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間)에 관하여

생각의 서고 74화

by 소는영


창밖으로 밤이 꽤 깊었다. 상담실 안에는 은은한 우드 향의 디퓨저가 조용히 공기를 채우고 있었고, 낮은 스탠드 조명이 테이블 위에 노란 원을 그리고 있었다.

카우(나)는 소파에 등을 기댄 채, 특별히 급하지 않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카우

문득 든 생각이 있습니다. AI로 만든 음악이나 그림이 이제 일상이 되었죠. Suno로 만든 곡이 유튜브에 조회수 몇 개짜리로 올라와 있어도, 퀄리티는 떨어지지 않는 것들이 즐비한 시대가 됐고. 그러다 보니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한다는 게 더 이상 이상(理想)이 아니라 현실이 되어버렸습니다.


선생님

그게 왜 불편하게 느껴지시나요?


카우

뭔가.. 이상이었을 때가 더 좋았던 것 같아서요. 자기만의 세계가 필요하다는 건,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공간을 원한다는 뜻이지, 영구히 타인과 섞이지 않는 무인도를 원한다는 뜻은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인간人間이라는 한자도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리키는 건데, 지금은 그 사이가 점점 메워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잠시 펜을 내려놓았다. 창밖에서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가 가늘게 들렸다.


선생님

알고리즘이 보고 싶은 것만 보여주고, AI가 듣고 싶은 것만 만들어주면. 결핍 자체가 사라지는 거죠. 그리고 결핍이 없으면, 타자를 향한 동력도 함께 사라질 수 있고요.


카우

맞아요. 거기다가 요즘은 조언이나 제언조차 간섭으로 여기는 분위기잖아요. 각자도생, YOLO, 불간섭주의. 단독자로서의 개인을 절대적으로 신뢰해야 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AI의 개별화와 맞물리면, 진짜 아무도 타자에게 다가갈 수 없게 될 것 같아요.


선생님

개인의 자유를 침해해도 된다는 게 아니라, 그 풍토 자체가 우려스럽다는 말씀이시죠.


카우

네. 그리고 최근에 일본 렌탈 서비스를 다룬 영화가 개봉했거든요. 어떤 인터뷰어가 말하더라고요. 외롭다는 것보다, 외로워 보인다는 것을 더 두려워한다고. 그 말이 계속 머릿속에 남아 있어요.




스탠드 불빛이 카우의 옆모습을 조용히 비추고 있었다. 선생님은 메모를 하는 척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선생님

만약 취약함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민폐가 되는 사회라면, 그 안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언어는 사라질 수밖에 없겠네요. 그리고 그 끝에서 어떤 사람들은, 존재를 소거하는 방식으로 민폐를 해결하려 하기도 하고요.


카우

일본에서 실종자 수가 늘어나는 것도 그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봐요. 어떤 면에서는 책임감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방향이 잘못된 건지, 아니면 그저 다른 건지. 생각이 복잡해지더라고요.


선생님

다르므로 존중해야 하는 영역이 있고, 방향이 잘못되었다고 말해야 할 영역이 있습니다. 둘을 구분하는 게 쉽지는 않지만, 취약함을 드러낼 통로 자체가 막히는 건, 저는 후자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카우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먼 곳에 가로등 하나가 흔들리고 있었다.



카우

어쩌면 지금의 세계관도 영원하진 않겠지요. 언젠가 저도 남들과 비슷해진다면, 결국 다르지 않게 되는 거겠고.


선생님

그게 수용인가요, 아니면 잠식인가요?


카우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선생님은 더 묻지 않았다. 그것이 가장 정직한 대답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디퓨저에서 향이 한 줄기 올라왔다가 조용히 흩어졌다.

밤은 여전히 깊었고, 상담실 안은 그 대답을 오래도록 품고 있었다.


2026.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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