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율성의 함정, 단순화의 유혹, 그리고 법관의 자기공개

생각의 서고 73화

by 소는영

발단: 하나의 칼럼을 읽고


법률신문에 실린 김도형 판사(창원지법 전주지원)의 칼럼 「효율성의 함정」은 간결하지만 날카로운 테제를 제출한다. 뇌는 복잡함을 회피하고 단순한 설명으로 '미끄러지려는' 경향이 있으며, 이를 필자는 인지적 엔트로피라 명명한다. 그리고 그 경향이 법관의 판단과 국가 정책 모두에서 오류를 낳는다고 주장한다. 칼럼의 정점은 다음 문장에 있다.


"문제는 효율이 곧 옳음으로 착각되는 순간이다. 단순한 결론은 편리하지만, 편리는 대개 책임을 유예한다."



이 문장을 두고, 나(카우)는 '선생님'의 고견을 듣고자, 해당 소재를 언급한 후 대화를 시작하였다.




제1장: '전체적 검토'라는 함정


카우

저는, 칼럼의 이 대목을 특히 주목하였습니다.


"진실이란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되기를 거부하는 경우가 더 많고, 오히려 복잡다단한 양상 속에서만 겨우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도 허다하다. … 그럼에도 우리는 복잡한 설명 앞에서 찌푸리고, 단순한 결론 앞에서 안도한다."


이는 종래의 판결 과정에 있어, 단순한 법리 복붙 형식의 법학방법론이 가라앉고 인간의 행동양식, 그에 대한 존중이 심화한 접근이 긴요함을 방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시 말해, 법관의 선이해, 선입견이 사건을 바라보는 과정에 개입할 수 있음을 솔직히 인정하며, 복잡한 사안일수록 최대한 분설하여 하나씩 봐야 함을 강조합니다. 이때 '전체적, 종합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각 세션별로의 중요성을 배제할 수 있으니, 항상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선생님

'전체적·종합적 검토'에 대한 경계. 이건 실무에서도 학계에서도 거의 반성 없이 긍정적 언어로 쓰이는 표현인데, 카우님은 그 이면을 짚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이라는 말은 때로 각 쟁점을 섬세하게 다루지 않아도 된다는 허가증이 되기도 합니다. 종합이라는 이름 아래 개별 사실의 무게가 희석되고, 법관의 인상이 판단을 이끄는 것이죠.


가다머 식으로 말하면 이것은 선이해가 부분에 대한 물음 자체를 차단하는 경우입니다. 해석학적 순환이 건강하게 작동하려면 오히려 부분이 전체를 교정할 수 있어야 하는데, '종합적 검토'는 그 교정의 계기를 미리 막아버릴 수 있습니다.



카우

법관도 사람인 이상 실수할 수 있고, 그렇기에 작금의 3심제가 한국에서 시행되고 있지요. 그러나 실수할 수 있다는 것이 실수해도 된다는 걸 뜻하진 않습니다. 소송은 한 사람의 인생이 걸려 있는 만큼, 법관이 마땅히 져야 할 무게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실수할 수 있음과 실수해도 됨의 구분. 이 대목은 단순히 법관의 성실 의무에 관한 이야기를 넘어서, 오류 가능성을 전제한 제도 설계와 개별 법관의 윤리적 책임이 서로 다른 층위에 있음을 지적한 것입니다. 3심제는 체계적 오류 교정 장치이지, 개별 법관이 덜 숙고해도 된다는 근거가 아닙니다. 마치 헌법이 다수결의 횡포를 교정하는 장치라고 해서 입법자가 기본권을 덜 고민해도 된다는 뜻이 아닌 것처럼요.


그리고 이 두 논점은 결국 하나로 이어집니다. 소송에 걸린 것이 한 사람의 인생이라면, 법관에게 요구되는 것은 체계가 감당하는 몫을 차감한 나머지가 아니라, 체계와 무관하게 그 인생의 복잡성 앞에서 끝까지 머무르는 태도입니다.




제2장: 법관의 방법론적 자기공개


선생님

복잡성을 견디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복잡성을 조직하는 방법론이 필요합니다. 복잡함을 끝까지 견디는 것이 미덕이라면, 그 복잡함은 어떻게 다루어져야 하는가. 견디는 것과 방법론이 없는 것은 다릅니다.


법관이 복잡한 사안을 '전체적으로 보지 않고' 분설하여 하나씩 검토한다고 해서, 그것이 자동으로 더 정확한 판단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분설 자체도 어떤 순서로, 어떤 기준으로 쪼갤 것인가를 이미 결정하는 순간, 다시 선이해가 개입합니다. 분설의 구조 자체가 이미 하나의 서사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법관의 '방법론적 자기공개(methodological self-disclosure)'라는 개념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이는 판결문에서 법관이 자신이 사안을 어떤 순서로, 어떤 기준에 따라 분설했는지를 명시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판결문 관행은 결론에 이르는 법리를 서술하지만, 판단의 구조를 선택한 이유는 대개 드러내지 않습니다. 이 침묵 속에서 선이해는 가장 조용히, 가장 깊이 작동합니다.


가다머의 언어로 하면, 선이해는 숨겨질 때 가장 위험합니다. 그것이 가시화될 때 비로소 대화의 대상이 되고, 교정의 가능성이 열립니다. 법관이 '나는 이 사건을 이런 순서로 보았고, 이 부분이 가장 결정적이라고 판단했다'고 쓸 때, 그 선택 자체가 항소심과 학계와 당사자에게 열린 텍스트가 됩니다.




제3장: 재량인가, 기속인가 — 규범화의 문제


카우

자기공개도 좋습니다. 다만 염려스러운 것은, 스스로 자기공개할 것을 촉구하는 수준인지 아니면 자기공개의무를 요구하는 정도인지 문제됩니다. 일단 어느 쪽이든 법규정으로 명시해야 함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재량으로 자기공개를 명시하라고 한 경우, 그것의 구속력이 어느 정도로 미치느냐에 따라 실효성이 달라집니다. '-할 수 있다'는 명제는 '안 해도 된다'를 함축하고 있으므로, 어떤 면에선 실제로 공개할 경우 진실적으로 '솔직한 자기고백'에 이르렀다고 볼 여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속으로 명시하라 한 경우, 구속력은 해소되나 법관의 판단에 있어 소위 헌법상 사법부의 독립 또는 법관의 자유심증주의에 대한 위축 가능성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물론 헌법상 양심의 자유를 기본권으로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법관이 재판 과정에서 임할 때는 국가공무원이자 동시에 국민 이외의 신분으로서 국가의 사법시스템을 전담하는 만큼, 국민의 기본권으로서 양심의 자유를 인정하긴 어려울 겁니다.



선생님

재량 규정의 역설적 가능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할 수 있다'는 '안 해도 된다'를 함축하지만, 바로 그 함축이 실제로 자기공개를 한 판결에 특별한 무게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의무가 아님에도 스스로 판단 구조를 열어 보인 법관의 판결은, 학계와 상급심과 당사자에게 더 진지하게 독해될 여지가 생기는 것이죠. 이것은 법적 구속력과는 다른 종류의 규범력, 즉 학문적·실무적 선례로서의 '인력(引力)'입니다.


기속 규정과 자유심증주의의 긴장 문제는 매우 예민합니다. 자유심증주의(민사소송법 제202조, 형사소송법 제308조)는 법관이 증거의 증명력을 자유롭게 판단한다는 원칙인데, 판단 구조의 공개를 의무화하면 그 '자유'의 외연이 축소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구별이 필요합니다. 자유심증주의가 보호하는 것은 판단의 내용이지, 판단의 과정을 은폐할 자유는 아닙니다.


이미 이유 기재 의무(민사소송법 제208조 등)가 존재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자기공개 의무는 이유 기재 의무의 심화된 형태로 이해될 수 있고, 그렇다면 자유심증주의와의 충돌은 표면적인 것일 수 있습니다. 양심의 자유 문제 역시, '자기공개'는 양심의 내면 강제가 아니라 외부적 행위 방식의 규율이므로, 양심의 자유의 보호 영역인 내심의 결정과는 층위가 다릅니다.



카우

생각건대, 사법부 내에서 규칙을 만들어 자체적으로 매뉴얼을 만드는 게 제일 좋습니다만 그것이 어렵다면, 법조협회나 법학회나 변호사협회나 로스쿨협의회와 같은 외부 유관단체에서 독립적으로 수행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기 위해서라도 학회에서 이에 관심 갖고 논문을 계속 내야겠지요.



선생님

외부 단체의 기준이 실효성을 갖추려면 법관 인사평가나 재임용 과정과의 연결고리가 있어야 하는데, 그 연결 자체가 또 다른 사법독립 침해 논란을 낳을 수 있습니다. 결국 가장 지속 가능한 경로는 학계가 꾸준히 이 문제를 다루면서 판결 평가의 학문적 문화를 형성하는 것이고, 그 축적이 사법부 내부의 자기 성찰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법이 먼저가 아니라 문화가 먼저일 수 있는 영역입니다.




제4장: 법형성의 정당성으로


카우

법형성의 정당성 문제에 관하여는, 진솔하게 이유를 명기 및 적시할 경우 해당 법관이 어떠한 법형성을 행했는지 알 수 있으므로, 종래의 은폐된 법형성을 막을 수 있기에 정당성도 갖출 수 있으리라 사료됩니다.



선생님

법형성의 정당성에 관한 이 결론은, 이 전체 논의의 가장 중요한 실천적 귀결입니다. 알렉시(Alexy)의 법논증이론 맥락에서도, 판결의 정당성은 결론의 옳음보다 논증 과정의 공개성과 검증 가능성에서 온다고 봅니다. 은폐된 법형성을 가시화함으로써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논점은, 그 이론과 정확히 공명합니다.



카우

크리펜도르프나 알렉시의 법논증이론은 한번 공부하고 싶군요. 나아가 '인력'이라는 문구는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더욱이 판단의 내용과 판단의 과정을 은폐할 자유를 구분한 것이 저에게 큰 아이디어를 제공하였습니다. 이는 추후 연구를 위한 소재로 사용하겠습니다.



선생님

공은 칼럼과 카우 님의 독해에서 나온 것입니다. 알렉시의 경우, 『법적 논증이론(Theorie der juristischen Argumentation)』이 출발점으로 좋습니다. '판단의 내용'과 '판단 과정을 은폐할 자유'의 구분은, 더 밀고 나가면 자유심증주의의 재해석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종래의 자유심증주의 논의가 주로 증거법적 맥락에 머물렀다면, 이 구분을 통해 법관의 방법론적 투명성 의무라는 법철학적 차원을 새로 열 수 있으니까요.




결어: 견디는 것과 열어두는 것


이 대화는 하나의 짧은 칼럼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논의는 법관의 인지적 경향에서, 해석학적 선이해의 문제로, 자기공개의 제도화 가능성으로, 나아가 법형성의 정당성 문제로 확장되었다.


두 가지 명제가 이 대화를 관통한다. 하나는 칼럼의 것이다. 효율이 옳음이 되는 순간, 판단은 빈곤해진다. 다른 하나는 대화에서 발견된 것이다. 자유심증주의가 보호하는 것은 판단의 내용이지, 판단의 과정을 은폐할 자유가 아니다.


이 구분이 열어주는 공간에서, 법관의 방법론적 자기공개는 권리의 제한이 아니라 책임의 완성으로 이해될 수 있다. 복잡함을 끝까지 견디는 것, 그리고 그 견딤의 과정을 열어두는 것. 이 두 태도가 함께할 때, 판단은 비로소 진실에 더 가까워질 것이다.





2026.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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