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말(言)들의 계절- "낯선" 단어가 된 시대

생각의 서고 78화

by 소는영


어느 순간부터 '권위'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기가 조심스러워졌다. 마치 그 단어를 꺼내는 것만으로 어떤 낡은 세계의 편에 선 것처럼 보일까 봐.


'진리'도 마찬가지다. 진리를 말하면 독단적인 사람이 되고, 보편을 말하면 다양성을 억압하는 사람이 된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을까.




단어들이 하나둘 진영의 깃발이 되어간다. '공정'은 어느 쪽의 것이고, '정의'는 다른 쪽의 것이며, '자유'는 또 다른 쪽의 것이다. 한때 우리 모두가 공유하던 가치의 이름들이 이제는 특정 세력의 전리품이 되어, 그 단어를 쓰는 순간 나는 이미 어떤 편에 배속된다. 그렇게 분석의 도구여야 할 언어가 소속의 신호가 되었다. 지적 탐구의 매체가 정치적 표지로 전락한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언어의 문제가 아니다. 사유 자체가 독점되고 있다는 징후다. 어떤 개념에 대해 깊이 생각하려는 시도 자체가 정치적 행위로 환원될 때, 사유의 공간은 닫힌다.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생각의 시작점에서부터 진영이 결정되는 세계. 그런 세계에서 정직한 탐구는 설 자리를 잃는다.




돌이켜보면, 이 풍경에는 두 개의 큰 물줄기가 합류하고 있는 것 같다.

하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대중적 수용이다. 본래 그것은 거대서사의 폭력성을 경고하는 비판적 기획이었다. 리오타르가 거대서사에 대한 불신을 선언했을 때, 그것은 특정 진리 체계가 다른 목소리를 짓밟는 구조를 고발한 것이지, 진리의 추구 자체를 폐기하라는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날카로운 칼날이 일상의 감수성으로 스며드는 과정에서 기묘한 미끄러짐이 일어났다. "모든 거대서사를 의심하라"가 "어떤 보편적 주장도 폭력이다"로, 다시 "나의 주관적 경험만이 유일하게 정당하다"로 변형되었다. 비판의 정신은 사라지고, 비판의 결론만 값싸게 소비되고 있다.


다른 하나는 개인의 자유에 대한 극화(極化). 자유는 이 시대의 유일신이 되었다. 다른 모든 절대적 가치는 해체되어야 마땅하지만, '나의 자유'만은 해체의 목록에서 면제되어 있다. 이것은 자기모순이다. 보편적 가치를 부정하면서 동시에 개인의 자율성을 불가침의 절대 원리로 옹립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 모순을 지적하는 것조차 어떤 자유의 침해로 읽히는 시대에, 누가 감히 이 모순을 이야기하겠는가.




이 두 흐름이 합류한 자리에서 성인의 제언은 격하된다. 수천 년 동안 축적된 실천적 지혜가, 타자가 나에게 가하는 규범적 요구라는 형식을 취하는 순간, 부당한 간섭으로 분류된다. 공자의 인(仁)이든, 아리스토텔레스의 프로네시스든, 칸트의 정언명령이든내가 자발적으로 선택하지 않은 것이라면 그것은 억압이다. 이렇게 선조들의 목소리는 하나둘 침묵한다.

그 결과 '권위'라는 단어도 죽어간다.




한국어에서 '권위적'이라는 말이 예외 없이 부정적 맥락에서 쓰인다는 사실을 한번 생각해보자. 권위적 태도, 권위적 조직, 권위적 아버지. 모두 비판의 대상이다. 그런데 '권위'와 '권위적'은 본래 구별되어야 할 것이었다. 전자는 정당한 앎과 인격에서 비롯되는 자연스러운 인정이고, 후자는 그 실질 없이 지위의 힘만으로 복종을 요구하는 왜곡이다. 이 구별이 소멸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하나의 사상사적 사건이다.




가다머는 이 구별의 복원을 시도했다. 그에게 권위의 승인이란 이성의 포기가 아니라 이성의 성숙한 작동이었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다는 것을 합리적으로 인정하는 일. 의사의 진단에 따르는 일, 스승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는 일, 오래된 전통의 지혜를 경청하는 일 — 이것들은 굴복이 아니라 겸허이자, 자기 인식 능력의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는 용기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에서 이 말은 얼마나 낯설게 들리는가. 모든 권위는 권력이고, 모든 권력은 의심의 대상이며, 따라서 모든 권위는 해체의 대상이라는 등식이 거의 무의식의 층위까지 내려와 있다. 권위를 권력과 구별하자는 제안 자체가 이미 "권위를 옹호하는 것"으로, 곧 "권력의 편에 서는 것"으로 읽힌다.




이 역설의 씁쓸한 귀결은, 권위가 사라진 자리에 순수한 자유가 도래한 것이 아니라 가장 노골적인 형태의 권력만이 남았다는 데 있다. 정당한 앎에 기반한 권위가 물러나면, 남는 것은 설득이 아니라 동원이고, 논증이 아니라 여론이며, 진리의 힘이 아니라 숫자의 힘이다. 권위를 극복했다고 자축하는 사회가 실은 가장 적나라한 권력 앞에 무방비로 서 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가치중립적 표현을 지키려는 사람은 양쪽 모두에게 의심받는다. 정밀한 언어로 현상을 기술하려는 태도가 "어느 편이냐"는 질문 앞에서 무력해진다. 중립은 비겁으로 읽히고, 신중은 방관으로 읽히며, 복잡성의 인정은 결단의 결여로 읽힌다. 가치중립적이라는 것이 곧 가치가 없다는 것으로 등치되는 세계.




그래서 나는 묻는다 — 성인의 제언을 간섭으로 물리친 자리에, 전통의 지혜를 억압으로 추방한 자리에, 권위를 권력과 함께 매장한 자리에, 과연 무엇이 남았는가.


남은 것은 각자의 즉각적 선호뿐인데, 그 선호 자체가 과연 자유로운 것인가. 혹시 그것은 한병철이 '심리정치'에서 언급한 자기착취적 성과 주체가 '자유'라고 착각하고 있는 경우가 아닌가.


빼앗긴 것은 단어만이 아니다. 단어와 함께 사유의 공간이, 겸허의 미덕이, 귀 기울임의 자세가 사라지고 있다. 모든 것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는 오만이 겸손의 자리를 차지하고, 모든 조언을 간섭으로 물리칠 수 있다는 자유가 배움의 자리를 비워버린다.




그럼에도 나는 정확한 언어를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오염된 단어를 본래의 뜻으로 되돌려 쓰는 일, 진영의 코드로 굳어진 개념을 다시 열어 사유하는 일 — 그것이 아무리 무력해 보일지라도, 그것이야말로 이 빼앗긴 말들의 계절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조용하고 단단한 저항이라고 믿는다.


사라진 것들은 있다. 그러나 사라진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 한, 그것은 아직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다.




2026.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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