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쏘시개 연작, 1번, 시작, 미약한
오늘의 기억을 복기해야 한다는 건 그야말로 고역이다. 우선 감각을 한곳에 모아 머릿속에 든 경험 상자에 도달해야 하고, 더 나아가 필요한 회상만을 잘 선별해서 꺼내야 한다. 번거로움을 근거로 고물상의 낡은 크레인마냥 플라스틱, 유리, 고철 등을 무작정 섞었다간 처리 기계가 고장 나니깐 말이다. 그뿐이겠는가. 이젠 뽑아낸 원 데이터를 텍스트화해야 한다. 중구난방 쌓인 회상을 그대로 한글 프로그램에다 흩뿌려 놓는다고 비망록이 되진 않으니 말이다. 물을 마시고 싶어도 하수처리장에 도달한 오수를 마실 순 없지 않은가. 정제 과정을 거침으로써 비로소 식수가 되듯, 기억 역시 일련의 ‘엄격’한 절차를 통해 보기 좋은 이야기로 승화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왜 힘든 일을 사서 하는 걸까. 어째서 이 글쓴이는 기억이 어린아이의 옹알이처럼 현현되더라도 이를 작품으로 변화시키려고 하는 걸까.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라면 충분히 궁금해할 수 있다. 나의 답은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다수의 사람처럼 나 역시 글 읽는 걸 좋아하지 않아 했고 쓰는 건 더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두 개의 사건을 맞이한 순간, 그동안 명확하지 않던 결심의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흐릿하고 뿌옇게 더럽혀져 있던 생각의 창. 그것을 닦을 수 있게 해준 사건 속에 든 독특한 세정제의 냄새에서 시작한 것이다.
비행기가 운항할 때 한번 지나가면 다시 되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한 지점이 있다. 이를 터닝 포인트라고 부르는데, 전진만 있을 뿐 후퇴는 용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견 냉엄한 군사지휘관의 모습 같기도 하다. 상영항공의 기장인 필자가 맞이한 변곡점은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그가 겪은 정신적 문제다. 살아오면서 누적된 스트레스를 조절하던 신체 알림 신호기가 결국엔 금이 생기더니, 이제는 평범한 일상 속 이야기도 위기로 감지해버린 단계에 이르게 만들었다. 그 결과 처음엔 식은땀이 과하게 나오기 시작하더니 심장박동수마저 비정상적으로 높아지기까지 했다. 이에 수반하여 시야는 안경에 김 서린 것 마냥 흐려지더니 머리는 온갖 부정의 파토스(情念)로 점철돼 어느새 심연의 어둠, 끝을 알 수 없는 소우주로 변모되어 갔다. 이는 우울한 상태로 자연스레 이어지게 되었고 무기력감에 침잠돼 침상에서만 삼사일을 보내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동안 잡념의 수는 바이러스가 숙주를 배양기 삼아 성장하듯 그 세력을 계속 규합하고 있으니, 마침내 말로만 듣던 공황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내 뇌와 USB와 비슷한 게 있다면 둘 다 특정 기억을 데이터로 바꿔 저장한다는 점이다. 내용물의 중요도에 따라 용량의 크기 역시 달라지며 필요할 때면 언제나 접근해서 꺼내올 수도 있다. 하지만 중대한 차이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저장 공간 초과 시 이에 대응하는 방법이다. USB는 공간 부족을 이유로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는 걸 막는다. 최소한의 알림 메시지만 제공함으로써 구체적인 판단 결정 과정은 사용자에게 맡기는 것이다. 하지만 내 뇌는 다르다. 휴지통이 찼다고 버리지 말라는 정보를 알려주는 게 아니라 쑤셔 박은 대형 쓰레기의 크기만큼이나 원래 들어있던 쓰레기가 터져서 흘러나오게끔 만든다. 가히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형국인 것이다.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방법’이나 ‘미래지향적 삶을 사는 길’과 같은 ‘선한’ 쓰레기가 자기혐오와 인간불신으로 포장된 ‘악한’ 쓰레기로 덮여 씌워지는 것이다. 이에 작금의 나라는 인간을 형성하는데 일조한 ‘좋은’ 유기물에 접착성이 뛰어난 ‘나쁜’ 화합물이 달라붙게 돼 ‘현 존재 부정’이라는 극단적 형태의 유독물질이 만들어지는데 이르렀다. 만약 이를 방관하기만 한다면 자진과 공멸로 이뤄진 삼차 방정식으로 변하는 건 시간문제다.
기억을 기억하기 위한 글쓰기는 결국 나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애처로운 발버둥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검고 끈적한 액기(厄氣)를 지우는 것이 어렵다면 적어도 그것이 내 머릿속을 마음대로 흑칠하며 더럽히기 전에 따로 빼내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 전염병이 돌 때 최선책은 발원지로부터의 유입을 차단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면 차선책으로 감염자를 격리해야 한다. 다시 말해, 질적으론 같은 마이너스로 분류된다 해도 양적으론 미묘하게나마 다른 마이너스가 있는 법이다. 나에겐 ‘복원 과정’이 바로 그런 마이너스에 해당한다.
두 번째는 나의 취미변경이다. 종전의 디지털 매개에서 연유한 일련의 사이버 행위는 나의 인지 기능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는데, 단적으로 기억력 감소를 들 수 있다. 특정 정보를 발화 방식으로 정렬하고자 할 때, 필요한 내용을 적재적소에 산입하고자 할 때 요구되는 개념화 처리 수준이 이전보다 어려워진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진화와 적응을 논할 때 인용하는 드마르크의 용불용설처럼, 우리의 인지 능력은 사용하지 않을수록 퇴화하는 경향이 있다. 텍스트의 특성상 전두엽에서 발원하는 이성 처리 과정의 능률이 높을수록 이를 처리하는 속도도 더불어 빨라지며, 그 깊이 역시 일개 얕음에 머물지 않을 수 있게 된다.
화려하고도 다채로운 전자매체는 우리의 이성 기능을 위협하게 하는데, 해석에 필요한 ‘응당한 노력’을 ‘과도한 부담’으로 격하시킴으로써 감정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직접적인 노출만으로도 우리의 상상력 사전의 두께는 얇아지거늘 그 시간이 길수록 내용의 축소는 가속될 것임은 너무도 자명하지 않은가. 조지 오웰은 그의 소설 《1984》에서 가상의 나라 ‘붉은 제국’이 신어(新語)를 제작하는 과정을 설명한다. 그는 국가기관이 ‘단어의 이항대립을 골자로 하되 같은 범주나 그 의미의 차이가 미미한 단어들은 전부 삭제함’으로써, 일의적이면서 단조로운 사전을 만드는데 주력하는 과정을 상세하게 묘사한다. 결국 주인공 ‘윈스턴’을 포함해 제국 내 ‘시민’들은 심도있는 사유를 차단당함으로써 지배자인 ‘빅 브라더’에 굴복하기에 이른다.
나는 자유로운 인간이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사고의 정립이 필요하고 그 전제로써 인지 능력의 능수능란한 이용이 갖춰줘야만 할 것이다. 이러한 나의 목적의식은 다양한 텍스트 읽기, 다시 말해 독서 탐닉으로의 취미변경을 이끌었다. 나는 인문을 중점으로 사회·정치·과학·기술·예술·법학 등 한정된 영역만을 편식하지 않고 전 범위를 골고루 먹는 영양 식단을 구성함으로써 사고의 지평이 좁혀지는 걸 막고자 했다. 물론 처음도, 심지어는 지금도 그 과정이 녹록지는 않다. 하지만 불쾌한 복기 과정을 스스로 결정하게끔 도와준 촉매제로써 독서는 분명 좋은 역할을 했다고 자평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이 읽게 될 ‘글’은 필자인 내가 직접 경험하고 느낀 것을 적은 잡문(雜文)이자 불쏘시개다. 잘 쓰고 싶었지만 “쓸 수 있는 게 이 글 밖에 없는” 필자의 무능력을 부디 이해해달라. 본래 글쟁이가 아닌지라 두서없고 횡설수설한다는 말을 많이도 들어왔다. 이제부터 이어질 내용은 흥미진진한 대하소설과는 다르고 공감이 가고 감미로운 에세이와도 다르다. 아니 다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더 이상의 푸념은 보기 흉할 수 있으니 이제 초보운전 딱지를 붙이고 낯선 도로로 나가도록 하겠다, 이 여정의 끝에서 당신과 내가 보게 될 해질녘이 낯익은 풍경으로 인식되길 기원하고 고대한다.
2020. 2. 19. 최초의 모니터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