇다면 그것이 성문법이 아닌 어떠한 법원에 기반하는지, 그리고 법원이 그 법원을 근거로 성문법의 적용 범위를 어디까지 조정할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Ⅲ. 다수·소수의견의 논리 구조

1. 다수의견(Earl J. 등): 공통 법격언과 입법 목적에 따른 제한 해석


다수의견을 작성한 Earl 판사는 먼저, 유언·상속법의 관련 규정들을 검토한 후, 이 규정들이 피상속인의 사망 후 적법한 유언을 집행하는 일반적 절차와 요건을 정할 뿐, 상속인이 피상속인을 살해한 특수한 상황까지 상정하여 규율하고 있지는 않다고 본다. 이어서 그는 공통법 전통에서 오랜 기간 인정되어 온 여러 법격언을 인용한다. 그 중 핵심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사기·불법·범죄로부터 이익을 취하거나, 자신의 잘못을 방패로 삼아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
No one shall be permitted to profit by his own fraud, or to take advantage of his own wrong, or to acquire property by his own crime.


라는 격언이다. 다수의견은 이러한 격언들이 단순한 도덕적 슬로건이 아니라, 계약·불법행위·신탁·상속 등 여러 분야에서 일관되게 적용되어 온 공통법·형평법상의 원칙이며, 공공정책과 “문명국들의 공통된 법감정”에 의해 지지된다고 평가한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 다수의견은 입법자의 가상적 의도를 반사실적으로 구성한다. 즉, 입법자가 이 사건과 같은 유형—상속인이 유언내용을 미리 알고 피상속인을 살해함으로써 유언에 따른 이익을 조기에 확정하려는 사례—을 미리 상정했다면, 상속결격을 명문으로 규정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입법자는 모든 특수한 사례를 조문에 명시할 수 없으므로, 법원은 “문언에는 없지만 입법 목적과 정신에는 포함되는 경우”를 공통법 원칙과 공공정책을 매개로 포착하여, 성문법을 목적에 맞게 해석·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살인자에게 유언에 따른 상속을 허용하는 것은, 법이 스스로 범죄를 재산취득의 수단으로 승인하는 자기모순을 낳게 되므로, 상속·유언법 규정은 그 목적에 비추어 “살인자 상속금지”라는 제한을 내포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2. 반대의견(Gray J.): 성문법 체계의 완결성과 법관의 자기절제


반대의견을 제시한 Gray 판사는, 동일한 성문 상속·유언법 규정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읽는다. 그는 먼저, 상속·유언법이 유언의 작성·취소·변경 요건과, 일정한 결격 사유를 열거하고 있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는 입법자가 유언의 효력과 상속인의 자격 문제를 포괄적·완결적으로 규율하고자 한 의사의 표현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본다. 이 체계 하에서는, 유언의 취소·무효·변경은 법이 정한 절차와 사유에 한정되어야 하며, 법이 명시하지 않은 새로운 사유를 판례로 추가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Gray 판사는, 공통법 격언과 도덕적 직관의 역할을 엄격히 제한한다. 그는 “자기 불법으로 이익을 얻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 원칙이 상속·유언법의 문언과 체계 위에 서서 새로운 상속결격 사유를 창설할 수는 없다고 본다. 이미 형사재판을 통해 '에르모파마'에게 살인에 대한 형벌이 부과된 이상, 상속을 추가적으로 박탈하는 것은 사실상 입법자가 예정하지 않은 추가 형벌을 부과하는 효과를 낳으며, 이는 죄형법정주의 및 권력분립의 관점에서 문제를 야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살인자 상속금지가 바람직하다면, 이는 입법부가 명문 규정을 통해 해결해야 할 과제이며, 법원이 공통법 격언과 공공정책을 이유로 성문 상속법의 문언을 실질적으로 변경하는 것은 입법기능의 침해에 해당한다고 비판한다.



3. 분기점에 대한 소결


이처럼 Riggs 사건의 다수·소수의견은, (1) 성문법 문언과 공통법상의 법격언 사이의 우선순위, (2) 입법 목적·가정적 입법자의 의사를 해석 과정에 얼마나 강하게 개입시킬 것인지, (3) 판사가 “법의 구성자”인지 “성문법의 기술적 집행자”인지를 둘러싸고 근본적인 입장 차이를 드러낸다. 다수의견은 공통법 원칙과 입법 목적을 통해 성문법의 공백을 보충하는 적극적 법형성을 정당화하는 반면, 반대의견은 상속·유언법 체계의 완결성과 법관의 자기절제를 강조함으로써, 살인자 상속금지의 당위에도 불구하고 이를 판례로 인정하는 데에는 신중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이러한 분기점은 이후 하트와 드워킨의 논쟁에서 “법은 규칙들로 충분한가, 아니면 원칙까지 포함하는가”라는 쟁점의 출발점으로 재구성되며, Riggs 판결을 단일 사건을 넘어선 법이론적 사례로 부각시키는 배경이 된다.




Ⅳ. Riggs v. Palmer의 법형성(Rechtsfortbildung)으로서의 성격


Riggs 사건이 단순한 법해석을 넘어선 법형성(Rechtsfortbildung)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이 판례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를 가르는 핵심 지점이다.


다수의견은 상속·유언법 규정이 살인자 상속금지를 명문으로 규정하지 않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입법자가 모든 특수사례를 미리 규정할 수 없다는 한계”의 반영으로 이해하고, 공통법상의 법격언과 공공정책을 통해 그 공백을 보충하고자 하였다. 이 점에서 Riggs 사건은 전형적인 법적 공백(lacuna)에 대한 판례에 의한 보충 사례로 보일 수 있다.
다만 반대의견이 강조하듯, 상속·유언법이 유언의 취소·변경 사유와 상속결격 사유를 상당한 정도로 열거하고 있었던 이상, 이를 “공백”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입법자가 일부러 규정하지 않은 영역”으로 볼 것인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


(1) 독일 법이론에서 말하는 법형성 유형을 기준으로 보면, Riggs 사건은 우선 praeter legem(법 밖·법보충적 법형성)의 성격을 강하게 띤다. 즉, 성문 상속법에 살인자 상속금지에 관한 직접 규정이 없다는 전제 하에서, 공통법 격언과 공공정책을 근거로 그 결함을 보완한 것이다. 다수의견은 자신들의 작업을 “새로운 규범의 창조”라기보다, 오래된 공통법 원칙을 구체적 사건에 적용함으로써 비로소 그 의미를 드러낸 “법발견”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반대의견이 지적하듯, 상속·유언법의 체계가 이미 유언의 효력과 상속결격 사유를 상세히 규율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살인자 상속금지는 실질적으로 기존 체계에 새로운 결격사유를 추가하는 입법적 효과를 갖는다. 이 관점에서 다수의견은 약한 의미의 contra legem(문언에 반하는) 요소를 내포한 법형성으로 평가될 여지가 있다.


(2) 법발견과 법형성의 구분이라는 측면에서도 Riggs 사건은 경계선상에 위치한다. 다수의견은 공통법 격언과 “모든 문명국의 공통된 법감정”이라는 표현을 통해, 자신들이 의존하는 원칙이 단지 도덕적 직관이 아니라, 이미 공통법·형평법 전통 속에서 축적된 법원칙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서술은, 판결이 단지 새로운 규범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전통 속에 잠재되어 있던 법원칙을 “발견”하여 적용한 것이라는 자기 이해를 반영한다. 그러나 법원칙이 아무리 오래된 전통과 광범위한 수용을 바탕으로 한다 하더라도, 구체적 성문 체계와 충돌할 때 그 원칙을 우선시하는 순간, 판사는 불가피하게 입법적 결단을 행하는 위치에 선다. 이 점에서 다수의견은 법발견과 법형성의 경계를 흐리게 하는 사례로서, 판사의 해석권한과 입법권의 한계를 어디에 둘 것인가에 관한 이론적 논의를 촉발한다.



Ⅴ. Riggs v. Palmer와 법이론: 규칙, 원칙, 그리고 Hart–Dworkin 논쟁


Riggs 사건은 20세기 후반 법철학에서 H.L.A. Hart(이하 하트)와 Ronald Dworkin(이하 드워킨) 사이의 논쟁을 설명할 때 거의 필수적으로 언급되는 사례이다. 하트가 『법의 개념』에서 법을 “사회적 사실에 의해 형성된 규칙들의 체계”로 이해했다면, 드워킨은 Riggs 사건과 같은 사례를 통해 법이 규칙뿐만 아니라 원칙(principles)과 정책(policies)을 포함하는 복합적 구조임을 강조하였다.

Riggs 사건에서 상속·유언법의 규칙은 비교적 명확하다. 적법하게 작성·검인된 유언은 그에 따라 집행되어야 하며, 상속결격 사유는 법이 열거한 범위로 한정된다. 그럼에도 다수의견은 이 규칙들을 그대로 적용하는 대신, “자기 불법으로 이익을 취할 수 없다”는 원칙과 입법 목적에 따라 결론을 바꾸었다.


드워킨은 바로 이 지점에서 Riggs 사건을 “규칙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법적 판단 구조”의 사례로 제시한다. 그에 의하면 Riggs 사건의 다수의견과 소수의견 모두 단지 “법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정책)”를 논한 것이 아니라, “법이 지금 무엇인가(what the law is)”를 두고 진지하게 다투고 있다. 다수의견은 자기 불법이익 금지 원칙을 “법체계 내부의 원칙”으로 파악하여, 성문 상속법 규칙과 함께 고려해야 할 법적 이유로 삼는다. 반대의견 역시, “성문법으로 정한 것 이상으로 처벌하거나 제재를 확대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전제하고 있는데, 이는 하트가 “법과 도덕의 분리”를 주장하면서도 인정한 일종의 법적·정치적 원칙과 유사한 지위를 가진다. 드워킨은 이러한 원칙들이 단순한 도덕이나 정책이 아니라, 법원이 실제로 “법의 일부”로 취급하는 규범이라고 보며, 하트의 규칙 중심 모델로는 이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이에 대해 하트식 법실증주의는, Riggs 사건에서 적용된 원칙들도 결국 “규칙의 인식규칙(rule of recognition)에 의해 승인된 법원”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식의 대응을 제시한다. 즉, 공통법 격언이 오랜 판례와 법실무의 관행을 통해 법원으로 인정되었다면, 그것도 넓은 의미의 “법규범”으로서 상속·유언법 규칙과 함께 고려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는 Riggs 사건의 다수의견이 특별히 자연법론적이거나 도덕을 법 위에 올려놓은 것이 아니라, 단지 법원 간의 충돌을 해결하는 해석론적 선택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설명은 여전히 한계를 갖는다. 다수의견은 공통법 격언을 적용하기 위해 “입법자가 알았더라면 어떻게 규정했을지를 반사실적으로 구성하는” 작업을 수행하는데, 이러한 가정적 입법자의 의사에 대한 호소는 하트의 '사회적 사실 이론'과 긴장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결국 Riggs 사건은, 법이 단순한 규칙들의 집합이 아니라, 규칙과 원칙, 그리고 입법 목적과 공공정책이 복합적으로 얽힌 구조라는 점을 드러내는 사례로 이해할 수 있다. 동시에, 이 사건은 공통법 원칙과 성문법 규칙이 충돌할 때, 판사가 어느 정도까지 “목적론적·원칙 중심”의 해석을 통해 규칙의 적용범위를 조정할 수 있는지, 그 과정이 법발견인지 법형성인지, 그리고 그 정당화를 어떤 이론적 틀로 설명할 수 있는지에 관해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이러한 점에서 Riggs 사건은 slayer rule(이하 살인자 상속금지 규칙)의 기원이라는 실정법적 의의와 더불어, 하트와 드워킨 논쟁의 살아 있는 예시로서, 법의 개념과 법해석 이론을 논의하는 데 여전히 풍부한 자원을 제공한다.



Ⅵ. Riggs v. Palmer와 slayer rule의 발전


Riggs 사건은 개별 사건을 넘어, 이후 미국 상속법에서 살인자 상속금지 규칙의 형성 과정에 중요한 이정표로 평가된다. Riggs 사건 이전에도 equity*와 공통법은 특정 상황에서 살인자의 재산 취득을 제한한 바 있으나, 살인자 상속금지에 관한 명문 규정은 주마다 상이하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Common Law(보통법)를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진 별도의 법 체계와 구제수단


Riggs 사건은 뉴욕 항소법원이 공통법상의 법격언과 공공정책에 기초하여, 상속법·유언법의 명문 규정 부재에도 불구하고 살인자의 상속을 배제한 대표 사례로서, 이후 입법과 판례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실제로 Riggs 이후 미국의 다수 주에서는 입법을 통해 slayer rule을 명문화하는 경향이 강화되었다. 이른바 slayer statutes**는 대개 “상속인이 고의·불법으로 피상속인의 생명을 빼앗은 경우, 상속에 관하여 피상속인보다 먼저 사망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규정을 두고, 그 효과를 상속, 유증, 보험수익, 공동재산 지분 등에까지 확대하고 있다. 뉴욕 주 역시 Riggs 사건 이후 판례법으로 인정된 원칙을 입법으로 추인·정교화하는 과정을 밟았고, 그 과정에서 constructive trust***를 이용하여 살인자의 이익을 차단하는 형평법적 구제가 병행되었다. 이처럼 Riggs 사건은, 공통법적 법격언을 통해 먼저 판례법 차원에서 슬레이어 규칙을 선언하고, 이후 성문법이 이를 이어받아 일반화한 “판례→입법”의 전형적 경로를 보여준다.

**미국 각 주에서 제정한, 이른바 “살인자 상속금지 규정”을 뜻한다.
***quity(형평법)의 구제수단으로, 명시적인 신탁 설정 의사나 계약이 없어도, 법원이 ‘공정·형평’을 이유로 강제로 만들어 주는 신탁을 뜻한다. 법원이, 특정 재산의 법률상 소유자에게 그 재산을 다른 사람(진정한 수익자)을 위해 신탁(trust) 형태로 보유하라고 명하는 구제수단으로서, 법원은 “법률상 소유자”에게 형평법상 신탁의무(equitable obligations)를 부과하고, 그 재산의 실질적인 이익을 다른 사람(피해자, 공정한 수익자)에게 귀속시킨다. 즉, 명목상 소유자는 신탁관리인(trustee)로 전환되고, 진짜 이익귀속자는 수익자(beneficiary)가 되는 구조가 된다.


비교법적으로 보면, 대륙법계의 여러 민법, 특히 독일·프랑스 및 한국 민법은 일찍부터 상속결격 사유로 피상속인에 대한 살인 등을 명문으로 규정해 왔다. 이에 비해 미국에서는 Riggs 사건과 같은 판례를 통해 “범죄를 통한 상속이익 봉쇄”라는 원칙을 먼저 공통법 차원에서 확인한 다음, 각 주가 이를 입법화하는 경로를 택했다는 점에서, 양법계는 같은 규범 내용에 도달하는 방식에서 차이를 보인다. 따라서 Riggs 사건은 살인자 상속금지라는 실정법적 결과뿐 아니라, 공통법이 어떻게 성문법의 발전을 선도할 수 있는지, 그리고 판례에 의해 형성된 법원칙이 입법의 방향을 어떻게 설정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서도 의미를 갖는다.




Ⅶ. Riggs v. Palmer의 법철학적 함의: 법과 도덕, 법발견과 법형성


Riggs 사건이 법철학에서 지속적으로 논의되는 이유는, 이 판결이 법과 도덕의 관계, 법발견과 법형성의 구분, 그리고 법관의 해석권한이라는 세 가지 고전적 주제를 하나의 사건 안에 응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다수의견이 의존하는 “자기 불법으로 이익을 취할 수 없다”는 원칙은, 그 내용상 명백한 도덕 원칙이지만, 동시에 공통법·형평법 전통 속에서 반복 적용되어 온 법원칙으로서의 성격도 갖는다. 이 원칙을 성문 상속법 규정과 동일한 층위의 법원으로 인정할 것인지, 아니면 도덕적 고려로서만 한정할 것인지는 법실증주의와 자연법론 사이의 이론적 입장 차이를 직접적으로 반영한다.


다수의견은 이 원칙을 “모든 문명국에서 통용되는 보편적 법”으로 묘사하며, 법원이 이를 근거로 상속법의 문언을 제한할 수 있다고 본다. 이는 자연법적 색채를 띠는 동시에, 공통법 전통에 대한 역사적·관행적 정당화를 통해 실증적 기반을 확보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반대의견은 이러한 접근이 도덕을 빌미로 성문법 체계 위에 새로운 규범을 덧붙이는 것이라고 비판하며, “법률의 불완전함을 이유로 판사가 입법자의 자리를 대신해서는 안 된다”는 실증주의적 자기절제를 강조한다.

이 대립은, 도덕이 법의 내용과 정당화에 필연적으로 관여한다는 규범적 주장과, 법의 존재론적·인식론적 자율성을 강조하는 실증주의 사이의 긴장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법발견과 법형성의 구분 역시 Riggs 사건에서 중요한 논점으로 떠오른다. 다수의견은 자신들의 작업을 “오래된 공통법 원칙과 입법 목적을 발견하여, 그에 상응하는 구체적 결론을 도출한 것”으로 서술하지만, 반대의견 입장에서는 이는 사실상 새로운 상속결격 사유를 창설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동일한 판결을 두고도 한쪽은 법발견으로, 다른 한쪽은 법형성으로 보는 시각이 갈리는 것은, “법이 전통·관행·원칙의 형태로 어느 정도까지 잠재적으로 주어져 있는지”, “판사가 그 잠재적 내용을 구체화하는 행위를 어디까지 ‘발견’으로 볼 수 있는지”라는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Riggs 사건은 법관의 해석권한과 그 한계를 둘러싼 논쟁의 출발점이 된다. 다수의견은 법관이 성문법의 문언뿐만 아니라, 그 목적·공공정책·공통법 원칙을 고려하여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결과”를 피해야 한다는 역할 이해를 전제로 한다. 반대로 반대의견은, 그러한 역할 이해가 법관을 입법자의 지위에까지 끌어올릴 위험을 지적하면서, 법관은 불합리한 결과를 인식하더라도, 그 해결을 입법부와 정치과정에 맡겨야 한다고 본다. 이 대립은 현대 헌법재판과 인권판례에서 반복되는 “사법적 적극주의 vs 사법적 자제” 논쟁과 구조적으로 유사하며, Riggs 사건을 통해 고전적인 형태로 재현된다.


Riggs 사건은 이러한 이유들로, 단순한 상속분쟁을 넘어 법과 도덕, 규칙과 원칙, 법발견과 법형성, 사법과 입법의 역할 분담에 관한 논의의 장을 제공하는 사례로 평가될 수 있다. 이 판례를 어떻게 해석하고 평가하느냐에 따라, 각 법이론이 전제하는 “법의 개념”과 “법관의 임무”에 대한 이해가 드러나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법철학·해석론·비교법 연구에서 계속해서 소환되고 있는 것이다.



Ⅷ. 결론


Riggs 사건은 피상속인을 살해한 손자가 유언에 따라 상속받을 수 있는지라는 구체적 분쟁을 넘어, 법원(法源)의 구조와 법관의 해석권한, 법과 도덕의 관계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를 드러낸 판결이다. 다수의견은 “자기 불법으로 이익을 취할 수 없다”는 공통법 격언과 공공정책을 근거로, 살인자 상속금지가 성문 상속법의 명시적 규정이 없음에도 법체계 내부의 원칙으로 인정되며, 입법 목적과 가정적 입법자의 의사에 비추어 볼 때 상속을 배제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본다. 반대의견은 상속·유언법의 체계가 유언의 효력과 상속결격 사유를 이미 완결적으로 규율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새로운 결격 사유를 판례를 통해 창출하는 것은 사실상 입법행위에 해당하며, 법관은 성문법의 문언과 체계에 구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대립은 Riggs 사건이 단순한 “살인자 상속금지”의 정당성 여부를 넘어, 법을 규칙들의 집합으로 이해하는지, 아니면 원칙과 목적을 포함한 복합적 구조로 이해하는지에 따라 동일한 사건에 대한 해석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다수의견의 공통법 격언·입법 목적·가정적 입법자의 의사에 대한 의존은, 하트가 제시한 규칙 중심의 법실증주의로는 충분히 설명되기 어려운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드워킨이 주장한 “법은 규칙과 원칙의 통합체”라는 관점을 뒷받침하는 사례로 읽힐 수 있다. 동시에, 공통법 원칙을 근거로 성문법 체계를 실질적으로 보정하는 다수의견의 태도는, 법형성과 법발견의 경계, 법관의 해석권한과 입법권의 한계를 둘러싼 새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실정법적 측면에서 Riggs 사건은 미국에서 slayer rule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상징적 출발점으로 기능하였다. 이 판례를 계기로 많은 주에서 살인자 상속금지를 명문화한 slayer statutes를 제정하였고, 오늘날에는 성문 규정과 공통법 원칙의 결합을 통해 범죄를 통한 상속이익을 봉쇄하는 규범 구조가 일반화되었다. 대륙법계 국가들이 비교적 이른 시기에 상속결격 사유를 민법에 명문화함으로써 문제를 처리한 것과 달리, 미국은 Riggs와 같은 판례를 통해 먼저 원칙을 선언하고, 입법이 이를 뒤따르는 경로를 택했다는 점에서, 양법계의 차이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궁극적으로 Riggs 사건에 대한 평가는, 각 법이론이 전제하는 “법의 개념”과 “법관의 역할”에 대한 이해를 반영한다. 공통법 격언을 실질적 법원칙으로 받아들이고, 입법 목적·공공정책·가정적 입법자의 의사를 해석 과정에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다수의견을 통해, 우리는 법이 단지 성문 규정의 집합이 아니라, 역사적 관행과 도덕적 직관, 제도적 목적이 교차하는 복합적 구조임을 확인하게 된다. 반면, 반대의견은 이러한 구조 속에서도 법관이 어디까지나 성문법의 한계를 존중해야 한다는 실증주의적 자기절제의 중요성을 상기시킨다. Riggs 사건은 바로 이 두 입장 사이의 긴장 속에서, 오늘날까지도 법철학·해석론·비교법 연구에서 풍부한 논의의 원천으로 남아 있다.




2026. 3. 3.



참고문헌


Riggs v. Palmer, 115 N.Y. 506, 22 N.E. 188 (N.Y. 1889).

“Riggs v. Palmer,” Wikipedia, last modified.

Marcello Di Bello, “Riggs v. Palmer” (course materials). J. C. Cohen, “The Slayer Rule,” Boston University Law Review. “The Slayer Rule,” New York Trusts & Estates Litigation Blog. “Slayer rule,” Wikipedia. “Unjustified Enrichment: Key Issues in Comparative Perspective,” (comparative enrichment law). “Legal Positivism, Social Rules, and Riggs v. Palmer,” Journal article (JSTOR).


Ronald Dworkin, Taking Rights Seriously, Harvard University Press. _____________, Law’s Empire, Harvard University Press.

H. L. A. Hart, The Concept of Law, 2nd/3rd ed., Oxford University Press. “Legislative Intentions and Counterfactuals: Or, What One Can Still Learn from Dworkin’s Critique of Legal Positivism,” Ratio Juris. “Significance in Philosophy – Riggs v. Palmer,” LiquiSearch. “Analysis of Riggs v. Palmer Case,” IvyPanda. “상속결격,” 위키백과. “Need for Slayer Statute to Determine Effect of Homicide on Property Rights,” scholarly art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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