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쏘시개 연작 - 24번
A: “너는 다수가 옳다고 생각해?”
그림자가 말을 건다. 평소와 다름없는 환각이다. 이젠 자주 봐서 이름도 지어졌다. 내가‘필라소퍼’라 부르는 이 녀석은 나의 반쪽짜리 이성이다. 머리가 아플 때면 간간이 등장해 도와주는 ‘착한’ 녀석이다. 아니, (너)에 가깝다고 할까나. 때론 불난 집에 네이팜을 한 트럭 붓듯, 죽여달라는 말을 돌려서 하는 건지 짜증이 날 때도 있지만,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 하지 않나. 그렇게 받아 들인지도 어느새 2년이 되었다.
나: “전혀.”
너: “그래? 왜? 이유가 듣고 싶군”
다수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수가 많음을 뜻한다. 하지만 많고 적음은 상대적인 개념인 만큼 무엇과 비교하느냐에 따라 그 위상이 쉽사리 변하곤 한다. 중국의 인구와 한국의 그것을 비교하면 전자가 더 크나, 아르메니아의 그것과 비교를 하면 후자가 더 크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필라소퍼’가 원하는 답은 이것이 아닐 터, 나는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고자 한다.
나: “옳기 위해서 필요한 게 뭐라고 생각해. 너는?”
너: “이런 되묻기야? 질문은 내가 먼저 했는데 말이지. 참 너도 참 짖궂단 말이지.”
나도 안다. 내가 짖궂은거 말이다. 이런 역질문은 대화하는 상대방이 누구냐에 따라 그 효과의 힘에 차이가 생기는데, 상대방이 나보다 연장자이면 ‘건방지다’는 말과 함께 대화단절이라는 반격을 당하고 결국은 넉-아웃에 이른다. 하지만 나와 같거나 오히려 연하면? ‘대화의 풍미를 곁들여주는 조미료’라도 한 숫갈 거하게 부은 듯 감칠나게 멋진 효과를 맛볼 수 있다. 상대가 나의 반쪽이라면 분명 ‘짖궂음’은 ‘착한’ 짖궂음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너: “옳기 위해서 필요한 거라면 역시 정의 아니겠어?”
나: “그럼 그 정의는 어떻게 정의하는 거야?”
너 “자식. 또 언어유희야? 정의(正意)를 정의(定義)하라니. 재밌으니 말해주도록 하지.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기준을 바로 세우는 것. 그게 바로 정의야”
나: “하지만 결국 순환논증인걸. 옳음의 필요조건으로 정의를 내세웠지만 그것 역시 옳음을 필요로 하는거니까. 다른 설명이 필요해보여.”
너: “일리 있군. 하지만 나의 반쪽짜리라 그런지 생각의 흐름이 끊기는게 느껴져. 다르게 접근해보자고. 숫자에 관한거니까 거기에 맞춰서 간단하게 내려보도록 해. 다수가 소수를 함부로 억압하지 않는 것, 만약 그러한 양상이 보인다면 제재하는 것. 이게 바로 정의야.”
흥미롭다. 아까보다 좀 더 구체화한 정의를 제시함으로써 외연을 줄이되 내포를 늘리는 전략. 맘에 들어. 비판의 소지가 될만한 요소를 적게 두겠다는 건가? 하지만 공략의 요소는 아직 있어 보인다.
나: “숫자로 과연 충분할까? 수학같이 공리(公理)가 명확한 학문 분과에서는 수치를 통한 단순비교가 용이할지 몰라도, 우리가 얘기하는 일련의 사회문제를 바라보는데 쓰기엔 부적절해 보여.”
숫자가 함의한 뜻은 모든 요소에 동등한 가중치를 준다는 것이다. 1+1이 2와 동화될 수 있는 것은 1에 담긴 의미가 덧셈, 뺄셈 등의 산술적 행위를 거친다 하더라도 그 본적 특성이 바뀌지 않음을 전제한다. 쉽게 말해 1+1=2가 통용되는 사회에선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가져, 이견의 여지없이 동의할 수 있게 하는 공동의 약속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현실의 사회문제는 이렇게 단순하지 않다. 어떤 이의 급여명세서를 구성한다고 가정하자. 우리는 그 사람의 능률을 일련의 과정을 거쳐 ‘양적 전환’을 시도한다. 평소의 근무성적은 어떤지, 태도는 어떤지, 지각은 하지 않는지, 직원들과 화합은 어떤지, 회식에 자주 참여하는지, 애사심이 충만한 지 등 한 개인의 정체성을 판단하기 위해 여러 가지 지표를 동원해서 계량화한다. 매우 그렇다는 5점, 매우 그렇지 않다는 1점, 보통은 3점을 매기는 방식은 작금의 ‘인재 등용’을 구성하는 ‘심오하고 체계적인’ 프로토콜로 자리잡혔다.
우리는 이제 직장인 ‘乙' 의 급여를 책정할 때, 4점과 5점의 미묘한 경계를 가볍게 무시해야 한다. 이것을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은 신성한 숫자의 ‘법’을 경하게 여기는 것이기에 그렇다. 그리고 어차피 다른 요소에서 깎인 점수가 그대로 마이너스로 산정될 테니 구별의 실익도 없어 보인다.
허리가 딱딱하게 굳어버려, 모습까지 바뀐 직장인 ‘己’ 씨는 얼마를 받을 수 있을까. 아쉽게도 많이 받질 못했다. 부득이하게 평가자 모두 ‘己’ 씨의 항목에 5점과 4점 사이의 고민 만큼이나 다른 구간에서도 그러한 흔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렇게 ‘己’ 씨는 13점 인생이 되었으니 얼마나 비참하겠는가. 그것도 성스러운 숫자에 의한 ‘정당하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내려졌으니 불복할 방법도 마땅히 보이지 않는다. 참고로 여기에 나온 ‘己’은 우리가 생각하는 바로 그 인물이다.
너: “우리는 지금 대한민국이라고 불리는 한 사회공동체에 살고있어. 정확히는, 민주주의를 의사결정의 수단으로 하는 곳에서 ‘국민’의 자격으로 [지금, 현재] 삶을 영위하고 있지. 민주주의가 뭐야? 1인 1표가 약속으로 지켜지는, 이른바 오늘날의 문명국에서 누릴 수 있는 정치적 자유를 실현하게 해주는 제도 아니겠어? 그렇다면 다수를 구성하는 ‘수’는 당연히 사람 그 자체의 명수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해.”
나: “일리는 있군. 일견 타당해보이는 점에선 정말 교과서다운 답변이구나. 일단 너의 답변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전제삼아 논의를 계속해보자고. 다수가 소수보다 사람 수가 더 많은건 분명해.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냥 ‘다수’ 그 자체만으로는 불충분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해.”
너: “무슨 의미지?”
나: “상대적 다수와 절대적 다수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거야. 전자가 다수대표제를 말한다면, 후자는 결선투표제를 말하는 것니까. 좀 더 부연 설명을 해줄까? 만약 105명의 유권자가 있다고 가정해보자고. 하지만 25, 23, 21, 19, 17로 다섯 세력의 지지가 나눠졌을 때 전자는 25명의 세력만으로도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어. 반면 후자는 그렇지 않아. 이들은 상위 2명인 25와 23을 먼저 임시로 뽑은 후, 그들간의 대결구도로 재편성해 시합을 겨루게 만들어. 그렇다면 한 쪽은 필연적으로 과반수를 넘을 수 밖에 없겠지. 이처럼 어떤 기준을 적용하느냐 따라 ‘같은 다수로도 다른 다수의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걸 유의해야 돼.”
너: “이런. 생각보다 복잡해 보이는걸. 괜히 시작한 주제같단 말이야.”
나: “글쎄. 생각해보면 그리 어려운 문제도 아니야. 그리고 어차피 이건 잡담일 뿐인데, 그만하고 싶으면 그만하면 되지 않을까?”
너: “그런가.”
나: "그렇지."
이윽고 너는 사라지고 결국 나홀로 남았다.
오늘도.
2020. 6.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