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에 관한 단견, 두 얼굴의 야누스

다음은 우리 차례다

by 소는영


상이한 존재들이 서로를 물어뜯으며 오늘도 인터넷 공간에선 투기장이 한창이다. 불행히도 쟁투의 본래 특성상 상황이 심화함에 따라 악성 댓글, 인신공격을 비롯한 타인모독이 자행되는데, 이 과정에서 행위자는 자신의 책임을 조금이라도 덜고자 ‘표현의 자유’라는 방패를 든다. 천박성과 험악함의 화신들로 고조된 싸움터에서 그것만큼이나 든든한 보험도 없을 테니, 상대방은 욕을 듣고 참을 것인지, 아니면 똑같이 욕으로 상대할 것인지 양자택일의 문제에 휩싸이게 된다. 어느 쪽이든 이전투구 딜레마 상황을 피할 수 없어, 그야말로 눈뜨고 코베인 격이 될 수 있다. 이‘표현의 자유’라는 단어는 날카로운 욕설을 더욱 예리한 칼날로 만들어 준다는 이유에서 자주 악용되곤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자유란 무엇일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가 이끈 나치독일의 대두를 예견한 학자 에리히 프롬이 쓴 《자유로부터의 도피》나, 영국의 대표적인 철학자인 데이비드 흄,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같이 오늘날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을 펴보라. 장담컨대 자유라는 단어가 참 많이도 쓰인 걸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의 정의를 옛날 책에서나 볼듯한 추상적이고 구체적이지 않은, 이른바 우주의 암흑물질 같은 개념으로 보면 족할까. 그걸론 부족하다.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파랑새, 나는 그가 되고 싶다.'


국어사전에서 볼 법 같은, 문학적 표현은 읽는 이들로 하여 긍정적인 기분을 갖게끔 해준다. 하지만 이때의 단어는 파랑새의 상태를 설명하는 비유에 지나지 않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불명확하다. 이때 자유라는 단어 대신 다른 표현을 쓰더라도 파랑새의 상태가 크게 달라지진 않을 것이기에 그렇다.


그렇다면 법학에서는 자유를 어떻게 정의를 내리고 있을까. 인간으로서의 의지를 가진 인격체가 그 자신의 이성에 따라 특정 사안에 있어 중요 결정을 수행할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자격이자 권리를 자유라 일컫고 있다. 민법상 계약의 자유나 앞서 언급한 헌법상 표현의 자유와 같이, 너무나 많은 자유가 법률 이곳저곳에 산재(散在)하고 있는 만큼 구분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따라서 나는 이것에 대해 기본 법학에서 논하는 두 가지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하나는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라 일컫는 ‘소극적 자유’이고 다른 하나는 무엇의 자유라 부르기도 하는 ‘적극적 자유’다.




우선 여기서 말하는 소극과 적극은 우리가 일반생활 에서 사용하는 용어와 다를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누군가를 가치 판단할 때 소극적이라 칭하는 것은 일견 부정적인 뉘앙스를 전달할 우려가 있다. 일상 언어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접한 적이 있을 것이다.


“너는 너무 소극적이라 문제야.”
“얘가 원체 소극적이라 그래요. 이해해 주세요.”
"그럴땐 적극적으로 임해보는게 어떨까?"


이때의 판단 영역은 사람의 성격이다. 매사의 접근방식이 주체적이지 아니하고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처신하지 않는다는 점을 꼬집듯, 일상에선 수동적인 행위와 구분하지 않고, 동의어 마냥 혼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학에서 사용하는 ‘소극’ 은 이와 다르다.


예를 들어 보자. 의지를 지닌 '김갑동'이 국가적 어젠다(議題)를 논의할 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자 할 때 무엇이 필요한가. 회의장에 참석한 '이을남'으로부터 방해를 받지 않아야 한다. 인간의 온전한 의사 진행을 정당한 이유 없이 그르치게 하는 건 그 사람의 소극적 자유(무엇으로부터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방식의 반대화법이 정당화된다면, 그 누구도 자신의 의견을 쉽사리 개진하려 하지 않을 것이고, 이는 곧 보이지 않는 합법적 다수의 횡포를 방조함으로써, 전체공동체의 붕괴를 초래하고자 함에 묵시적으로 동의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김갑동'에 해당하는 모든 이는 외부에 속한 '이을남'으로부터의 자유를 기본적으로 보장받음으로써만 인격체가 지닌 온전한 의지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소극적 자유는 그 이름에 대한 인식과 달리, 그 위상을 매우 달리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그렇다면 이것만으로 우리는 자유롭다고 외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반은 맞고 반은 그르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 그리스, 아테네 등 일명 과거 노예제 국가를 생각해보자. 플라톤은 그의 철인정치에서 도시 내 존재하는 이들을 지도자, 군인, 서민으로 나눠 각자의 역할을 해야 공동체가 제대로 돌아갈 수 있음을 그의 저서인 《철인국가론》에서 설파한 바 있다. 그들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해내야만, 비로소 의사결정권자인 시민의 표상을 의지적으로 드러낼 수 있기에 그렇다. 즉, 철인의 세 부분은 온전한 자유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시의 노예와 여성들은 어떨까? 그들 역시 외침으로부터의 보호를 받을, 이른바 소극적 자유를 지녔다고는 할 수 있다. 그러나 선거의 자유, 공정한 재판을 청구할 자유, 모든 이가 동등한 신분으로 살아갈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등 무언가를 구체적으로, 가시적으로 요구할 권리는 가지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리스, 아테네는 자유롭지 않은 시대라고 봄이 타당할까.

바로 이 지점에서 정·오답의 배점이 나뉜다. 당대의 시점에서 본다면, 여성과 노예는 분명 어느 정도 자유를 누린 의지적 존재였다. 하지만 오늘날의 관점에선 그렇지 않다. 이들은 시민이 지녀야 할 권리를 온전히 누리고 있지 못했다는 것이다. 즉, 적극적 자유의 부재를 근거로 ‘정치적 미개함’이 역사의 발전적 ‘진보’를 저해했다는 식으로 해석한다. 그들의 주장에 대해 비판할 수 있겠으나 여기선 이들의 역사의식을 지적하진 않을 것이다. 이론의 여지가 많을 뿐 아니라, 섣부른 판단은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를 자초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시선에서 과거를 바라볼 때, 그 당시의 자유가 불충분할 수 있다는 의견에는 동의한다. 지금 내가 이 글을 쓸 수 있는 것만 보아도, 자신의 의견을 남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고도 당당히 개진할 자유를 지녔다는 점에선 소극적이고 전개할 비판을 근거로 해결촉구를 요구함에 있어선 적극적 요소도 가지고 있기에 그렇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자유는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를 포함하는 상위 개념으로 인간의 온전한 자유의지를 바탕으로 행사할 수 있는 일련의 권리행위라고도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며 우리는 그 사상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피케티의 《자본론》,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자 선언》 등 이를 비판하는 논조에서의 저작물이나 현대 경제학의 주류인 시카고학파와 같이 이를 옹호하는 입장을 살펴보더라도, 다음과 같은 문장에 어느정도 동의를 표할 것이다.


“자본의 발아(發芽)는 개인의 소유권이 확립되어야만 가능하다”


소유권은 근대 민법의 기본원칙인 사적 자치의 원리를 실현하고자 할 때 반드시 요구되는 권리로서, 타인의 부당한 침탈을 막아준다는 점에서 배타적 성격을 갖고 있다. 내가 가진 스마트폰을 사람들이 많은 시내 한복판을 지나갈 때도 당연하게 사용할 수 있는 건 단순히 운이 좋아서가 아니다. 이는 시민으로서 마땅히 향유(享有)할 수 있게 해주는 소유의 법익이 법률상 정당하게 보호받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지나가던 B가 순간적인 욕심에 내가 쥐고 있던 스마트폰을 강탈했을 시 형법에 의거 수사기관과 사법기관이 그를 강도죄로 의율(擬律)할 수 있게 해주는 것도, 자유시장의 맹아(萌芽)를 받쳐주는 ‘소유권’의 화분이 튼튼한 상태로 놓여있을 때 비로소 그 힘이 유효할 수 있다. 그래야 안전한 환경에서 자유로운 경제활동에 집중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야 공동체의 내적 성장을 통해 미래를 지향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자유시장의 수호자들이 같은 목소리로 ‘자신의 재산이 부당한 침해로부터 자유로워야 함을 요구’할 것은 너무나도 자명하다.

부자를 부자로 부르고, 빈자를 빈자로 부르는 이유는 어디에서 연유했는가. 부자는 골리앗이고 빈자는 다윗이라는 프레임을 씌우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부자는 악이고 빈자는 선이라 부르짖는 이들의 입은 어느 이성의 끝자락에서 퍼져나온 것인가. 50만 명으로부터 7700만 원을 ‘거둬들인 후’ COVID-19사태를 막기 위한 재원으로 ‘사용하겠다’는 발상은 누구의 생각에 기인한 것인가. 명분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한 개인의 소유권을 국가의 이름으로 참칭(僭稱)해 임의로, 언제든지 앗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오만함을 어떻게 생각해야만 하는 것일까. 단지 하나의 의견일 뿐이니, 브레인스토밍의 부산물(副産物)이니 크게 개의치 않아도 된다는 이들의 의견은 받아들일 수 있는가.




그렇다. 그들의 사상이 내 귀에 들어오게 만든 것도, 그러한 내용에 분노하여 이러한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모두 우리가 가진 자유에서 기인한 것이다. 어쩌면 혹자의 지적처럼 나의 사상 스펙트럼이 극도로 오른쪽에 치우친 나머지 ‘중도’의 시각에선 사소한 일로 치부해도 되는 걸, 내가 예민하게 받아들여 감정적 소모를 동력 삼아 작성한 것이라 해석할지도 모른다. 아니, 그것보다 저러한 주장에 대해 누군가는 ‘타당’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돈이 많다고 알려진 50만 명의 소유권만 ‘정당한’ 법 집행을 통해 가져올 수만 있다면, 나머지 빈자들이 도움받을 수 있을 터 어째서 문제란 말인가?”



범인(犯人)과 범인(凡人), 이 둘은 우리 중에 모두 있다.


한 사회공동체를 구성하는 다수의 시민이 1인 1표의 민주주의적 시스템을 통해 그러한 정책이 타당하다는 걸로 결론 내렸음을 확인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소수 견해로 봐선 안 될 ‘국민’의 뜻이 된다. 만약 그런 일이 온다면, 나의 글은 부자의 입맛에나 맞는 애완견의 꼬리흔들기요, 바닥에 떨어지는 콩고물이나 주워 먹고 다니는 스캐빈저(Scavenger, 淸掃動物)가 쓴 하찮은 불쏘시개 취급이나 「자유의 이름으로 도륙」 당할 것이다. 선과 악, 강자와 약자, 부자와 빈자. 중간을 허용하지 않기에 그 무엇보다도 ‘분명한' 이항대립의 쌍이 현존하는 작금의 대한민국 카페에선, 이를 적절하게 섞은 회백(灰白)맛 스무디는 더 이상 찾을 수 없게된 메뉴가 됐다.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도 스무디는 개발되지 않을 것이고 설령 되더라도 인기메뉴로 등극할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약자는 전적으로 선하다는 언더도그마(Under-dogma)가 인터넷 공간 내 익명성과 섞이면 집단의 광기가 되고, 그것은 이제 구성원 개개인의 이성이 사라진 ‘군중’을 양산하게 된다. 당장은 그들의 혀로 빚어진 죽창이 나에게 다가오지 않으니까, 쉽게 말해 50만 명에 해당하지 않으니 그들이 어찌 되든 나랑은 상관없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넘어 앞으로도 자기 앞까지 번호표가 날라 올 일은 없으리라 당연하게 여길 것이다. 이 '자신감'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자유는 한번 맛보면 다신 놓치고 싶지 않은 오묘한 특질을 가지고 있다. 처음부터 노비의 신분으로 태어난 과거 조선의 민초(民草)들 역시 그들에게 닥친 실존적 극한 상황에 봉착하기 전까진 인도의 카스트 제도나 경제학 교과서에 나오는 이상적인 그래프의 독립변수처럼, 자유를 ‘그저 그렇게 있던 것’으로 여긴 채 살아왔다. 하지만 망나니가 휘두르는 칼이 마른 풀에 붙은 불씨 마냥 퍼져나가 어느새 그들 자신의 목 앞까지 다가왔을 땐 더 이상 순번은 의미가 없어진다. 물을 가열하다 보면 일정 온도에 다다를 때 뜨거워지기 시작하며, 더 넘어가면 수증기로 변할 준비를 하게 된다. 맹자가 말한 역성혁명(易姓革命)은 위기에 닥친 이들이 선택한 자발적인 상전이(相轉移)다. 뜨거운 열감을 내뿜는 다수 속의 또 다른 ‘다수’는 바람이 분다 한들 꺼지는 걸 두려워하는 촛불이 아니며, 스스로 눕고자 하는 잡초도 아니다. 그들은 자신이 맛본 자유가 사라지는 것. 그게 두려움의 근원이다.




원칙을 원칙(原則)이라 부르는 건 전설 속 동물 해치(獬豸)의 성질이 거칠기 짝이 없고 악을 싫어하는 특유의 버르장머리를 보면 알 수 있다. 상상속의 동물, 해태의 사진이다.


침묵하는 다수를 제압하기 위한 ‘깨어있는’ 다수는 그들이 지닌 옳고 그름의 잣대를 근거로, 차이와 격차를 ‘틀림’으로 규정함으로써 설득의 외향을 띤 비가시적(非加諡的)인 폭력에 나선다. 대법원의 전원합의체에서 사용되는 합의 절차는 저들이 자행하는 ‘합의’와는 궤를 달리한다. 전자가 소수의견을 분명하게 반영해 사회 내의 구석진 곳에서 발버둥을 치는 이들을 존중하는 데 있다. 먼 훗날 바뀔지도 모르는, 새로운 시대의 방향성을 과거의 위대한 발자국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게 해주는 일련의 기록행위를 통해 소수의 적극적·소극적 자유를 보장하고자 가중적 다수결의 방식을 사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후자는 다르다. 그들의 메커니즘 속 이성의 구조물에선, 틀림과 다름이 상존(相存)하기 어렵다. 적과 아군 이외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는 극단적 형태의 흑백논리가 적용된 작금의 상황에선 어쩌면 그러한 ‘오류’가 가장 이성적인 행위의 결과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을 이해하니 벌하지 아니한다는 것과 이해하나 벌해야 하는 것은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이 아니다. 헌법상 평등의 원칙은 다른 거지, 틀린 것이 아니다.


다수가 일반론과 집단지성을 근거로 수(數)의 절대성을 세운다면, 그들이 옳다고 믿으니 그렇게 행동하는 것 역시 옳다는 자연주의적 오류를 더는 막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선 안 된다. 오류는 오류며 틀린 것은 틀린 것이다. 모든 이의 자유는 그 범주 내에서 보호받아야 함은 누군가의 권리에 가중치를 둬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내 주먹을 움직일 수 있는 나의 자유는 당신 턱의 근접성에 제한되어야 한다.”


윌리엄 오빌 더글라스 미국 연방대법원 판사의 발언은 당면한 현실에 매우 필요한 조언이다. 하지만 그들이 바라는 ‘합의’는 위험하다. 반대의견은 우리의 독립성을 높여준다는 점에서 유익하다. 영화 《12명의 성난 사람들》에 나오는 배심원인 주인공은 11명의 찬성에 속하지 않는 이단인 반대자다. 그는 합리적인 의심을 일관적인 기준으로 적용함으로써 ‘현명한’ 다수를 설득하여 결국 피고인을 무죄로 이끌게 된다. 서양에서 유래한 오래된 노래인 《5000만 프랑스인은 틀렸을 리가 없다》가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느끼는 것 역시 단순한 감각의 결과는 아닐 것이다.





500,000번째 사람은 어떤 심정일까. 그들은 그의 재산 형성 과정을 낱낱이 추적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약자에게 적용하던 잣대와는 다른, 이른바 ‘착한’ 기준을 적용할 것이고 더 나아가 하얀 낯빛을 내뱉는 가면을 쓰며 ‘정의’의 채찍질을 가하는 처형인의 모습을 연출할 것이다. 이러한 가상 시나리오 속에서 섬뜩한 감정을 느끼는 건 단지 나의 기우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다면 500,001번째 사람은 어떤 기분일까. 구차한 위로와 자위만으로, 그들은 그렇게 자신의 ‘살아남음’을 정당화하며 이를 찬미(讚美)하고 경탄(敬歎)할 것이다.


“나는 잘못이 없으니 벌 받지 않는 것이다.”
“내가 살아남은 건 저자가 악이고 내가 선이기 때문이다.”
“나에겐 그런 일이 오지 않을 것이다.”



숫자엔 이항대립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구조의 틀을 조금만 바꾸면 손쉽게 전환이 가능하다. 숫자 500,000을 기준으로 위에 있는지, 아래에 있는지로 구분하는 것으로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선 500,002란 숫자는 없다. 오직 50만 명의 ‘500,000’들과 나머지 4950만 명의 ‘500,001’만이 있을 뿐이다. 단지 남의 일처럼 ‘불구경 잼’과 같은 발언을 일삼는 건 파멸을 자행하는 것이자 태풍이 몰아치길 제사 지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수의 정치가 빚어낼 수 있는 비극은 늘 언제나 우리의 가까이에 있다. 멀리서 관망하려 한들, 우리가 이 무대의 주연인 이상 안일하게 방청석에나 앉아있는 건 그 자체 꿈과 같다. 우리가 서 있는 이 공간에서 극작가는 4950만 명의 500,001을 ‘위한’ 장송곡을 연출하고자 한다. 이윽고 성가대는 ‘착한’ 가면을 써 개인성이 사라진 파편이 되어 예리하지만 날카롭진 않은 유리(琉璃)를 목에서 내뱉기 시작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될 것인가.


"관중석이라 생각한 그곳엔 관중이 아니라 거대한 유리 거울만이 있었음을. 우리의 어리석음을 일깨워 준 한 편의 트루먼 쇼나 다름없던 것임을"





전체주의의 망령은 20세기 초에 한정된 유물에 불과한 것일까. 파시즘이라는 용어가 낯익지 않은 건 작금의 ‘민주주의’가 그 역할을 온전히 수행하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 단언컨대 지나가는 이들 가운데 파시즘과 전체주의의 개념을 온전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나는 지식의 저주나 하며 ‘엘리트’의식으로 ‘미개’한 백성들을 ‘계몽’시켜야 한다는, 이른바 전체주의의 시발점인 발언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 역시 ‘설명’을 하는 게 어려울 뿐이지, 무슨 개념인지는 알고 있다. 선분이 긴 직선과 짧은 직선이 제시됐을 때, 우리는 과연 두 선분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을까? 물론이다. 너무나도 분명한 차이를 보이기에 그렇다. 하지만 다수로 구성된 집단에서도 그 판단을 유지할 수 있을까.


실험은 그렇지 않음을 보였다. 자신의 판단에 앞서 여러 이들이 ‘잘못된 판단’을 한 것을 인지하자, 틀렸음을 앎에도 동조하는 모습이 밝혀진 것이다. 실험참가자의 이러한 ‘이상한’ 행동은 합의를 가장한 일련의 일상생활에서도 전체주의와 파시즘의 기운이 남아있음을 간접적이나마 설명한다. 그것의 반감기(半減期)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길었다. 어쩌면 몇 세기가 지나더라도 소멸하지 않은 채 우리와 공존할지 모른다. 방사능을 유발하는 우라늄만 무서운 반감기를 지닌 채, 피폭의 이빨을 드러낸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집단 광기의 대표적 발원(發源)이라 할 수 있는 총통(總統, Führer) 히틀러의 망령도 우리의 이성을 비극의 홀로코스트로 만들어 버리기 충분하다.


“나는 바이러스 따위는 걸리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젊은이의 오만함은 성문을 열어 외침을 기념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행위다. 자신의 강함을 과시하며 스스로 면역계를 허무는 일련의 자신감은 자만심의 별칭에 불과하다. 한번 허물어진 체력은 원래의 상태로 온전히 되돌리기 쉽지 않으며, 만약 그것이 비가역적인 성질을 가질수록 복구 가능성은 더욱 낮아질 것이다. 우리에겐 원하는 자유가 있다면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을, 그러한 것을 요구할 자유가 있다.




명심하자. 다음은 우리 차례다.




2020.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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