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쏘시개 연작, 28번
오늘 하루도 다 지나갔습니다. 눈을 떠 보니 시계는 오후 7시 50분을 가리키고 있고, 바깥엔 어둠이 깔린 지 오래인 듯 보였습니다. 마지막 카톡 읽기 내역으로 보건대 아마도 2시간 정도 잤나 봐요.
그런데도 이상하게, 아니 여느 때처럼 피곤함이 가시질 않네요. 이제는 거의 피로가 일상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아무리 <피로사회>라고 한들, 내 집·내 방에서조차 작업복을 벗질 못한다면 그게 과연 온전한 제 방이긴 할까요?
아뇨.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일과를 마치고 난 다음엔 기분 좋은 피로와 노곤함을 반찬으로 잠이라는 식사를 해야 제맛일 텐데, 이상하게 제 꿈은 그런 맛이 안나더군요. 마치 소금 대신 모래로 간을 친 미역국을 마신 기분이랄까. 아니 미역이라도 제대로 들어갔으면 참고 먹었으려나요? 예전엔 먹을 것이 없을 땐 나무껍질도 먹고, 빵에다가 톱밥같은것도 갈아서 넣곤 했으니 말이에요.
어쨌든 자고 일어나면 항상 입안이 텁텁하고 기분도 찝찝하니 매우 불편했습니다. 구강이 건조한 이유는 생각건대 수면무호흡증이나 과한 코골이로 인한 결과물이겠지요. 코로 숨을 쉬어야 했는데, 입으로 들이마시기만 하니, 침이 마를 일이 없었던 겁니다. 기분이 이상한 건 분명 악몽 때문일 겁니다. 저는 매일 자고 일어나면 악몽 때문에 하루를 설치곤 하거든요. 내용도 너무 각양각색이라 마치 온몸을 골고루 얻어맞는 기분입니다.
피곤함과 악몽은 저의 한 부분이 된 지 오래됐습니다. 이러다가 축객령(逐客令)을 쓸 타이밍도 놓쳐버릴 것 같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마치 모래주머니를 양팔에 하나씩 붙인 것처럼 활자를 입력하는 손가락에 무게감이 느껴지는 건 결코 기분 탓이 아닐거에요. 만약 손가락단련을 위해 훈련용으로 제가 직접 단 게 아닌 한, 그건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붙여진 족쇄나 다름없을 겁니다. 소설에서나 볼 법한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의해 통제되는 존재같다고나 할까요.
맞아요. 기계. 로봇. 저는 마치 기계 같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기계랑 같다고 보기도 곤란해요. 슬프게도 저는 완전히 통제 가능한 존재는 아니라서 말이에요. 제 ‘자신’도 언제, 어떻게 움직일지 상상조차 못 하는데, 아무리 무언가가 있다고 한들 저를 통제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줄에 매달린 꼭두각시가 아닙니다. 오히려 약간의 자율능력을 지닌 고철 덩어리라고 보는 게 더 나은 선택지라고 봅니다.
저는 왜 피곤해 하는 걸까요? 이유를 찾아 나서는 건 마치 고된 여정 같습니다. 끝이 보이질 않고, 그 과정 역시 녹록치않으니 말이에요. 앞서 언급한, 모래의 비유는 그냥 나온 게 아니랍니다. 현재 당면한 결과, 그것을 마주보기만 한다고 해서 원인이 뚝딱 나오는 건 아닌 이상, 사막처럼 답도 없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일을 해야 하니까 말입니다. ‘힘차게 거꾸로 오르는 연어’마냥 저는 저를 피곤하게 만든 그것을 찾기 위해 오늘도 벽에 기댄 채 지그시 눈을 감아 봅니다.
방이 어두운 건지, 아니면 내 시야만 그렇게 보이는 건지 갈피를 못 잡을 때 먼저 떠오르는 건, 자기 전에 마저 다 읽지 못한 책 한 권이었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냐고요? 다 읽어야만 했던 걸 읽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어째서 읽어‘야’만 했다고 표현한 걸까요? 무슨 이유에서 저는 단순한 독서 행위에 대해 목적·의무를 뜻하는 당위적인 ‘야’를 써야만 했던 것일까요. 생각컨대 그것은 저 자신과 약속한 것에서 연유한 것으로 봅니다. 저는 매일 정해진 분량의 독서량을 채워야 한다는, 이른바 강박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채우지 못하면 심적으로 힘들고 신체에도 이상 반응이 나타나곤 하니까요. 예를 들어 볼까요. 오늘 <두뇌보완계획 100>이라는 책을 50쪽 읽겠다는 마음가짐을 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러면 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걸 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능력하다는 콤플렉스에서 발현한 자격지심,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철칙을 준수하지 못했다는 데서 오는 ‘양심’의 힐난, 이제는 하나의 규칙적인 생활이 되어버린 일과표를 채우지 못했다는 데서 오는 불안감 등 그야말로 감정의 ‘사이토카인 폭풍’이 불어닥치게 됩니다. 그 이후엔 제 신체가 바톤을 이어받습니다.
우선 땀이 나기 시작합니다. 더워서 나는 뜨거운 땀이 아닌, 이상현상을 감지하고 알리러 나오는, 마치 화재경보기에서 나오는 차가운 스프링클러 말입니다.
그러고 난 다음엔 심장이 평소보다 더 뛰기 시작합니다. 평소 박동수보다 더 현란하고 심각하게, 마치 야생 늑대를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우연히 마주한 듯 신체에서 미친 듯이 아드레날린을 방출하는 것이죠. 그 결과 시야가 점점 어두워지는 걸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아무리 눈을 뜬들 색깔이 온전하게 들어오지 않아 마치 색맹이 된 듯한 기분도 들며 구멍 난 항아리에 물이라도 붓듯, 빛을 눈에 담으려 한들 자꾸 어디론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요약하자면 일상에서의 나비효과는 너무나 비극적인 시나리오대로 흘러갔습니다.
역시 저는 그 책을 읽어야만 했습니다. 읽었다면 저의 수면도 죄책감에서 벗어난 기분 좋은 잠으로 이행될 수 있었을 테니까요. 저는 건방지게 침대에서 책을 읽어 선 안되었습니다. 거기에서 독서를 하는 건 스스로 잠을 구걸하는 행위나 다를 바 없었으니 말입니다. 푹신한 이불과 침대가 마련되어 있는 그곳과 복잡한 머리 쓰는 일이 섞이면 자연스레 독서로부터 도피 행위가 나타날 거라는 걸 저는 처음부터 알았습니다. 과부하가 생길 법한 내용을 한 번에 머릿속에 넣게 되면 식혀줄 필요가 있을 테고, 그 방법 중 제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수면이니까요. 이 정도면 거의 미필적 고의범이라고 봐도 무방할 겁니다. 어떤 결과가 일어날 줄 알면서도 ‘흔쾌히 어쩔수없이(?)' 그 행동을 했으니까요. 침대에서 머리 쓰는 일을 하면 필연적으로 잠을 자게 될 거라는 것을 알면서 저는 과감히 독서를 자행했고 역시나 잠을 자게 되었으니, 이 상황과 너무 잘 맞지 않나요? 저는 범죄자입니다. 정해진 약속도 제때 지키지 않는 파렴치범입니다.
그렇다면 악몽 역시 이러한 죄책감의 발현으로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죄스러운 감정을 느낀 채 ‘원치 않는’ 잠을 잤으니 그 대가로 신이 벌을 내려주는 것 말입니다. “감히 네가 멋대로 잠을 잔단 말이냐? 너는 벌을 받아야 해. 고행을 통해 반성해라. 그리고 다시는 그러지 마라”고 하듯 경을 치는 걸 수도 있고, 아니면 평범하게 본심을 숨긴 채 앞서 언급한 신체적 징후에 덮어씌워 알 수 없게 만든 걸지도 모르죠. 물론 제3의 선택지도 있습니다. 제가 괜한 쓸데없는 걱정거리를 만들어 호들갑을 떤 나머지 신이니 징후니 같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떠드는 것이라 보는 가능성 말입니다. 셋 다 일리 있어 보입니다만, 남들에게 감히 조언을 구할 만한 처지도 아니라 세 번째 시나리오를 고를 자신은 없으니 1번과 2번 중에서 찾는 게 나아 보입니다.
그래도 3번 선택지를 재고해보는 게 어떠냐는 지적도 있을 수 있습니다. 너무 자존감이 낮은 것 아니냐는 관심 어린 질타를 할 수 있고. 단순한 히스테리에서 나타난 일시적인 울적함 때문이라는 다소 전문적인 조언도 해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열 길 물속의 깊이는 알아도 사람 속은 모른다.’라는 말이 있죠. 그만큼 복잡하고 확인하기 어려운 게 우리 ‘사람’의 속성이니 제 입장에선 이러한 지적을 반박하는 것도 일견 어려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과학철학자인 칼 포퍼는 자신의 저서에서 ‘반증 가능성’이라는 개념을 설파했습니다. 과학이 성립하기 위해선 그것에 대해 마땅히 반박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뜻이죠. 대표적으로 ‘신’개념이 그렇습니다. 신은 존재할까요? 제 답은 부정적입니다. 제가 앞서 말한 1번 선택지에 나온 그 단어는 사실 알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알 수 없다’라는 것은 불가지론, 즉 있다고도 없다고도 단언할 수 없는 상태임을 주장하는 것을 뜻합니다(갑작스레 어려운 개념을 들먹거려 당황스러울 수 있겠지만 이러한 설명이 있어야 비로소 저의 반론이 나올 수 있으니 부디 너그러이 이해해 주세요).
‘자존감이 낮은 것’이나 ‘히스테리에서 연유한 스트레스’나 이런 단어들은 하나 같이 애매·모호하고 입증하기 어려운, 이른바 반증 가능성이 낮거나 아예 없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과학의 대상이 될 수도 없으니 논리 재료로도 쓰기 어렵죠. 도대체 자존감이 낮은 건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높고 낮음의 표현을 쓰기 위해선 반드시 비교 가능한 대상이 존재해야만 합니다. 만약 그들이 제 자존감의 정도가 낮음을 지적하고 싶다면, 상대적으로 높은 대상, 그중에서도 현실적으로 대비(對比)하는데 문제없는 데이터가 요구됩니다. 해맑게 웃고 있는 10살짜리 꼬마애의 당돌함과 제 상태를 비교할 순 없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아직 그들이 설득력 있게 저의 ‘낮은’ 자존감을 지적해줄 만한 대상을 제시하는 걸 보지 못했습니다. 아니 그들이 제시하지 ‘못했다’라는 게 더 적절하겠죠. 물론 그분들에겐 저한테 그러한 대상을 찾아줘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따라서 저에 대한 지적에 대해 앞서 제가 언급한 방식의 반박은, 오히려 역으로 저의 설득력을 떨어뜨리게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저 역시 그분들의 지적을 온전히 받아들여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결국 양쪽 모두 계속 줄만 붙잡은 채 제자리에서 버티며 줄다리기를 이기려는, 이른바 답보상태에 놓여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지적하자면 자존감을 어떻게 수치화할 수 있을까요? 수치화란 주관적인 대상을 객관적인 지표로 환원하는 것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근무만족도를 조사하는 한 회사에서 설문 항목에 1점부터 10점까지 점수표를 나열했다고 했을 때, 주관적인 개념인 만족을 점수라는 객관적인 수치로 바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존감은 사람마다 다른 기준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주관적인 표현인데, 이것을 과연 숫자로 바꿀 수나 있을까요? 저는 이에 대해 부정적입니다.
행복·슬픔·불행·연민 등의 감정들로 이뤄진 하나의 꾸러미를 떠올려 봅시다. 우리는 누군가의 꾸러미를 보고 자신의 그것과 ‘비교’해 평가를 합니다. “너도 슬프구나. 나도 슬퍼”, “나도 그 기분이 뭔지 알아.”, “난 너를 이해해.” 등의 말을 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이 말들은 모두 쉽사리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시험을 망쳐 형편없는 점수를 받은 학생의 ‘슬픔’과 부모님을 사고로 잃은 홀로 남은 자식이 겪은, 그리고 앞으로도 겪게 될 ‘슬픔’은 모두 비극의 전초로서 같은 부정적인 영역에 속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경험에 비춰볼 때 이 둘의 양적 비교는 범주의 동질성과는 다르게 봐야만 할 것 같습니다. 쉽게 말해, 똑같은 양의 슬픔이라고 보긴 어렵다는 것이죠. 우리는 여타 장례식장을 한 번은 가본 경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장례의 대상이 자기 자신과의 관련성이 높을수록, 소멸로써 빚어질 고통의 정도 역시 높아진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즉, 회사 동기 부모의 죽음보다는 자신의 부모의 그것이 더 고통스럽다는 것을 말입니다.
물론 누군가에게 있어 시험 역시 장례에 비견할만한 중요사건일 수 있습니다. 감수성이 높을수록, 그 고통의 정도가 망자를 추모하는 이의 그것과 비교해도 손색없을지도 모르니까요. 하지만 단언컨대 우리 사회에서의 일반 상식 잣대로 본다면 후자가 더 슬픈 것으로 판단될 것입니다. “죽음은 모든 것을 뒤바꾼다.”라는 대사도 있을 정도니 말이니까요. 너무 극단적인 비교 사례를 놓아서 그런지 쉽게 이해는 가지만 현실성은 떨어지는 듯합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파헤칠 만한 문장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사회에서의 일반 상식 잣대’가 그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사례에서는 죽음이라는 하나의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이 가진 무게감으로 인해 사회 공동체 내부에서 형성된 기준관념이 존재하는데, ‘망자에 대한 예의’와 같은 도덕의 영역이나 ‘장례식장에서의 소란 등을 처벌’하는 법의 영역이 그것입니다. 이는 오랜 시간을 거쳐 축적해온 데이터가 많은 만큼 비록 주관적인 개념일지라도 양적 비교가 가능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인 셈입니다.
하지만 자존감은 어떨까요? 높은 자존감과 낮은 자존감은 비교 가능할까요. 우리는 자존감에 대해 제대로 된 논의조차 하질 않았습니다. 애당초 자존감이 자존심과 어떤 점에서 다른지조차 설명하기 어려운 게 현실입니다. 따라서 어떤 자존감이 어떤 자존감과 어떤 점에서 비교 가능한지 그 기준점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선결되지 않는 한, 저에 대한 그들의 ‘자존감’ 비판의 설득력은 떨어질 것입니다. ‘막무가내로 우기는 방식’으론 제대로 된 조언은커녕 대화조차 나누지 못하기 때문이죠.
제가 너무 과하게 생각한 나머지, 이러한 자기 합리화를 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마치 제가 타인의 선한 의도에서 우러나온 도움을 ‘합리적’으로 거절하는, 이른바 쓸데없이 자존심만 가진 인물로 비춰지는 것 같아 씁쓸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SOS를 바닥에 적어본다한들, 온갖 미사여구로 점철된 절차나 과정이나 들먹이면서 구조헬기의 밧줄을 거부한다면 누가 저를 구하려고나 할까요? 제가 타인이라도 저 같은 사람은 구하지 않을 겁니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라는 식의 공격부터 시작해 개인 신상에 관한 악담을 퍼붓는 인신공격도 내뱉을 겁니다. 그렇다면 저는 그렇게 될 줄 알면서도 이렇게 행동한 것이니, 방치돼 죽어 마땅할까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사실 밧줄은 누가 뭐라 해도 객관적인 대상이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저로선 그 밧줄조차 의심이 가니 어쩌겠습니까. 전래동화 중 썩은 동아줄을 타고 올라가다 줄이 끊어져 결국 가시덩굴에 떨어진 호랑이의 우화가 괜히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아무리 외관상 튼튼해 보일지언정 그것을 직접 타고 올라가기 전엔, 그것이 저를 구할 생명줄이 될지 아니면 더 깊숙한 심연으로 빠뜨릴 지옥행 열차표가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저는 저 자신의 이러한 태도를 ‘뻔뻔한 철벽남의 객기’라기 보다는 ‘철저한 방패남의 냉철함’이라 칭하고 싶습니다. 지나친 신뢰에서 기반해 섣부른 희망을 갖는 것 역시 또 다른 고통의 전주곡이 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어쩌면 저의 글쓰기는 이런 이유에서 읽는 이에게 마치 SOS 신호를 보내는 것 같습니다. 여타 요청과 달리 “나는 도움이 필요하니 도와달라”고 정갈한 틀에 맞춰 소리치는 것 정도만 제외하고 말입니다. 제대로 된 설득력을 갖춰 구해달라고 요청하는 점에선 일견 건방져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래도 저는 계속해서 바닥에다 돌을 깔아보려 합니다. 혹시 모르잖아요? 제대로 된 동아줄을 구비한 헬기가 제 위를 맴도는 날이 올지. 시계를 보니 어느새 10시를 훌쩍 넘겼습니다. 몇 시간 후엔 다시 악몽을 마주하게 될 것 같아 벌써부터 심란해집니다. 그럼에도 고무적인 건 저는 오늘 하루도 ‘무사히’ 지나갔다는 겁니다. 비일상의 일상화, 뉴노멀(New Normal) 등의 단어가 오늘날의 세태를 꼬집듯 자신을 내보이는 걸 보면 확실히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체감하곤 합니다. 그렇다면 피로감과 악몽이 어쩌면 저에겐 그런 대상은 아닐까요? 모르겠습니다. 이 점에 대해선 앞으로도 계속 글을 쓰면서 답을 찾아봐야 할 것입니다. 어떤 해답이 나올지는 앞으로의 회상 행보에 따라 결정될 터, 사막 여행에 길을 잃지 않게 나침반이나 점검해야겠습니다. 바람은 여전히 차고 달은 오늘 하루도 여전히 하늘 높이 떠 있습니다. 달빛에 비친 안경렌즈에서 어둠을 몰아내 줄 광명이 나타납니다.
신이시여. 부디 저를 구원해주시길 바라고 또 바람이옵니다.
2020. 8.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