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서고, 1편
이성(理性). 도대체 그 녀석은 누구일까. 이에 관한 전문지식, 그것을 별‘어줍잖은’ 논거로 설파하려는 것은 방향상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이성이 궁금하면 나 따위보다 박학다식한 이를 찾아가 지식을 구하는 것이 나을테니까.
그럼에도, 한정된 시간에 별도 지면을 할애하면서까지 이성에 대해 [탐구 코스프레]하고자 함은, 시끄럽게 떠드는 나의 머릿속을 ‘조금이나마’ 정리하여, 온전한 하루를 시작하고자 하는 목적의식에 연유함에 있다. 이성에 관한 개괄적(?) 고찰은, 과거 읽었던 책의 글귀에서 기인한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자기가 인생에서 기대하는 모든 것을 자신의 행동이 아니라 마법적 조력자를 통해서 얻고 싶어 한다. 그럴수록 삶의 중심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마법적 조력자나 그의 인격화된 존재로 옮아간다. 그렇게 되면 문제는 이제 더 이상 어떻게 살 것인가가 아니라 ‘그’를 잃지 않으려면 어떻게 ‘그’를 조종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내가 원하는 일을 그에게 시킬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을 그의 책임으로 돌릴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185p
이성을 가진 자는 외롭다. 아니, ‘고독’하다고 칭하는 것이 보다 적절할까. 일상에서 어렵지 않게 만나는 표현에서의, ‘이성(理性)적 인간’은 단지 인간과 비(非)인간을 대분(大分)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에 불과하다. 일상과 사뭇다르게, 아니, 적어도 [지금, 이곳]에서 발화자인 ‘나’가 부르짖고자 하는 ‘이성’은 이를 ‘준비’한 인간과 ‘포기’한 자로 구분하려 한다. 이성을 보유하고 행사한다는 것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그자의 외로움이란 무엇일까.
나는, “쉽게 행동할 수 있고, 오랜 습관처럼 어떠한 사유결재(事由決裁)를 불요하는 일련의 행위”를, 이성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으로 이해한다. 내가 왜 이것을 하는지, 왜 이것을 해야‘만’ 하는가에 관한 객관적이고도 명시적 증거를 남길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분명 ‘자유’롭다. 생각의 최종적 결정 권한자로서 ‘나 자신’에게 판단을 유보하지 않아도 된다. 데우스 엑스 마키마와 같은, 임의의 가상적 주체를 상정하고 그에게 「결정요지와 판단이유 설시」를 「부탁」하면 되니까 말이다.
어쩌면, 나는 이성을 굉장히 불편하게 대하고 별로 마주치지 않아하는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짧은 인생을 사는 동안, 행동의 준칙으로 삼아야만 했던 이성은, 늘상 나를 힘들게 해서 그런 것일까. 당장 하고 싶은 것이 생겼을 때, 감정은 은근슬쩍 나를 떠본다. 회유도 아니다. 그렇다고 대놓고 ‘하라’고 명하는 것도 아니다. 넛지(Nudge)마냥 조금씩 조금씩, 순간적 아니면 차분하게 누적되어온 쾌(快)로의 방향으로 나를 유도한다. 이름은 상관없다. ‘일탈’로 정의해도 괜찮고 위대한 탈출(The Great Escape)로 읽어도 좋다. 중요한 건, 감정이 나를 이끈 것 또한 최종적으로는 ‘나 자신’이 결정한 것으로 ‘포장’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니까.
복잡다기화. 현대를 지칭하는 표현을 5글자로 나타내라면 이것만큼 간결한 것도 흔치 않다. 어떤 것을 결정지어야 할 때마다, 우리는 선택을 마주하고, 그에 대한 대가를 ‘스스로’ 지불해야 한다. 「누칼협」으로 표상된, 이른바 「자기책임원칙의 극화(極化)」는 이성의 ‘자유결정’의 과정을 모순적이게도 비자유의 영역에 놓이게 만든다. 다시 말해, 온전한 권리행사로서의 주체인 이성에게, 기존보다 많은 판단논거의 프로세스를 강제시켜 ‘의도’라는 이름의 종착지에 도달하는 시간에 과부하를 주는 것이다. 종래의 사고과정은 그렇게 ‘복잡다기화’ 된다.
복잡한 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가끔은 甲, 乙, 丙처럼 단순반복으로의 회귀를 희망하고자 욕구한다. 텅 빈 하얀 바탕화면 속 1픽셀로의 백화(白化)만으로 「여타 구분의 실익」은 무용해진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시끄럽기 짝이 없는 이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책의 저자는 이러한 나를 다시 한번 꾸짖는다 (喝).
파괴성은 실현되지 않은 삶의 소산이다(……)자신의 개별적 자아를 포기하고 자동인형이 되는 사람은 주위에 있는 수백만 명의 다른 자동인형과 똑같기 때문에, 더 이상 고독과 불안을 느낄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가 치르는 대가는 비싸다. 그것은 자아의 상실이다. 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194p
외로움의 명칭을 고독으로 승화시키고 싶은 욕구 또한, 어쩌면 자아상실의 이명(異名)이 아니었을까.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본다. 허리를 피며 왼편에 놓인 시계와 동시에 눈이 마주친다.
부끄러움은 나의 몫이거늘, 이에 성급히 고개를 돌린다.
2025. 9. 25. 오전 10시 09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