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쏘시개 연작 - 21번
무언가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발화자의 머릿속에 어떠한 관념이 존재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론 ‘온전한’ 발화를 하기엔 부족한데 이는 생각을 표현할 때 요구되는 단어의 보유량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힘은 그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전(事典)의 두께에 달려있다는 말이 있듯, 말하는 이의 ‘속뜻’은 그가 지닌 배경 지식의 양으로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
“말할 수 있지만 말할 순 없습니다.”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긍정과 부정의 단어가 한 문장에 공존한, 이른바 모순적 표현을 살펴보도록 하자. ‘말할 수 있다’와 ‘말할 수 없다’ 는 ‘~을 할 수 있다’라는 표현을 썼다는 점에서 가능태·개연성을 내포하고 있다. 또한 ‘있다/없다’의 이항대립을 통해 발화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틀이 여느 이들과 다를 바 없는 것 또한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문장은 ‘잘못된’ 문장이라고 평해야 할까. 단언하긴 어렵다. 일견 모순처럼 보이는 문장도 ‘자비로운 해석’과 ‘헤겔의 변증법적 사고’를 통해 온전한 것으로 재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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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로운 해석’이란 논리적으로나 내용상으로나 그 자체로선 적절한 해석을 하기 어렵다 할지라도 발화자의 의도나 맥락 등을 종합적·전체적으로 고려해 최대한 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사고(思考)하는 것을 뜻한다. 앞서 언급한 ‘모순’문장에 적용하면, 발화자는 어떠한 주제나 목적을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지만 어떠한 연유에서 그러한 행위를 할 수 없음을 설명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관점을 택한다면 사전의 두께가 얇은 발화자의 표현을 보충(補充)할 수 있다는 점에서 건설적이나 형식을 외면해 자의적인 해석만을 할 수 있다는 우려에 답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
‘헤겔의 변증법적 사고’란 정반합(正反合)의 논리로서 특정 대상과 그것과 부딪히는 다른 대상과의 교착·조율을 통해 새로운 결과로 나아가는 일련의 과정을 뜻한다. 이때 한 문장에서 발생하는 모순, 즉 단어 간의 교착을 해소하고자 설명을 첨언(添言)하여 내재적 한계를 소멸시킬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위의 인용문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앞서 제시한 ‘말’은 물리적·형식적 차원에서의 단어로서 ‘발화행위’를 지칭한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이어 나온 ‘말’은 비물리적·실질적 차원으로 보아 ‘단어의 실질 의미’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동음이의어를 사용한 것에 불과한 만큼 그 둘이 지칭하는 대상 역시 다르니 이 둘을 같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 관점을 취하면 애초부터 모순이 성립할 여지는 없다. 하지만 이것 역시 한계가 있는데, 결국 인위적(作爲的)인 ‘첨언과정(添言過程)’을 거쳐 해석했다는 점에서 ‘자비로운 해석’의 보충성과 다를 바 없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는 점, 모순을 해결할 방법으로 제시한 것이 고작 ‘소뿔 사이로 지나가기’에 불과하다는 지적을 받아야 한다는 점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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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두 관점을 모두 폐기처분을 해야만 하는 걸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우리는 이것을 기용해야만 한다. 그 이유는 사안이 시급하다는 것에 있다. 현재 앞서 제시한 두 관점 이외의 마땅한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단지 ‘모순’이니 문장 자체에 오류가 있음을 지적한 채, 문장을 교체하라고 명하는 것 역시 경제성 원리에 반한다.
그리고 해당 표현을 사용한 이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고, 엄격한 형식의 잣대로 재단하기에 바쁘다면 오늘날 문학을 풍요롭게 해준 제2의 ‘시적 허용’이나 ‘작가적 장치’를 배척하는 셈이 될 것이므로 사회가 향유할 미래의 이익을 침해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뿐만 아니다. 이러한 행위는 곧 헌법상 보장받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는 위험 역시 좌시하긴 어렵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문장이 나오게 된 연유나 목적, 시간적 비용과 두 관점을 차용(借用)했을 때 발생 가능한 부차적인 비용을 비교함으로써 전자가 더 크다면, 그것을 반영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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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이 두렵기에 “말을 할 수 없다”라고 하는 걸까. 하나는 공포의 감정이 뇌를 지배한 나머지 정상적인 이성적 판단이 어려워져서 그렇다고 본다. 여러 가지 잡념이 머리를 맘껏 유린(蹂躪)하고 다닐 때마다 속의 회로는 점점 스트레스로 엉키고 설켜가고 있다. 차라리 노트북처럼 거기에 연결된 충전단자를 뽑거나 그것의 전원을 끔으로써 차분하면서도 조용한 세계를 간접적이나마 꿈꿀 수만 있어도, 줄을 풀어야 하는 잡무(雜務)에서 자유로울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전두엽은 그럴 수 없다. ‘하지마’라는 금지신호 (禁地信號)를 육성으로 내뱉는다 한들 잘 움직이는 심장의 펌프질을 막을 순 없으며, 척수를 통해 올라오는 각 신체 기관의 신호체계를 불능화(不能化)하게 만드는 것도 가능하지 않다. 우리는 그것을 ‘경험’하여 데이터화(Data化)한 후 기억의 공간에 차곡차곡 쌓아놓는다. 치매와 같은 거친 방화(放火)행위만 없는 한, 우리는 평생 그 창고를 제집처럼 지나 들어야만 할 것이다.
누군가 인공지능 AI가 인간과 다른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당당히 별도의 ‘끔찍하고 해로운’ 과정을 겪을 필요도 없이 특정 기억의 영구적 소멸이 어렵지 않음에 있다고 말할 것이다.
두 번째는 물리적으로 할 수 없음을 확인한 점이 두려운 것이다. 생각이 많으면 많을수록, 고려해야 할 요소도 그만큼 생기는 건 물론이요, 몇몇 주제는 창발(昌發)적 속성마저 띈 나머지 기존의 문제보다 저절로 심화(心火, 深化)되는 경향이 있다. 반영해야 할 요소가 많으면 많을수록, 자연스레 인간의 인지능력이 과부하로 인해 잘못된 판단을 하는 정도 역시 비례하여 많아진다. 물론 기본적인 뇌의 성능이 남들보다 월등히 우월하다면, 처리 과정을 단축(短縮)시켜 물리적 불가능의 한계를 빠르게 헤어나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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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불행히도 나는 그렇지 않다. 뇌를 이루는 부품과 그것을 이어주는 연결장치가 안 좋은 나머지 메커니즘을 유용하게 이용하는 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즉, 일률(一率)이 상대적으로 열위(劣位)에 있다는 뜻이다.
나의 머리는 쉽게 말하면 노쇠(老衰)하고 부식된 상태에 놓인 구형 컴퓨터다. 단순한 푸념이나 자기혐오, 낮은 자존감에서 발현돼 객관성 없다고 치부해선 곤란하다. 녹슨 고철은 사용하면 할수록, 별도의 조치가 없는 한 더욱 그 상태가 악화돼 결국 그 목적 수행마저 불가능해지는 상태에 놓이게 된다. 물론 빠르게 가용(可用)하면 종착점에 도달하는 시간은 더욱 앞당겨질 것이다. 하지만 베이스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선 오히려 독이 된다. 물을 채우는 속도를 아무리 빠르게 늘린다 한들, 빠져나오는 물의 양도 그만큼 늘어난다면, 그러한 수고와 노력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현명한 자라면 구멍 난 독의 국소부위를 흙으로 덮거나, 금 가지 않은 새 독을 가져올 것이다. 문제는 ‘무능한데 성실하기까지 한’ 나의 뇌는 그것의 해결책으로 물 붓기에만 전념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한계점을 향해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는 수준이다.
마치 경기침체의 결과가 더욱 심화(深化)된 침체(沈滯)인 것처럼, 앞으로의 나 역시 ‘말할 수 없는 그 무언가’로 인하여 스트레스를 방지하기 위한 윤활유도 채 넣지 못한 채 결국은 폐차(廢車)되어 소멸의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속 시원하게 말할 수 없는 고민이 있는 자는 알고 있을까. 그 말할 수 없는 비밀이 빚어낼 자진(自盡)이라는 이름의 참극(慘劇), 비통한 아리아의 목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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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할 땐 방 밖에 나가 하늘을 바라보거라.
머리가 아플 땐 쉬는 것도 나쁘지 않다.
먼 미래만 바라보는 건 어리석은 것이니, 당장 눈앞에 있는 문제부터 하나씩 차근차근 이겨나가라.
남들은 안믿어도 너는 너 자신을 믿어라.
어려움은 역경을 만들고, 고통은 인간을 성장시킨다.
우리가 심연을 바라볼 때, 심연 역시 우리를 바라본다.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인생을 살아라. 꿈을 간직해라.
2020. 4.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