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홀, 그리고 영탄] 제4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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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놓인 쪽지, 정확히는 A5사이즈 정도 크기의 녹슨 종이, 구겨진 채로 누군가에게 읽혀지길 바란 것이었을까. 나와 눈이 마주치고 손으로 줍자, 비로소 쪽지는 안내문이 되었다. 무슨 내용일까.
잠이 들 때면 언제나 새로운 장소에서 깨어나게 된다. 하루는 넓은 운동장, 다른 하루는 좁은 숲길. 그리고오늘처럼 대학병원과 백화점, 그리고 잡다한 상가와 아파트가 합쳐진 기괴한 건물까지도.기괴라는 단어를 대신할 만한 건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아무리 좋게 봐도 독창에 불과하며 더 나아간다 해도 특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 메모는 꿈에 대한 발자취다. 나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 선에서 금일 경험한 내용을 최대한 왜곡 없이 기록하기 위해 작성했음을 알린다.
"난 또 대단한 건 줄 알았네. 그냥 흔해 빠진, [무제]에서의 기억인가."
"LAME. It’s just a common, run-of-the-mill memory from [Mu-J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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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은 고급 호텔 로비의 외연을 갖추고 있었다. 의외로 호화롭진 않아 보인 샹들리에가 로비의 중앙에 매달려있었고 그 밑으로 많은 이들이 오고 갔다. 천장이 내리쬐는 그림자의 손끝이 닿은 곳. 교태를 부리는 빛이 어둠과 속삭이는 그곳에서 육중한 철의 존재가 자신을 과시한다.
엘리베이터는 총 2개다. 그 버튼들의 매무새는 온갖 이들의 지문으로 점철돼있어 그런지 흩날리는 콘크리트 가루마냥 뿌옇게 보였다. 그는 홀로 그곳에 서 있다. 1층을 기다리는 사이 한 노신사가 왼쪽 엘리베이터에서 반짝이는 가방을 손에 든 채 나타났다. 사탕가게 앞 꼬맹이마냥 그는 오른쪽에 서서 그것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노트 케이스인가? 아니야. 브라운 브리프 케이스같아.”
"Is that a note case? No. It looks like a brown briefcase."
노신사는 이내 인기척을 느꼈는지 곧바로 그에게 눈길을 던졌다. 게슴츠레한 얼굴을 한 채 노신사와 마주친 그는 그저 머쓱하게 웃으며 고개를 갸우뚱하듯 목을 돌렸다. 스트레칭을 하고 있다는 걸 어필이라도 하려던 건지 자그마한 목소리로 헛둘헛둘 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귀여운 몸부림을 마치고 그는 다시 B1을 가리키고 있는 엘리베이터로 시선을 옮긴다.
문득 로비에서 본 건물 구조도가 떠올렸는지 노신사보고 들으라는 듯 말한다.
“4층은 대학병원의 실습실과 병동이었지 아마”
"The fourth floor was the university hospital's practice labs and wards, I believe."
그가 병원을 떠올린 건 어쩌면 당연했다. 샹들리에와 가장 안 어울리는 걸 하나 꼽으라면 누구나 샹들리에를 떠올릴 것이기 때문이다. 띵 소리와 함께 계기판의 숫자가 1을 드러냈다. 상투적인 황금빛 외관의 화려한 이동수단이 그 자태를 뽐냈으나, 태생이 원체 투박하고 천한 그인지라 감상도 사치에 불과했다. 무안해졌는지 엘리베이터는 서둘러 문을 닫더니 일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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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으면서 넓은 그 공간에서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시간이 상대적이라는 어떤 과학자의 궤변과는 별개로, 고층건물이 아니었는지라 제아무리 느린들 몇 분 이내면 무난하게 도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노신사의 눈총을 마저 회상하기도 전에 열린 문은 그를 밖으로 끄집어내는데 바빴다. 민망하게 뒤통수만 긁적이며 주변을 살피더니, 그는 안경에 낀 서리를 닦고 차분히 앞을 본다. 투박하게 대충 휘갈겨 쓴 듯한 거대한 이정표의 화살촉이 그의 눈을 매혹했다.
◀실습 병동 환자 병동▶
무언가의 인기척. 왼쪽 가슴을 스치듯 지나간 한산한 기운을 감지한 그는 본능적으로 왼편에 무게를 실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LED 전구가 천장에 매달린 채 애처로운 눈빛으로 광자를 내보내고 있었다. 단순한 바람에 과민반응을 보였나 생각하고 몸을 돌리려던 순간, 사각지대 속 벽면이 등장했다. 하얀색 페인트를 진창 묻힌 경계선에서 익숙한 기름 냄새가 올라왔다. 향기의 근원을 탐방하던 그의 눈에 띄었던 것은 박교수의 프로필이었다.
유명 치과대학을 졸업한 그의 모습에서 그는 기시감을 느낀다. 거창하게 표지된 이력과 달리 그의 기억력 스펙은 딸려도 너무 딸렸다. 자책감이 고통의 신호로 전환되더니 어느새 팔목에서부터 올라온 소름으로, 그의 정체 모를 이질감과 거부감은 짙어져만 갔다.
아닐 거라는 생각만 되새기며 고개를 마저 털고 턱을 어루만졌다. 거친 수염을 어루만지며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숨을 마신다. 뱉는다. 다시 마신다. 정신을 차리고 복도를 마저 걷기 시작했다.
저기 어두운 복도 끝에 섬광이 나타났다. 어둠을 몰아내 줄 용사님을 영접하려 그는 양발에 힘을 싣기 시작했다. 뒤꿈치에 둔 어둠을 몰아내며 앞으로 더 가다 보니 의사로 보이는 이들이 나타났다. 흰 가운에 청진기, 때가 잔뜩 낀 이름표, 안구보다도 훨씬 큰 안경을 낀 그들의 모습에서 쉽사리 직업군을 추론할 수 있었다.
그를 보질 못한 건지, 봤는데 무시한 건지 그들은 치근덕거리며 그의 옆을 서둘러 지나간다. 바람만 남긴 그때, 익숙한 냄새가 에어로졸의 형태로 그의 후각을 자극했다. 코를 유혹할 만큼이나 고혹하고 찬미로웠던 만큼 발걸음은 총총걸음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도착한 곳은 그가 상상한 것과는 다른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래. 그건 분명 '조금'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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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랄까. 고기가 쇠고리에 걸린 푸줏간이랄까. 해리포터 시리즈에나 나올듯한 소금기를 머금은 검은 벽돌벽, 기름진 손에 덕지덕지 묻은 녹슨 창살, 족히 3세대는 거쳤을 듯한 유서깊은 거미 가족과 그들의 16각형 보금자리까지. 온갖 ‘더러운’ 것에 둘러 가까이 가기 싫다는 인상을 주던 그곳은 단언컨대 의과학을 수련하는 장소치곤 안 어울리게 비위생적이었다. 그들이 실습하는 모습에선 흡사 바비큐를 만드는 듯한 이미지마저 오버랩되기에 이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마루타들이 통나무처럼 누운 채 그들의 ‘실습’에 임한 것이다. 오염된 하얀 옷을 입은 그들의 손은 분주해지고, 이들의 위에선 또 다른 무리의 작업이 시작됐다. 그들이 행하는 동작 하나하나를 다 표시하면서 ‘실습자’들을 감시하는 것이다. 그는 그 장면을 마지막으로 하고 다시 갈림길로 돌아갔다. 먼 발꿈치에서도 인기척을 느껴서였을까.
아니면 본능적으로 다가오는 죽음의 소리를 들어서 그런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단지 누운 그들을 위해 소리를 지를 기력조차 없는 걸 그럴 의무가 없다고 자위나 한 그 자신의 나약함을 이기지 못해서였던 걸까.
오른쪽은 현실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대학 병동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여성 병동’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어 남성의 모습은 의사 말곤 좀처럼 보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전문 병원이었던 걸까. 그는 자신의 두뇌가 어째서 이런 장면을 출력한 건진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오고 갔으나 생기와는 거리가 먼, 현장감과는 궤를 달리한 공간 속에서 그는 멀찍이 사색하기에 바빴다.
이유의 근원을 제아무리 찾으려 한들, 유익한 결과를 뽑아낼 수 없음을 안 그는 ‘별로 문제 될 만한 건 없으니’ 엘레베이터로 돌아가야겠다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걸으면서도 뭔가 두고 온 듯, 무거운 하반신을 힘겹게 한 발자국씩 떼고 있다. 머리 한구석에 박힌 이성이 그에게 말했다.
“오른편의 여정은 먼 훗날의 어느 회상 과정에서 드러날 거야”
"The journey to the right will be revealed in a future moment of reminisc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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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닫힌다. 계기판의 빨간 숫자가 5를 나타내더니 이윽고 문이 열렸다, 나가자마자 보였던 것은 빼곡하게 모인 여러 상가의 모습과 적지 않은 손님들이었다. 분식집, 의류가게, 수선집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외에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특이한 것은 다름 아닌 5층의 구조 그 자체였다.
조감도를 보니 상가 말고도 아파트도 이곳에 혼재해있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상가의 내부를 지나야만 갈 수 있게 설계돼있었다. 일상에서 보기 힘든, 어쩌면 세기말이나 되어야 볼 수 있는 배치였던 점에서 5층은 이 건물의 총체적인 모순을 섬뜩하게 보여줬다.
연결된 상가는 각 점포가 분절되지 않은 채 하나로 이어져 있어, 흡사 살아있는 구렁이처럼 보일 만큼 잔인하고도 역겹게 연결돼있었다. 아가리에 해당하는 분식집을 지나면 위장(胃腸)인 수선집이 나오고 더 지나면 내장인 약국이 나오는, 이 기묘한 구조를 당최 누가 설계했는지 알 수 없었다. 두려움, 당황, 슬픔, 분노등 여러 감정이 얽히고설켰음에도 이상하리만큼 그는 이를 차분하게 받아들였다.
출입구인 분식집 정문은 왜 그리도 좁았는지 지나가는데 애로사항이 꽃피울 지경이었다. 걸리버 여행기의 주인공이 소인국에 갔을 때 느꼈을 심정을 사뭇 느낄 수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꿈속의 나는 걸리버만큼이나 크진 않았다는 것과 수많은 인파를 지나칠 때마다 마주했던 따가운 눈총 정도랄까.
탁자들은 빼곡하게도 붙어있어 인산인해를 방불케 했다. 재래시장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 낯선 곳에서 익숙한 밀가루, 튀김의 냄새가 그의 코를 희롱했다. 떡볶이의 빨간 국물은 너저분하게 천장까지 닿아있었고 어묵탕의 시원한 맛은 코를 시큼하게 만드는 데 충분했다. 웅성거리는 인파 속에서 욕지거리가 새어 나오는 걸 알게 됐을 때, 나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잡히면 곤란한 상황이 나올 것 같아서 말이다. 부엌과 맞닿은 데 앉은 손님의 등을 세차게 밀침과 동시에 출구가 열렸다.
등에서 내리쬐던 타액을 오른손으로 닦아내고 정신을 가다듬는다. 천장은 아까보다 훨씬 높아졌고 사람도 없어졌다. 끝을 모르게 뻗어있는 빈 공간을 마주 보며 한숨을 마저 내뱉었다.
바로 앞에 놓인 공간은 공기부터 달랐다. 청초의 화신(化身)에 인도받은 그는 90도로 꺾여져 있는 길목 위에 놓인 검은색 커튼을 봤다. 삼각형으로 설치돼있어 마치 환상 속 경계의 표지처럼 보인 그것은 마치 자신을 기준으로 그 너머 공간은 분식집의 침입을 금지하는 듯 보였다.
그 구간이 유독 더러웠던 이유가 합리의 영역에 첫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실내의 모습도 투명하게 볼 수 있어 당혹함은 미리 없애고 들어갈 수 있었기에, 안도의 한숨을 새로이 뱉었다. 노부부가 서로의 일을 하며 말없이 바닥만 본다.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특정하기 어려운 몽타주를 띤 이들에게선 낯익음과 낯섦의 변증법은 통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자신도 요량도 없었다.
뜨거운 열기만 뿜어내는 구형 다리미의 손잡이만큼이나 많은 세월을 살아온 그들과 공유할 애틋한 경험도 없었고 사정도 없었다. 드라이클리닝으로 전시된 검은 양복이 군계일학(群鷄一鶴)을 연상케 했다. 세탁소와 수선집은 분명 다르지 않냐는 생각을 가지며 천천히 출구로 걸어간다. 서운한 것이었던 걸까.
나는 어떤 연유에서인지 속도를 높일 수가 없었다. 디오게네스의 좌우명인 침묵이 하나의 관습으로 작용한 건지도 모르겠다. 출구의 버튼을 눌렀을 때 비로소 제한 속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사고가 정리되기도 전에 ‘새로운 시작’이 시작했다. 약국은 수선집과 성관계라도 맺듯, 분식집의 매무새와는 달리 곧바로 연결상태를 취했다. 수선집보단 사람이 많았으나 확실히 병자들의 쉼터라 그런지 정갈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지팡이를 진 채 창문 밖을 쳐다보는 노파는 지긋이 회색 감상에 잠겨있었고 엄마 손에 붙들린 채 엄지를 입에 넣기에 바빴던 소년은 나와 눈이 마주쳤는지 곧바로 고개를 돌린다.
천장에서 내려온 하얀 백열등은 약사의 안경을 강렬히 비추는데 충분했고 약통의 백색을 더욱 하얗게 만들어주었다. 조제실 뒤편에선 기계가 ‘웅웅’거리더니 서서히 소리가 작아졌다. 엄청나 분량의 약 봉투를 들고나온 약사는 매우 작은 목소리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너무 작아서 환자 뒤에 있던 나조차도 들을 수 없었다. 서서히 마저 걸으며 출구로 향한다. 오른편에 놓은 정수기에 물을 담아 목을 축였다. 시원하다는 느낌보단 답답한 인상만이 자욱이 짙어졌다.
문이 열린다.
The Door Shall Op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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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의 외형을 띤 허름한 주택이 녹슨 에펠탑마냥 그저 그곳에 놓여 있었다. 어떤 목적을 띄고 그곳에 세워진 게 아니다. 한 귀퉁이에 놓은 회백색의 벽과 많은 상자의 겉에는 먼지가 수북했고, 너무나 쌓여서 투명한 거미줄도 보일 정도였다. 쉽사리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지 않는 습성을 지닌 그 생물 조차 혀를 내두르게 하는 방치 상태였다. 상가에서 느낄 수 있던 사람 냄새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옛날 흑백 사진을 본 적 있다면, 배경만 나온 이미지를 연상해보면 알 수 있다. 색깔을 박탈당한 자연의 모습은 더 이상 자연(自然)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연(紫煙)에 가까웠으면 모를까. 건물에 쌓인 온갖 먼지와 회색빛의 힘없는 콘크리트에서 왠지 모를 안정감, 반가움, 향수의 감정이 느껴졌다.
친숙함으로 뭉친 낱말의 의리는 나를 더욱 외롭게 만들기 충분했다.
The loyalty of those words, all bound up in familiarity, was enough to make me feel even more isolated.
감상이 끝나갈 때쯤 시야각에 들어온 5개의 문이 인사를 건넨다. 다섯 가구가 있었나. 나는 제일 구석진 곳으로 육신을 옮겼다. 한 걸음씩 뗄 때마다 신발 밑창에 묻은 먼지가 코로 들어오는 걸 느꼈다. 코가 막히는 기분이 물씬 풍기더니 이러다 질식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호흡수는 빨라지고 식은땀의 방출량도 현저히 증가했을 때 비로소 문을 두드린다. 인기척 없는 안.
문은 이방인을 안으로 들여보낼 생각이 없다고 몸소 표현하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내려 손잡이를 바라본다. 검은색으로 코팅된 손잡이는 만지기만 해도 찝찝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을 만큼 역겨운 손때들이 누적돼있었다. 그러나 개의치 않듯 손잡이에 엄지와 검지를 걸어 왼쪽으로 살짝 돌리더니 잠금장치가 풀려있는 걸 그는 알게 되었다.
면역기반이 허물어진 성문은 너무도 허무하게 외부 바이러스를 허락하고 말았다.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서서히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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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형 벽걸이 TV, 2인용 퀸사이즈 매트리스. 그리고 그곳에 누운 한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낯익다. 그에게 있어 여성의 존재는 크게 세 가지다. 일반여성, 누나들 그리고 엄마였다. 생각해 보건대 그곳에서 그가 마주한 인물은 분명 모친이었다. 무엇에 근거를 둔 것일까. 머릿속은 아니다. 앞서 본 배경으론 그러한 추리는 불가능하다. 제아무리 뛰어난 논리 철학을 가져온다 한들 셜록 홈스가 아닌 이상 될 리가 만무하다. 몸이 본능적으로 직감을 가동해 중간 단계를 생략했다면 모를까.
그는 모친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누웠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그는 그녀가 생모임을 다시 한번 확신했다. 복잡하고 미묘한 심정은 물감처럼 섞이더니 기어코 새로운 색을 만들어 버렸다. 스케치북에서나 볼 듯한 흐릿한 데생 상태로 놓인 그녀는 짙은 연필심처럼 뻔뻔하게 굳어 있었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전신을 덮은 보료로 향했으나 그마저도 뚜렷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의 두뇌는 현상해낼 기력이 부족했거나 실은 그녀의 실체가 무면귀(無面鬼)처럼 투명한 모습이어서 그의 언어력으론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사료된다.
그는 식은땀을 마저 흘렸다. 온열 침대의 여파인지 아니면 신체적 변화에 기인한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자고 일어났을 때 그는 자신의 등에서 느껴지던 찝찝한 액기(厄氣)를 도저히 지울 수 없었다. 만약에 그 여성이 엄마였다면 어째서 그는 다른 가족들을 볼 수 없었던 걸까. 알 수 없다. 아니 그로서는 차라리 알 수 없어야만 할 것이다. 지친 몸을 이끌고 가는 길은 험난했고 그마저도 음울의 향연을 연출한 낙루한 공간뿐이었다. 그는 표정의 미동도 없이 계속 바라본다.
폴리스 라인이 처진 사건 현장에서나 볼 수 있는, 이른바 진지한 그의 눈에서 불쾌감과 쾌감이 몸을 맞대는 순간이 나타났다. 입가에 띈 옅은 미소는 그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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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것 아닌 줄 알았던 내용은 의미심장의 범주를 힘껏 넘어섰다. 과연 그는 무엇을 본 것일까? 아니, 무엇을 봤다고 주장하는 걸까? 회백색의 공간에서 그가 마주한 인물이 여성이고, 모친이었다는 건 그의 죄책감에 기인한 것인지, 단순한 망상의 현현에 불과한 건지 지금으로선 불확실하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검은색과 흰색이 섞이면 나타나는 회색은, 이른바 그의 정체성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가 걸어온 일련의 여정은 어느 한 곳에 섞이기를 거부하는, 어쩌면 거부당하는 그의 의식이 만들어 낸 시공간에서의 흔적이라 사료된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듯, 그의 의식은 꿈이라는 수단을 통해 그만의 공간을 창출했다. 디즈니월드에서나 볼 듯한 ‘아름답고도 수려한 장관’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는 그곳에서 미약하게나마 행복감에 젖는다. 방에 갇혀 그 자신을 구속한 채, 현실에서도 못 이룰 ‘사생활’을 환상 속에서나마 구현하려는 모습에선 애처롭기까지 하다.
사람이 인간이라 불릴 수 있게 된 건 그 본래 성격인 사람과 사람 사이를 뜻하는 ‘사이 간(間)’에서 연유한다. 즉, 관계가 단절될 경우 인간은 자신의 본성을 잃게 된다는 뜻이다. 고독에서 시작해 외로움과 우울증으로 나타난 비극의 연환계(連環計)는 그의 정신 상태 전부를 소훼시키기 충분했다.
그의 세계 속에서 붉게 타버린 그을음은 검은색을 띤 채 탄내를 풍기며 가파른 절벽마저 물들이더니, 어느새 화폭 속의 여백에 텅 빈 물감을 채워 넣기 급급하기에 이르렀다. 벽은 타인을 막는 도구며 소통을 거부한다. 화사하게 꾸민다 한들 동독과 서독을 갈라놓은 베를린의 그것은 장벽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그는 명심해야 할 것이다.
나는 그의 글이 어디를 향하는지, 그의 발자국이 어디에서 끝날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단지 그 끝이 가족과의 불화로 이어지는 건 아니길 바랄 뿐이다. 나는 그가 건강했으면 좋겠다. 왠지 모르겠지만, 뭐랄까. 그의 생존이 곧 나의 생존과 직결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어서였던 것 같다.
I cannot know now where his writing is headed or where his footsteps will finally end. I only hope that the conclusion does not involve a family discord. I want him to be well. I don't know why, but I have a gut feeling that his survival is directly tied to my 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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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종이를 다시 구겨서 바닥에 던졌다. 구석에서 보인 눈물이 종이를 덮어가지 않도록, 누군가가 다시금 볼 수 있게. 정성스럽게 던져놓았다. 가던 길이나 마저 가야겠지. 뭐. 그래봤자 내 방이지만.(고개를 들었다. 눈은 부셨고 안경은 더욱 녹이 슬었다)(오디오로그 기록장치 끄는 소리)
REFERENCE
AI 이미지 제작 도구 : Google Gemini Bana
프롬프트 제작 및 수정 : 소는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