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무도회

Masquerade

by 소는영



어린 시절, 동네엔 허름한 극장이 있었고 그곳엔 언제나 상주하는 ‘유랑’극단이 있었다. 그곳에는 유명한 단원이 있었는데 훤칠한 키, 건장한 체격 그리고 앳된 얼굴을 한 쾌남이었다. 만약 누군가가 그 사람의 인상착의를 묻는다면 누구도 부인하기 힘들 만큼, 동물대백과사전에나 실린 외뿔회색코뿔소의 사진을 첫 장에서 마주한 것만큼이나 강렬한 인상을 지닌 사람이었다. 근면, 성실과 같은 온갖 좋은 말의 향연이자 사전적 의미에서 동의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독특한 인물인 셈이다.

 

그는 극장 주변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홍보용 전단을 나눠주는 광대였으니, 저녁 이른 시간이면 환하게 ‘웃어’ 보이며 자랑스레 호객하는 그를 쉽게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얼굴에 하얀색 가루를 묻히고 그 위에 빨간 연지곤지를 수줍게 얹은 채 있었다. 어둑해진 거리에서 지저분하게 번진 잉크를 엄지손가락에 잔뜩 묻힌 채, 계속해서 종이를 건네고 있었다. 하지만 그를 애써 외면하는 인간 군중의 뒤틀린 성미를 비웃기라도 하듯 비뚤어진 오색찬란 고깔모자는 뻔뻔하게 고고했다.

 

어째서 그가 그런 수모를 견디면서까지 호객행위를 계속하는 건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가지지 못한 외모나 체격 같은 능력을 갖춘 그는 왜 스스로 피에로를 자처한 건지 말이다. 차라리 광대처럼 꾸미지 않는 게 극단 수입에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그의 모습은 너무나 출중했었다. 얼마나 꾸몄는지 이곳에 처음 온 사람은 그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본들 실상을 알 수 없었다. 너무 진하게 분칠해서 그런 것일까. 조금만 옅게 칠했다면 알아차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괜한 생각을 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어쩌면 이 모든 생각이 그저 망상에 지나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사실 그는 누구보다 행복한데 그걸 바라보는 내가 나의 불행함을 그에게 투영시킨 것일지 누가 알겠는가. 누군가의 마음속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는 ‘심상현미경(心想顯微鏡)’ 같은 거라도 발명했다면 모를까, 그러면 이런 괜한 고민을 하며 마음 졸일 필요도 없을 터, 하지만 그런 게 없는 지금으로선 열 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 속은 모른 채로 있어야 했다.  어째서일까. 그의 가면 속엔 당최 무엇이 있길래 이토록 나를 괴롭히는 것일까. 고뇌의 대가로 몸에선 식은땀을 재주껏 방출하기 바빴으니, 저녁이 점점 더 깊어질수록 한기가 전신을 휘젓는 정도 역시 심화했다. 코트의 깃을 좀 더 세워보니 후두부에서 시작해 내려온 거친 액기(厄氣)를 뒤로하고 고약한 향기가 코로 들어온다. 엎친 데 덮친 격 갑작스레 지나간 중형 마차의 여파로 회색빛 군중의 먼지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나는 곧바로 재빠르게 손을 코로 가져가 겸연쩍은 듯 검지를 곧추세워 가로로 비볐다. 콧속의 불청객들은 술 취한 불한당들처럼 온갖 추태를 부리기 바빴으며 개중엔 기침까지 내뱉게 한 파렴치한 자도 있었다.


내 속을 감히 메스껍게 만든 저 마차를 당장이라도 쫓아가고 싶었다. 그자에게도 왜 나한테 그랬는지 물어보고 싶었고, 그자의 가면 속에 드리운 검은 형체인 본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가로등이 하나둘씩 켜지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하늘엔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가 그려져 있었다. 젊은 광대는 오늘도 손에 든 전단을 다 못 나눴는지 침울한 웃음을 띤 채 극단 뒤의 숨겨진 문으로 들어간다. 진흙에 찍힌 발자국처럼 검은 바닥을 유독 돋보이게 한 하얀 분가루는 범죄현장의 증거가 되어 그곳에 남아있었다. 스스로 벗을 수 없던 가면도 우울의 선 앞에선 별수 없었던 모양이다. 슬픔에 연유한 눈물인가, 아니면 후회에 기인한 한숨인 걸까. 그의 마음속엔 당최 어떤 감정이 숨어있었는진 지금도 모른다. 명백한 투명을 가능하게 한 기교는 피에로의 술수에 있지 않았다. 그가 쓴 가면에 있었을 뿐이다.




가면이란 페르소나에서 파생한 표현으로서 본래 무대에서 쓰인 연출방식 중 하나였다. 개인을 뜻하는 영어 단어 ‘Person’의 기원을 좇다 보면 만나게 될 ‘Persona’ 역시 가면의 뜻과 다르지 않다. 아니 같다고 단정해도 무방하다. 우리가 인간이라는 영장류로서, 타 종과의 격차를 벌리게 해줄 수 있는 본질적 특성은 바로 이성적 능력을 향유(享有)할 수 있는 개인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인간은 이러한 이항대립의 1단계에서 짐승, 금수(禽獸)와는 다른 범주로 분류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2단계는 무엇인가. 바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구별이다. 대전에 사는 A와 세종에 사는 B를 다르다고 말하기 위해선 지리적 특성만을 근거로 제시하는 건 너무도 빈약하다. 그들이 다른 곳에 거주하는 건 우연적 요소에 불과하기에 그렇다. 그렇다면 이름·성격·나이·체력·출신지·출신 학교·성적 취향 등 피상적으로 드러난 정보의 집산(集散)을 취합(聚合)하려는 일련의 과정이면 충분한가. 역시 부정적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간에, 그와 관계없이 내재적으로 인간으로서 그들이 지닌 고유한 사상의 유별함이다. 생각(思)하고 생각(想)한다는 이중의미로서, 하나만 사용했을 때보다도 강력한 단어가 될 수 있는 이것이 바로 개성이자 가면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무언가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이른바 방향의 이데아나 이를 지칭하는 단어인 진보든, 주어진 본성을 기반으로 구심력을 발휘하고자 하는 시간의 이데아인 보수든 간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일컫듯 “인간은 정치적 동물”로서, 각자가 지닌 사상의 스펙트럼을 타인과 비교하며 성장한다. 범인의 몽타주는 얼굴에서 알 수 있고, 아내의 실루엣은 몸에서 알 수 있듯, 인간 오관(五官)의 발원 중 하나인 시각 능력은 외부적 존재를 위험과 안전의 이항대립으로 분류할 수 있게 해준다. 이 문지기가 그 대상이 위협적이지 않음을 알게 되면,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 대화를 통해 생각을 뒤섞는 과정을 거칠 수 있게 해준다. 그 결과 우리는 그 존재가 나와 같지 않음을 마침내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다른 감각도 마찬가지다. 목소리가 좋은지 그른지는 청각 능력으로 파악할 수 있고, 체취의 다름은 후각으로 가능하다. 교미할 땐 후각과 촉각, 그리고 미각의 공감각적 특성을 이용할 것이고 분노에서 기인한 욕설의 향연(饗宴)은 시각과 청각의 다면체와 같을 것이다. 이처럼 알몸으로 등장한 타자를 마주할 땐 동물의 유산이라 할 수 있는 오관이 작용하는데, 이때 그 위력은 이성의 판단 근거로도 사용될 수 있으니 매우 강하다고 평할 수 있다.



 

그러나 알몸은 누드(nude)와 다르며, 섹스와 포르노(pornography) 역시 그것이 내포한 의미에서 알몸과 같지 아니하다. 스스로 드러내고자 옷을 벗은 이에서 전해오는 아우라는 원치 않은 탈의에서 발효한 부끄러움과 궤를 달리하기 때문이다. ‘우리’라고 지칭하는, 혹은 지칭할만하다고 과신하는 요소들은 하나같이 ‘객관’의 가면을 쓴 채 소란스러운 무도장에 나타난다. 이때의 그것은 해학과 풍자를 목적으로 만든 유희적 도구로서의 ‘탈’과는 지속성에서 그 의미를 달리하는데, 탈이 일시적이면서 단속적(斷續的)이라면 가면은 영속적(永續的)이면서 연속적이다. 말초적 쾌락의 본산지인 감각 중추를 위해 탈은 그 힘을 오롯이 ‘지금 이 순간’을 노래한다. 탈은 누군가를 위해 자발적으로 목젖을 튕기기에 당당하면서 저돌적이다. 즉 천박함과 수치스러움과는 모순대립쌍을 구성한다. 일탈은 탈선과 다르게 부정의 파토스(情念)로부터 자유로운 양상을 가진다. 궤도에서 벗어난 사건(脫線)은 전차가 자신의 목적을 ‘의도치’ 않게 망각함으로써 반긍정의 관념을 가지게 되었다면, 인간의 해방구는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는 구속으로부터의 자유를 의식적으로 소망해 그것을 일탈로 구현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검게 그을린 목탄이 누드가 지닌 내생적 고혹(蠱惑)의 깊이를 더해주듯, 탈은 작금의 초긍정적(超肯定的) 사회로의 물줄기 속에서 피로감을 느끼는 우리를 족쇄로부터 잠시나마 풀어주는 ‘착한’ 도구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면은 다르다. 근대적 세계관을 겪은 인간은 그들 자신의 자유가 위협받고 있음을 절실하게 생경(生驚)했다. 영국의 공리주의자 제러미 벤담의 파놉티콘이나 조지 오웰의 《1984》 속 ‘주인공’인 빅브라더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수단으로 등장한다. 오늘날의 디지털 세계는 이것보다 더 나아가 훨씬 교묘하면서도 잔인하게, 오히려 자유를 개인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이용한다. 억압과 좌절의 본초는 ‘친절, 봉사, 성실’과 같은 낡고도 삭막한 캐치프레이즈로 둔갑한 채 가면으로 그 목적을 숨긴다. 위대한 역사(ἱστορία)는 계급으로 무장한 과거의 ‘적폐’가 투명사회를 통해 비로소 그 베일이 벗겨짐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롭고 평등한 사상의 출현하여 마침내 주인과 노예의 불편한 관계를 해소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웃음을 빙자한 가면의 긍정성은 페르소나 군중 특유의 익명성과의 변증법을 통해 은밀한 자아착취로 변모한다. 그것은 본질을 숨긴 채 끊임없이 생존하고자,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가 제창한 우리 안의 이기적 유전자처럼 움직인다는 것이다.




부모인 나는 나의 자식에게 선물하고자 멋진 장난감 기차를 고르고 눈앞에 놓인 포장지도 성심성의껏 본다. 과연 어떤 것이 포장지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는지 곰곰이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색상, 크기, 무늬 등으로 위장한 가면은 아이의 즐거움을 왜곡해 ‘소중한 내 새끼’에 대한 숭고한 사랑을 타락시킨다. 검은 고양이든 하얀 고양이든 간에 그것의 본질은 고양이다(黑猫白猫論). 양몰이를 위한 파수꾼을 찾고자 한다면, 그것의 색상이 무엇이든 간에 양몰이에 적절한 종부터 골라야 하지 않겠는가.


정의란 무엇인가. 옳고 그름, 공명정대, 판관 포청천, 추상열일(秋霜烈日), 디케의 저울(Justitia) 등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본래의 개념어들이 나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다. 뜨거운 물에 인스턴트커피 가루를 부으면 그것으로도 충분히도 훌륭한 커피가 된다. 내용물이 오염된 상수원에서 나왔든, 그것을 담은 컵에 물때가 점철됐든, 커피가루가 아닌 계피가루였든 간에 그것은 그 자체로 충분히 커피가 되어 우리 앞에 놓이게 된다. 만약 이를 지적하면, 그자는 달이 아닌 손가락을 보는 것만큼이나 어리석다고 대중의 뭇매를 받을 것이다. 오늘날의 정의(正義)는 그렇게 정의(定義)되었다.


  ‘가면’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고 자유로부터의 해방을 약속했다.

  ‘가면’은 전체주의의 망령을 몰아내는 민주주의의 희망이자 꽃이다.

  ‘가면’은 알몸만 드러낸 남녀의 거친 숨소리를 투명하고 올바르게 만든다.

  ‘가면’은 정의를 강자의 전유물이 아닌 해치의 뿔로 만든다.

  ‘가면’은 부덕함의 소치를 정당한 영광으로 빚어낸다.

  ‘가면’은 천국이다.




어느새 자정이 다가오고 있다. 여린 신데렐라는 계모의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한다. 모두가 가면을 쓴 무도회장은 웃음과 희망의 축제이자 부정성의 결여로 만든 유토피아이거늘. 소녀의 천한 신분과 비루한 행색을 본 ‘착한’ 요정은 그녀에게 멋진 드레스와 유리 구두, 고급스러운 마차와 고귀한 네 필의 백마를 하사한다. 소녀의 일탈은 자신을 구속한 일련의 고초와 속박에서 해방된 하나의 예술이자 눈부신 몸부림이다. 그러나 요정은 12시를 강조하며 가면과 탈의 구분을 잊지 말 것을 당부했다.


하지만 거짓된 개성으로 자신을 기만한 대가는 원체 큰 법이다. 투명한 압제로부터의 자유는 이성에 의한 속박과 다르지 않았다. 그녀의 마차가 흉측한 늙은 호박으로 바뀌어 감에도 그녀는 마차라 주장한다. 멋진 의상이 찢어져 남루한 부엌데기로 바뀌어도 그녀는 드레스라 부른다. 낡은 고무신이 그 자신의 정체성을 부르짖을 때조차 그녀는 애써 유리구두라 자신을 속인다. ‘우울’한 신데렐라는 그렇게 행복을 지킬 수 있었다.


“푸른 강을 뒤덮은 수많은‘가면’을 바라본 갈매기 한 쌍. 끼룩끼룩. 키득키득. 깔깔. 껄껄. ‘부러진’ 날개를 감싸듯 참 조심히도 날아간다. 강은 바다를 이룰 것이며 우리는 이 또한 역사라 부를 것이니. 아아. 저 갈매기들은 아는가. 우리의 기쁨을, 우리의 자유로움을”





2020. 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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